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화 〉당신의 의미 (25/93)



〈 25화 〉당신의 의미

은은한 조명 아래에 경쾌한 선율이 스며들었다. 모자를 눌러 쓴 남성이 박자에 맞춰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시작했다.

특별한 기교 없이도 듣기 좋은 목소리다. 연주도 능숙하다.

은은하게 깔리는 선율을 듣고 있자니, 시선은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옮겨져갔다. 차분한 느낌의 인테리어. 적당한 어둠이 실내에 내려앉아 아늑함을 더했다.

자그마한 칠판에 분필로 적어놓은 메뉴들과, 이곳저곳 빈티지한 느낌의 소품들. 바 테이블 너머에는 유리잔과 병들이 여러 층으로 진열되어있다.

공간이 그리 넓지는 않았다. 몇 없는 의자와 테이블들은 지나가기 빠듯할 정도로 서로 붙어 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기저기에 편하게 앉아 음악을 즐겼다.

저마다 손에는 음료를 한 잔씩 들고.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아현도 그곳에 있었다. 앞에 놓인 감자튀김을 하나씩 우물거리며. 귓가로 들려오는 노래를 감상하는 와중이었다.

사뭇 즉흥적인 느낌이다. 여태껏 무대에 섰던 사람들은 초청 가수가 아니다. 그저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다가도, 누구든지 자유롭게 걸어가서 노래하고 연주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어설픈 느낌이 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모이다 보니, 이젠 뮤지션들의 라이브 클럽 같은 형태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마침 노래를 마친 남자가 박수를 받으며 넉살 좋게 멘트를 이었다.

“자, 다음 순서는.. 다들 아시죠? 우리 클럽 아벨로의 자랑! 이브의 메인 보컬, 세린입니다!”

열띤 환호성으로 호응 받으며, 아까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세린이 무대에 다가섰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피아노 앞에 사뿐히 걸터앉아 마이크를 당겨 오고 톡톡 두들겨 음향을 체크했다. 아-, 음-, 잠깐 목을 가다듬었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최근에 무척 바빠서 간만에 들렀는데도 여전하네요, 여기는.”

목소리에는 가벼운 웃음기가 섞여 있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그녀를 환영해 주었다.

아현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무대에 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세린의 소개로 알게 된 장소였다. 오는 손님들은 전부 단골 위주고, 다들 그녀가  앨범을 내기 전부터 안면이 있던 사이라고 한다. 그 덕분에 유명세를 얻은 이후에도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  하나라고 들었다.

가게 사장님 또한 수입에 그리신경쓰지 않는 분이라서,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일상의 숨겨진 휴식처 같은 그런 곳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세린의 목소리도 한결 편하게 들렸다.

“클럽 아벨로는 항상 좋은 기억으로 떠올리는 장소에요. 그건 아마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아현이 있는 방향을 힐끗 쳐다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아현은 무심코 숨을 삼켰다. 그런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린은 살포시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말만 이렇게 해놓고 자주 못 와서 솔직히 찔리네요. 얼마 전에 사장님이 이제  목소리도 기억 안 난다고 아쉬워하시더라고요. 미안해요, 그동안 열심히 노래 연습 하고 있었어요. 여기서 여러분들께 한 곡 불러 드리려고요. 그럼 시작해볼까요? 편하게 들어주세요.”

살짝 숨을 가다듬고, 하얀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찬찬히 눌러갔다. 경쾌한 간주 속에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반짝이는 눈동자. 생기가 빛나는 입술. 달콤한 목소리. 박자를 맞추며 살랑살랑 흔들리는 어깨. 그럴 때마다 조금씩 흘러내리는 머리칼까지. 아현은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마도 지금 그녀를 지켜보는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공간의 모든 것이 전부 그녀를 빛나게 했다. 어느 누구보다 특별하게 돋보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마치 심장을 움켜잡힌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너무 멀리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저 밤하늘의 별처럼.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같아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조금 아려 왔다.

들려오는 숨소리 하나에도 정신없이 몰입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노래가 끝났다. 아현은 그제야 멍하게풀어졌던 표정을 다잡았다. 테이블에서는 뒤늦게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갈채 속에서도 선명한 휘파람 소리. 들뜬 호응을 받으며 어느덧 세린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한 곡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던 것을, 열광적인 성원에 못이겨  곡이나  부르고 마친 참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사이를 지나와서 아현의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물어보는 한 마디.

“어땠어요?”

아현은 그 감상을 말로  나타내기 어려웠다. 그저 정말 좋았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부족한 표현에도, 또 다시 배시시 웃어주는 그녀. 맑고 깨끗한 미소.

테이블 위에서 유리잔  개가 경쾌하게 부딪쳤다.

무대는 어느새 다음 순서로 건너갔다. 갈색 머리칼을 느슨하게 묶어 넘긴 여성이었다. 어깨에 메고 있는 우쿨렐레를 튕기며, 나직한 멜로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노래를 잠깐 조용히 감상하다가, 아현이 말했다.

“미안해요.”

세린은 가볍게 되물었다.

“뭘요?”

“바쁠텐데. 신경 쓰게 만들어서.”

그녀가 일부러 시간내서 자신을 만나준다는 걸 안다.

가뜩이나 빠듯한 스케줄일 텐데. 제 앞에선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지만, 가끔 이야기해주는 근황만 들어 보아도 최근의 일정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진심으로 아현을 걱정하고 염려해준다.

이제 자신은 그녀와 보내는 시간을 기대하면서도 망설이게 됐다. 물론 세린과 함께하면 무척 즐거웠지만, 저에게 그런 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서. 차마 더 이상 바랄 수가 없었다. 염치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주었다. 연락이 조금 뜸해지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그녀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일 있냐는 듯, 항상 부드럽고 따뜻하게. 당연한 것처럼 이쪽을 우선해주었다. 그게 미안해서...

세린은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어쩐지,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현한테서 그런 말은 듣기 싫어요. 알잖아요.”

“...고마워요,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생각했을 때도, 이쪽이 먼저 손을 놓아버렸을 때도, 결국 다시 찾아와준 사람이 그녀였다, 그때도 지금도. 여태껏 자신은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아왔다.

“그런데도 저는 해줄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세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짜증 섞인 어조였다. 아현은 살짝 놀랐다. 언제나 상냥한 성격의 그녀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내비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으니까. 진심으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표정을 굳히고 그대로 쏘아붙였다.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없다고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때도, 그곳에서 아현이 곁에 없었다면 나는...!”

거기까지 하다가, 입술을 꾹 물고 말을 삼켰다. 숨 한번 가다듬고. 조금 진정한 세린은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세린은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부드럽게맞닿은 온기가 피부를 감쌌다. 그녀는 나긋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저는, 이렇게 다시 한  당신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아현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낯빛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항상 이렇게 되어 버린다. 언제나.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것들이 의미 없어진다.

한시도 잊은 적 없던 자책과 회한, 남겨진 후회의 조각들이, 그녀의 다정한 한 마디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린다. 얼룩진 기억들을 잠시 묻어두고 예전처럼 웃을 수 있었다.

세린은다시 한 번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앞으로 그런 생각 하지도 말아요. 알겠죠?  번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땐 진짜  정도로 안 넘길 거예요.”

서로의 시선을 맞추고, 굳은 얼굴로 다짐을 받아냈다.

아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세린은 엄한 표정을 풀고 웃어주었다.

그 미소에 마음이 녹아내릴 것 같아서. 한참동안 아무 말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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