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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화 〉찾아가는 길 (27/93)



〈 27화 〉찾아가는 길

여자는 제자리에 그대로 붙박여 멈춰 있었다. 숨은 쉬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우두커니 서서 아현을 바라보았다. 크게 뜬 두 눈만 느릿하게 깜빡였다.

아현은 그녀의 모습을 차분하게 살펴보았다. 선명한 이목구비. 순하게 생긴 인상은 아니었다. 무표정이었다면 제법 차가운 분위기였을지도. 그러나 지금은 멍하게 풀어진 눈매 덕분에 그저 무방비한 느낌뿐이다.

얼빠진 얼굴은 알기 쉬운 표정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가죽 갑옷 위에 뚜렷한 칼자국들. 전투의 흔적이 역력하다. 팔뚝과 옆구리 부분은 이미 찢겨 나간 천자락이 너덜거렸다.  위로 스며 나온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아현이 좀 더 늦게 나섰더라면 그녀는 이만큼 멀쩡하게 서 있진 못했을 것이다. 그 탓일까. 아직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다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마침 개울 건너편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세티아, 그쪽 괜찮아요?”

아현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딱히 무언가 남은 것 같지는 않았다.

“정리 끝났어. 가자.”

 대답에 소녀는 말고삐를 끌고 개울을 넘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흐르는 물을 가로질렀다. 그러다가 수면에 처박힌 시체를 보고는 멈칫하더니, 그 근처를 피해서 빙 둘러 왔다.

마침내 이쪽으로 건너온 소녀가 다가왔다. 그 뒤에는 두 마리의 말이 따라왔다. 아현은 소녀의 손에 들린 고삐 하나를 건네받았다. 말의 상태를 한 번 살피고, 곧바로 등자를 밟아 올랐다. 소녀도 안장 위에 올라탔다.

“가자.”

그렇게 출발하려고 할 때, 여태 멍하게 있던 여자가 뒤늦게 정신 차리고 아현을 불러 세웠다.

“아, 잠시만!”

그가 돌아보자, 여자는 자신이 불러놓고도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잠깐 우물쭈물하다가 목소리를 꺼냈다.

“그러니까, 감사를-”

아현은 간단하게 일축했다.

“별로, 당신을 도우려고 나섰던 건 아니에요.”

실제로 그랬으니까. 마침 시험해보고 싶던 것이 있었을 뿐, 특별히 누군가를 위해서 싸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감사를 받을 만한 입장도,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아현이 그대로 떠나려고 하자, 여자는 당황해서 다시 그를 불러 새웠다.

“아니, 저기, 잠깐만!”

다급한 태도, 그녀는 성의를 표하는 것 이상의 용건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아현은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말을 찬찬히 몰아갔다.

‘번거로운 일에 휘말릴 시간은 없어.’

외딴 숲속에서 홀로 쫓기던 여자. 알만하다. 나름대로 복잡한 사연을 지녔을 것이다. 허나 별로 얽히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머니까. 다른 곳에 한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아현의 움직임에 잰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야기를 좀-”

“...”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여자는 화두를 바꾸었다.

“저 방향에서 굳이 넘어온 걸 보니.. 그쪽, 바위 산맥으로 가고 있었죠? 혹시북부로  예정인가요?”

아현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여자는 그 반응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덧붙였다.

“바위 산맥을 지나려던 계획이었으면 다른 길을 찾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산사태 때문에 몇 주 전부터  방면의 통행이 완전히 막혔어요.”

아현은 이상 그녀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 그 말, 확실해요?”

“제 목숨을 구해 주신 분에게 거짓말을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아요.”

아현은 내심 난감했다. 여자의 말대로 그쪽 방향으로 가려고 했으니까. 산사태라니, 그런 소식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정보였다.

이제 와서 다른 경로를 찾기에도 막막하다. 아주 멀리까지 돌아가야 하니까. 예정보다 훨씬 지체될 것이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현은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었다. 안장 위에서 내리고, 따라오던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 말대로 우린 북부에  예정이었어요, 그래서.. 무슨 방법이 있나요?”

여자는 아현이 대화에 응할 것 같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외곽 숲의 순찰자, 이나벨이에요.”

그녀는  부근의 옷자락을 뒤적여 무언가를 들어 보였다. 동전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태양과 별,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번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어떠한 증표라도 되는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아현은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곳 근방을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드물 거예요. 지도 위에 표시되지 않는 지름길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요. 바위 산맥을 통하지 않고 북부로 가는 방법 또한 몇 가지 알고 있죠. 물론 그 경로를 가르쳐 드리는  어렵지 않지만, 저에게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를 도와주세요. 정말 간단한 일이에요,  근처에 어떤 소식을 전해 주기만 하면 충분해요. 그리 멀지도 않아요. 어차피 북부로 향하는 경로라, 잠깐 머물렀다 가도 결코 늦지 않을 거예요. 그 일만 마무리되면, 제가 책임지고 두 분을 북부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부탁드려요. 이건 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척 중요한 문제에요.”

그녀의 눈가에는 간절함이 어른거렸다.

“...”

아현은 고민했다. 사실 괜한 일에 깊이 얽히고 싶지 않은 게 본심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 생각해 볼 법 했다. 간단한 부탁 하나를 들어 주고 길을 안내받을  있다. 들어보면 얼핏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하지만 그것도 서로 간의 신뢰가 있는 상황에서의 이야기였다.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까 고민이 따랐다. 애초에 그녀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 봐야겠지만,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그녀의 절실한 태도가 선택을 붙잡았다.

그러다 우연히 소녀에게 시선이 닿았다. 소녀는 오묘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혼자 깜짝 놀라더니, 이내 볼을 긁적이며 멋쩍어했다. 그러더니 하고 싶었던 말을 수줍게 털어놓았다.

“뭔가, 제가 세티아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  같아서..”

아현은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소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소녀는 여자를 곁눈질하며 그에게 속삭였다.

“저분, 무척 간절해 보여요.”

그러고 다시 아현을 보는데, 눈동자 속에  수 없는 기대감이 맴돌았다.

“세티아는 상냥한 사람이잖아요. 저는 알고 있어요.”

그제야 아현은 소녀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소녀는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니까 자신을 지켜준 것처럼, 곤경에 처한 여자를 도와줄 거라고 믿었다.

아현은 당황했다.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 받아들일 줄이야. 특별히 누구를 구하겠다는 의도로 나선 것이 아니었는데. 소녀가 언제부터 이런 선망을 품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저를 바라보는 아이의 순수한 기대를 무시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저토록 빛나는 눈망울을 누가 감히 외면할 수 있을까.

결국 아현은 시선을 돌렸다. 이쪽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조함이 배어나오는 눈동자.  다문 입매. 역시 알기 쉬운 표정이다. 이쪽을 속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것도 결국 감일 뿐이지만. 마땅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제 와서 돌아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마침내 아현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요. 어디 이야기를 한 번 들어나 볼게요.”


*****

“저 곳이에요.”

그녀의 손가락이 저 멀리를 가리켰다. 그 방향으로 아현의 눈길이 따라갔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은 커다란 도시였다. 도심을 둘러싼 성벽은 능선을 타고 널찍하게 늘어졌다. 성곽 안쪽의 거주 구역에는 높다란 석재 건물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아현은 이내 도시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들어 보았다. 돌돌 말려 묶인 양피지 두루마리. 방금 건네받은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저  영주에게 이걸 전해주면 된다는 말이죠?”

그녀, 이나벨은 간절한 목소리로 청했다.

“제가 직접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부탁드려요.”

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기 때문에 여기  것이다. 이제 와서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점이 하나 남아 있었다.

“영주 정도의 사람이면, 우리가 쉽게 만날 수는 없지 않아?”

저만한 대도시의 수장이라면 분명 상당한 세력가다. 그런 사람이 일개 여행자의 요청에 만남을 허락해  이유가 없지 않을까.

이나벨은 허점을 찔린  당황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 급한 상황에만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아...”

그때, 소녀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 문제라면 제가 도울 수 있을  같아요.”

소녀는 쓰고 있던 후드를 부드럽게 넘겼다. 가려져 있던 붉은 머리칼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투명한 눈동자가 햇빛에 반짝였다.

“왕가의 이름을 대면, 어떤 귀족이라도 그 만남을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아현은 납득했다. 그래서 도리어 걱정부터 앞섰다.

“괜찮을까?”

그 방법을 사용한다면 어쩔 수 없이 소녀의 존재가 노출되니까. 위험한 상황이 생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에스터 공과 안면이 있어요. 그 분은, 반역자들과 손잡을 만한 성품이 아니세요.”

소녀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결코 일이 잘못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약의 경우에도 세티아가 저를 지켜줄 거잖아요?”

아이의 믿음을 마주하고, 아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도 없었다. 곧장 도시로 들어가기 위한 채비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굳어 있는 이나벨의 모습을 보았다.이쪽을 향한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입을  벌린 채 멈춘 표정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경악.

“....”

뒤늦게 소녀의 정체를 알게  이나벨은 한참 뒤에 비명처럼 목소리를 내질렀다.

“와, 와, 왕녀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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