소설리스트

〈 24화 〉당신의 의미 (24/93)



〈 24화 〉당신의 의미

29.


딱, 따딱. 어두운 동굴 안에는 모닥불 타는 소리만 조용하게 튀어 올랐다. 아현은 뻐근한 허리를 주무르며 앉은 자세를 추슬렀다. 조심스럽게. 곁에 누운 소녀가 깨지 않도록.

시스템 인터페이스에 표시된 시간은 벌써 새벽 2시. 원래대로라면 아현도 접속을 끊고 현실에서 잠자리에 들었어야 할 시간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낯선 동행을 믿을 수 없기도 하고, 모처럼 휴일이니 오늘 밤은 소녀의 곁을 지켜줄 샘이었다.

사실 현실로 돌아가 혼자 잠을 청한다고 한들, 어차피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시간씩 뒤척이다가 자다 깨고를 반복할 게 뻔하다. 차라리 여기서 이러다가 선잠이나마 드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가상현실에서의 수면이라고 해도 그렇게 질이 떨어지는 휴식이 아니니까.

동굴 바닥은 딱딱하고 차가웠지만 참을 만 했다. 노숙    해봤을 공주님도 견디는데.

아현은 곁에 앉은 소녀의 모습을 다시  번 바라보았다. 조금 흐트러진 담요를 끌어올려주려다가 어느새 깼는지, 눈을 빼꼼 뜨고 아현을 빤히 보고 있었다.

소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세티아, 안 주무세요?”

“난 괜찮아. 피곤할 텐데, 어서 자자.”

그럼에도 빨간 눈동자가 여전히 말끄러미 아현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말 있는 기색이었다.그런데왠지 주저하고 있었다. 망설임이 보인다. 어딘가 초조한 것 같기도 하다.

아현은 구태여 재촉하지 않았다.

소녀는 한참 머뭇거린 끝에,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저는, 정말 짐만 되는 존재일까요?”

확신 없는 목소리였다. 어딘가 간절하고 절박한 느낌이 깔려 있었다. 아현은 당황했다. 갑작스러운 소녀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아.”

그러다가 기억 속에서 무언가 번뜩 떠올랐다. 바로 자신이 뱉은 말이었다.

『“쓸모없는 짐덩어리를 끌고가고 싶진 않거든.”』

일전에 남자의 실력을 확인하려고 던진 도발 때문이었다.

아무렇게나 내뱉은 그 한 마디가 소녀에게까지 닿았을 줄이야.

‘이런,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나.’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소녀는 무척 불안해보였다.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쓸모가 없다고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혼자 끙끙 마음고생 했을 것이 눈에 선하다.

그는 소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미안. 실수했어.”

눈을 마주친 채 손을  잡아주자, 그제야 소녀는 흐릿한 미소를 내보였다.

“당신만큼은 항상 옆에 있어주세요. 언제나...”

목소리가 노곤해지더니, 숨결이 점차 규칙적으로 바뀌어갔다. 자그마한 숨소리가 새근새근 귓가를 간질였다.

아현은 소녀의 눈가에 남겨진 물기를 발견했다. 손을 들어서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손가락을 적시는 감촉은 조금 차가웠다.

그렇게, 잠든 아이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



“북부로 가볼 생각이에요. 그곳의 영주들에게서 반드시 조력을 얻어낼 거예요. 아무리 변방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도 왕실에 충성할 의무가 있어요.”

지난 밤, 소녀가 한참이나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판단은 온전하게 소녀의 몫이었다. 아현은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다.

자신은 필요 이상으로 나설 생각이 없었다. 이미 한   손으로 다른 사람의 기회를 저버렸다는 자책. 그것을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한 이상, 자신에겐 더 이상 타인의 미래를 결정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책임이 어떤 식으로 남겨지는지 알고 있으니. 다시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녀의 말에 남자는 난색을 표했다.

“결국 그리 결단하셨습니까..”

북부로향하겠다는 소녀를 어떻게 해서라도 말리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그 의지가 워낙 확고해보여서, 차마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소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빌헬름 경에게 따로 맡길 임무가있어요. 이제부터 경은 서부로 가 주세요.”

“네?”

“그곳에서도 여전히 왕명을 따르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하셨잖아요. 바로 그들을 모아서, 하나의 세력으로 결집시켜 주세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남자는 소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만류하려고 했다. 사실상 왕국은 지금 내전중이다. 그리고 북부까지는 정말  여정이다. 언제, 어떤 일에 휘말려도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마땅한 호위 병력도 없이 그 먼 길을 가시기에는 너무 위험한-”

남자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내란을 겪고 있는 국토 한복판을 가로질러 곧장 북부까지 가겠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정말 무모하다고 밖에 표현할  없는 행동이다. 용맹한 기사 수십 명과 함께해도 모자랄 마당이다. 수백의 병사가 철통같이 호위한다 하더라도 부족해 보였다. 혼란스러운 정변 속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왕녀는 적에게도 적이 아닌 자에게도 너무나 탐날 법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남자는  이상 토를 달수가 없었다. 그저 떨떠름한 시선으로 소녀의 곁에  인물을 흘긋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왕녀 전하를 지켜왔다던 모험가 여인. 처음에는 그녀의 외모에 시선을 빼앗겼다만 이젠 그 실력 또한 범상치 않다는  알 수 있었다. 잠깐의 일면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뭔가 이상한 음식을 억지로 삼키는 듯한 안색이었다.

이제 남자는 위험하다는 명목으로 소녀를 막기 힘들었다. 그래서 다른 이유를 덧붙였다.

“저 홀로 전하의 소식을 가지고 간다 한들, 일개 기사의 말로는 부족합니다. 귀족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그들을 통제할만한 권위가 존재하지 않으니, 내로라하는 제후들을 반응하게 만들려면 적어도 전하께서 그곳에 함께 계셔야만 가능합니다.”

그 말에, 소녀는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 모험가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세티아. 제가 저번에 드린 반지, 아직 가지고 계시나요?”

‘반지?’

 발짝 뒤늦게, 아현은 지나간 기억을 떠올려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되나요? 네?? 여기서 더 이상 도망쳐 봤자 무슨 의미가 있죠?! 저를 도와주려는 사람들 전부 다 이 꼴이 되는데!!”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소녀는 자그마한 무언가를 그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날아오는 것을 잡은 아현은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정밀하게 보석이 세공된 반지. 처음에 약속했던 의뢰의 보상. 잊고 있었던..

소녀는 멍하게 선 아현을 힘주어 밀쳐냈다.

“가요! 그냥 가라고요!! 내 눈앞에서 사라지란 말이야!!!”』

아현은 무심결에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이내 손가락에 잡히는 무언가를 꺼내보았다.

새하얀 몸체에 박힌 붉은 보석이 햇빛 아래 선명하게 반짝였다. 약속했던 목적지까지 소녀를 데려다 주었을 당시, 의뢰의 보상이라고 받았던 반지였다. 희망을 놓은 소녀가 자포자기하며 그에게 던져준 것이었다.

받아놓고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상황 속에서 중요했던 건 이런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잠깐 단검이랑 같이 빌려주실 수 있나요?”

아현은 소녀의 요청에 의아해하면서도 단검과 반지를 건넸다.

소녀는 먼저 단검으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살짝 찔렀다. 따끔한지 표정을 조금 찡그렸다. 이윽고 소녀의 손가락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빌헬름 경, 손을.”

소녀는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등 위에 핏방울을 톡톡 떨어트렸다. 그 다음 반지에 세공된 보석으로 핏방울 위를 꾹 눌렀다.

그러자 선명하고 붉은 형상이 남겨졌다. 마치 타오르는불꽃을 그려낸 문양 같았다. 그건 단순히 핏자국이라 하기엔 너무 정교해 보였다.

게다가 분명 방금 흘려낸 핏방울인데도, 어찌된 일인지 번지거나 묻어나오는 느낌 하나 없이 피부 위에 문신처럼 그대로 새겨졌다.

소녀는 남자의 손등에 남겨진 문장을 확인하며 말했다.

“이걸 보여준다면 그들로서는 경의 말을 무시할  없을 거예요.”

남자가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케시어스의불꽃.. 어떻게 그것이 모험가의 손에 있었던 겁니까? 어찌하여 왕의 인장을...”

아현은 무심코 되물었다.

“왕의 인장?”

“심지어 무엇인지도 몰랐단 말인가?”

남자는 작게 탄식했다. 미묘하게 찝찝한 표정이다. 살짝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아현이 지니고 있었던 반지의 정체를 설명해 주었다.

“국왕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인장이요. 케시어스의 불꽃이 찍혀 있는 문서는 어명과 같은 권위를 지닐  있지.”

그 말에 아현도 내심 살짝 당황했다. 짐작대로라면, 그 반지는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가치를 지닌 보물이었다. 분명 상징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녀는 사용하고 난 반지를 이쪽으로 다시 돌려주었다. 내미는 손, 차분한 표정에는 조금의 미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

아현이 머뭇거리자 소녀가 다시 한 번 반지를 내밀었다.

“이건 세티아가 계속 맡아주세요.”

“그래도..”

“아니에요, 저한테는 이게 최선이에요. 부탁할게요.”

소녀는 여전히 담담한 기색이었다. 자신이 지금 모험가에게 맡기려는 물건이 무엇인지,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선택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설령 이 여정이 허무한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결국 반역자의 손에 붙잡히는 최후가 소녀를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왕족의 이름으로서 제게 남겨진 마지막 물건을 지키고 싶었다. 이것만큼은 절대로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두진 않을 것이다.

가라앉은 소녀의 눈동자 속에 잔잔한 각오가 내비쳤다.

이후 남자는 왕녀의 뜻에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염려를 떨쳐내지 못했다. 떠나기 전 마지막까지 아현에게 소녀의 안위를 부탁했다.

“이렇게  이상, 책임지고 전하를 지키시오. 반드시. 어떠한 상황이 있어도 전하께 해가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요.”

사뭇 진심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현에게 다짐을 받아내고 나서, 남자는 소녀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 반역에 협력하는 가담자들의 명단입니다.”

그곳에는 여러 문장과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소녀는 받아  두루마리를 곧장 훑어 내려갔다. 내용을 읽어가는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명단 속에, 아는 인물들도 끼어 있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소녀가 다시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작별 인사를 올렸다.

“그럼 차후에 뵙겠습니다. 전하, 부디 무탈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남자가 떠나간 이후, 아현과 소녀도 목적지인 북부를 향해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말안장에 오르는 소녀의 모습이 조금 힘겨워 보였다. 체력적인 소모가 안색으로 드러날 정도였다.되돌아보면 여태껏 쫓겨 다니느라 그들은 제대로 쉬어 갈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래도 별 다른 수가 없었다. 이런 맨바닥에서 조금 더 휴식을 취한다 한들 두텁게 쌓인 피로를 제대로 풀어내긴 힘들었다.

게다가 언제 꼬리를 물고 쫓아올지 모르는 추격자들의 존재까지 은근하게 신경을 긁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그리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목적지까지 도달하려면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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