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마음의 변환점
그녀는 가만히 누워있었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은 채 조용하게.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히, 인형같이 그대로. 서리처럼 창백한 피부에는 핏기 하나 없었다. 언제나 살랑이며 흐트러지던 백금발도 침상 위로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감긴 눈가 위로 짙게 머문 음영과, 새하얀 살결을 찢어낸 상처들이, 너무나도 가녀린 느낌이라, 마치 한 떨기 꽃잎이 떨어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자태 같았다.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눈길 하나. 리엔느는 제 입술을 꾹 물었다. 생채기가 잔뜩 배인 그녀의 손을, 부서질 것처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차가웠다. 힘 풀어진 손은 평소보다 훨씬 차가웠다. 그 사실만으로 심장이 철렁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지금껏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저 아름다운 인형 같아서. 그 생기 없는 모습에 자꾸만 불안해져서. 리엔느는 수시로 그녀의 상태를 돌아보았다.
얕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가슴을 확인하고, 희미하게나마 이어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매순간 불안한 상상으로 조여드는 마음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아무 일없을 거야. 무사히 다녀오겠다고 약속했는걸. 응, 그러니까 금방 일어날 거야...’
알싸한 약냄새가 배인 공기 속으로 자그마한 한숨이 흩어졌다.
리엔느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세티아...”
고작 한 마디에도 울컥 올라오는 뜨거움을 삼키고, 눈가를 한 번 비비고, 고개를 털었다.
리엔느는 그녀를 믿었다. 꼭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제게 남겨주었던 약속을 믿었다. 누구에게도 견줄 바 없는 실력을, 그 어떤 위협을 상대로도 소녀를 지켜주었던 최고의 기사를 믿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기에. 기나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결전이었으니까.
지금껏 수많은 전투를 기적 같은 승리로 인도해 준 영웅이 직접 그 대단원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것이 당연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왕녀의 자랑스러운 첫 번째 기사가, 가장 먼저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 세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피투성이로 돌아온 그녀를 본 순간, 리엔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여태껏 알고 있던 세계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어렵고 위험한 난관을 마주했더라도 그녀는 언제나 손쉽게 넘겨왔기에. 지금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과, 그녀의 온몸에 새겨진 상처들이 더욱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까지 다친 그녀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꾹 눌린 속에서 무언가 울컥 새어나올 것 같아서, 리엔느는 이를 악물었다.
의식적으로 외면해 왔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 또한 누구나처럼 똑같이 다치고 상처 입을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잠깐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는 존재란 것을. 그 간단한 진실을 잊고, 외면한 대가가 돌아왔다고 느껴졌다.
불안감이 치솟았다. 이대로 그녀를 영영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불길함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나쁜 생각을 겉잡을 수 없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수많은 영주들의 지지를 받아, 그들의 군대를 이끌어도. 이제 빼앗긴 왕국을 전부 되찾았다 하더라도. 지금 가장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이뤄낼 능력은 없었다.
어두운 무력감이 조용하게 번졌다.
여태껏 리엔느가 이뤄낸 모든 것들은, 그녀 없이는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어려운 시절 함께해준 소중한 존재를 이런 식으로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저 불안했다. 반역자들에게 뒤쫓겨 빈손으로 왕도를 떠나던 그때처럼 막연했다. 이제야 마침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되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때의 어린 소녀처럼 두려워졌다. 제아무리 많은 것을 되찾는다 한들, 가장 중요한 마음 속의 한 자리가 비어버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제 전부 끝났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정말 다 왔는데... 대체 왜....’
무거운 생각이 리엔느의 마음속을 짓눌렀다. 혹여나 제 욕심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었다.
그녀를 제대로 만류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탓이란 자책이 끊이지를 않았다.
세티아는 소녀를 위해서 무리한 싸움에 뛰어들었다.
리엔느는 그녀를 무모한 전투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비록 그녀는 자발적으로 이번 일에 나섰지만, 그게 이쪽을 위한 행동이었음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도 말리지 못했다. 그녀의 역량을 믿고 있었다는 말은 이제 구차한 변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이렇게까지 다쳐서 돌아올 줄알았더라면...
그때, 덜컥 열리는 문소리가 울렸다. 그 소음이 잠깐이나마 괴로운 생각의 연쇄를 끊어주었다.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오는 발걸음. 나직한 목소리가 리엔느를 불렀다.
“왕녀 전하, 역시 여기 계셨군요.”
리엔느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찾아온 노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에스터공...”
노인은 조금 고양되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왠지 그런 기색이었다.
“방금백작의 기사단에서 보고가 왔습니다. 서문 구역에 고립되어 있던 잔당들까지 모두 제압했다고 합니다. 이제 이 왕도에는 더 이상 적이 없습니다.”
“....”
“거기다가 우리 군의 피해는 거의 없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실로 대승입니다, 전하.”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노인은 그제야 상대방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뒤늦게나마 말을 삼갔다. 조금 난감한 정적 속에서, 리엔느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길을 내렸다. 붉은 눈동자 속에는 다시금 걱정이 한가득 번졌다.
노인 또한 입 다문 채 리엔느의 곁에 다가섰다. 새하얀 침상 위, 가만히 잠들어 누운 여인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의 온 몸 모든 곳에 선명히 남겨진 사투의 흔적과,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가녀리게만 느껴지는 두 어깨를 보았다.
노인이 전해 들은 바, 그녀의 활약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그녀 덕분에 아군은 피해 없이 성문을 넘었고, 수도 내의 반군을 소탕하는 데 하룻밤이면 충분했을 정도였다. 적들은 난데없는 기습에 지리멸렬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수도 안에 있던 반군의 수뇌부들을 상당수 사로잡았고, 정말 아쉽게도 수괴인 공작의 행방을 놓쳤지만 그래도 왕도까지 탈환한 이상 반군은 팔다리가 전부 잘린 셈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역량을 전부 투입한 왕도 방어전에서 참패했으니, 남은 반란 세력들은 고작해야 동부와 남부의 영지 몇 개 정도일 뿐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내전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엔느의 표정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반군과의 기나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할 수 있는 결과임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기뻐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마음속이 아프게 달아올랐다. 빼앗겼던 자리를 다시 되찾는 대가가, 가장 소중한 이를 희생하는 것이라면... 여태껏 넘어온 여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노인은 조심스럽게 다시 목소리를 꺼냈다.
“이번 왕도 탈환으로 상당한 숫자의 반역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의 처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리엔느는 표정을 굳혔다. 애절하게 내려보던 눈빛을 거두었다. 그리고 노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리엔느의 안색은 이미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세티아를 지켜보던 애틋함은 온데간데없이, 차가운 원망과 분노만 남아 있었다.
그런 목소리로 단호하게 선고했다.
“전부 죽여요.”
아직도 고요하게 잠든 모습을 힐끗 보고, 한층 더 싸늘한 목소리로 명했다.
“살려둘 필요 없으니까. 한 놈도 빠짐없이 처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