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장미 여왕, 잿빛 기사
마지막 전투 이후 극심한 부상을 입은 그녀가, 한참이나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건 무려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그런데 다시 깨어난 그녀는어쩐지 좀 달라진 느낌이었다.
온 몸에 남겨진 외상과 붕대에 밴 핏자국, 가느다란 팔에 단단히 동여진 부목, 그리고 이제 자력으로는 침상 밖을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중한 전상을 봤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테지만, 비단 그 외견 자체는 페른에게 그다지 낯설진 않았다. 그녀가 일어나기를 매일 기다리며 봐온 모습이니까.
다만 무엇보다 달라진 건 그녀의 분위기였다.
이를테면, 예전같지 않게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그게 남들의 눈에도 쉽게 보일 정도로.
더디게 회복되는 몸상태와 여전히 심각한 부상 때문에 깨어 있는 시간조차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침상에 기댄 채 하루종일 무언가를 멍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 초점 흐린 눈동자는 그저 무정물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단지 그곳에 존재하고만 있을 뿐처럼 말이다.
이런 모습은 정말 처음 보았다.
예전같았더라면 그녀는 분명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거다. 스스로의 상태가 어떻든간에 아랑곳않고. 그건 의무감과 닮았다. 누구보다도 뛰어나면서도 한 순간의 여유조차 본인에게 허락하질 않았다.
사실 그녀의 언제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촉하는 태도가, 단지 본래의 성격에 비롯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남모를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그렇게 계속해서 자신을 몰아붙일 리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가 드디어 매듭지어진 걸까?
확실한 건, 무언가를 이룬 사람처럼 후련해 보이지는 못했다. 다만 그녀는 이제 더는 서두르지 않았다. 더욱이 아예 그 자리에 멈춰섰다. 낯선 곳에서 이정표를 놓치고 지나친 사람처럼, 혹은 끊긴 길로 마주하게 된 여행의 종착점처럼 말이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이제 무언가를 놓았다. 그로 인해 매 순간날 서 있던 태도도 변했다.
페른은 벌써 잠든 그녀를 확인하고 무심코 숨소리를 낮추었다.
"……."
이 역시 예전 그녀라면 결코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았을 빈틈이다. 아무리 안전해 보이는 장소라도 본인을 무방비하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조용히 쉬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볼 기회는 단언코 한 번도 없었다.
막사 틈새로 옅게 들어오는 햇빛에, 침상 위로 길게 흐트러진 머리칼이 반짝였다. 빚어낸 듯 새하얗고 고운 살결과 부상으로 약간 열기가 오른 두 뺨. 가느다란 목선. 붕대가 꽉 동여매진, 자그마한 두 어깨.
그녀의 몸집이 원래 이렇게 아담했던가. 언제나 망설임 없이 앞서 나아가는 뒷모습만 쫓아보았기에, 조용하게 눈을 감은 여인의 인상은 여느 비슷한 나잇대의 아가씨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이대로 보이는 건 단지 청초하고 가녀린 처녀였다. 항상 벼려진 칼날처럼 서늘해서 다가서기 힘들었던 분위기 대신에 수려하고 예술적인 미색이 먼저 들어왔다. 예쁜 이목구비와 가녀린 자태가 부드럽게 시선을 끌어당겼다. 지켜보고 있자니 무심결에 심장이 뛸 정도였다.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같은 자태. 눈길을 끌어당기는 건 여전했다. 숨막히는 싸움 속에서 빛나던 그 모습과는... 약간 다르지만 그래도,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잠들어 있는 그녀의표정은 흐릿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편해보였다.
**
페른은 고풍스러운 나무문 앞에서 두어 번 노크했다. 그러고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다.
방 안쪽에는 반듯한 자세로 의자에 앉은 여성이 보였다. 어쩐지 조금 굳어있는 그녀의 표정에 페른은 덩달아 다가서는 걸음을 멈칫했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하며 조심스레 그녀를 불러보았다.
“세티아?”
그제야 약간 찌푸려진 눈가가 풀렸다.
“아, 페른. 당신이었네요.”
“네?”
의아해하는 반응에 그녀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요즘 가끔 이래요. 피곤할 때 약간, 잘 안 보여서요.”
페른은 조금 황망해졌다. 잠깐 무언가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거, 괜찮은건가요?”
저도 모르게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원래의 그녀가 지니던 감각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예리한 오감은 분명 누구도 견주지 못할 만큼 탁월했기에. 그걸 알고 있던 입장에서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저 아주 옅게 웃었을 뿐이다.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다. 거기에 대해서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는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요즘 바깥은 어떻던가요?”
“아, 그렇지 않아도 소식이 좀 있던 참입니다.”
페른은 알아왔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중남부 지역에 남은 반군의 잔당이 거의 다 소탕되었다, 독사 공작은 아마 국경 지대로 도주한 것 같다, 공국은 발을 빼려는 모양인 듯하다, 등등 최근의 정세에 관한 간단한 시사들이 주류였다.
그녀는 주의깊게 듣고나서 자그마하게 한숨쉬었다.
“고마워요. 여기 들어온 이후부터 그런 소식을 들을 방법이 없어서 약간 답답했어요.”
마지막 전투 이후, 그녀는 별궁 내에서 자의 반 타의 반의 휴양 생활을 보내게 된 처지였다. 부상으로 인한 몸상태가 워낙 심각하기도 했거니와, 그녀가 더 이상 전쟁 같은 위험에 관련되지 않기를 원하는 누군가의 특별한 조치였다.
그 조금 과한 걱정 덕분에 그녀는 심지어 왕도 탈환 이후 단 한 번도 이 별궁 바깥에 나가 본 적 없을 정도였다.
페른은 무심코 상대의 차림을 훑었다.
투박하고 거친 여행자의 복장이 아니라, 딱 맞춰 제단된 실내복은 단아한 태를 자아냈다. 부드럽고 하늘하늘한 비단 재질로 그냥 봐도 알듯한 고급품이었다.
방 안의 정경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말끔하게 정리된 용품들과, 테이블 위에는 항상 그때마다 새로 준비되는 다과. 그리고 바깥에서는 언제라도 부를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는 하인들을 보았다.
어딜 가더라도 피와 강철, 진흙투성이인 전쟁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환경이다. 그런 사지를 누구보다도 앞서 누비고 다녔다는 사실조차 연상하기 어려울 만큼, 지금의 그녀는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오히려 이쪽이 겉보기로는 더욱 어울렸다. 그녀가 해왔던 일들이 벌써 가끔씩 생소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앞으로 저 가녀린 손이 다시 검을 잡을 일은 없게 되었다.
그녀를 걱정하는 이가 그러길 바랬고, 그녀 또한 거부하지 않았으니까.
문득 그래서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그렇게 싸워갔다면 분명, 언젠가는 돌이키지 못할 일이 일어났을 테니까.
차라리 이렇게 멈출 수 있었던 게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시녀의 목소리가 공손히 알렸다.
“아가씨, 곧 수업이 예정되신 시간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한순간 굳어버리는 걸 페른은 보았다.
잠시간의 미묘한 침묵을 넘어서 그녀는 대답했다.
“알겠어요. 준비할게요.”
그러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시 페른을 돌아보는 눈길은 어쩐지 피로감이 묻어났다.
“리엔느의 대관식 날짜가 정해졌다는 소식 들으셨죠? 그 아이는, 제가 꼭 왕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같이 참석하길 바라는 모양이에요.”
그 준비로 다름아닌 그녀가, 공식 석상에서 갖춰야 할 귀족 영애의 몸가짐을 위한 예법 수업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은...
여태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넘어서, 페른을 벙찌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
아름다움과 청초함을 장식하는 드레스. 가장 소중한 이의 대관식을 지켜보고 함께하기 위해 준비된 차림이다. 순수하게 그녀의 특별한 미모를 가장 빛나게 해주기 위한 목적으로만 제작된 의상. 평소와 다르게 공들여서 단장한 그녀의 미색은 과연 누구보다도 돋보였다.
자리에 모인 수많은 시선들이 오로지 한 곳을 향해서 쏠리는 광경을, 페른은 먼 발치에서 지켜보았다.
역시나 그녀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남들의 관심을 당긴다. 언제나 본연의 실력을 가감없이 선보였던 전장에서뿐만 아니라, 이렇게 전혀 다른 입장에서 지내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녀가 누구보다 돋보인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그래서 페른의 눈길 또한 여전히 그녀를 쫓고 있었다. 어딘가의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들보다 훨씬 더 무구하게만 보여질 법한 그녀가 어떤 일을 해왔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정말 잘 지켜보았으니까 더욱 그랬다.
그때, 궁중의 급사가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단상 위에 올라서 모두에게 앞으로 진행될 즉위식의 일정을 안내했다. 그러자 주제가 바뀐 웅성임이 조용히 번지고, 모든 이가 오늘부터 시작될 새로운 시대에 대한 관심, 기대, 걱정, 혹은 희망으로 제각각 마음을 채웠다.
오늘의 대관식으로서 소녀는 여왕으로 올라선다.
이제는 창칼이 아닌, 다른 것들이 좀 더 필요해질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페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검을 잡을 이유또한 사라지게 될 날 또한 머지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꼭 그녀가 지니는 가치를 떨어트리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있는 그대로만도 저렇게나 한껏 돋보이는데 말이다. 위험에 나서지 않더라도, 다른 어느 방식으로라도 앞으로 훨씬 더 주목받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괜찮은 게 아닐까 싶었다.
소중한 아이를 지켰고, 그녀는 안식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
어쩐지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만족스러울 결과였다.
그래서 이대로 짧지만 인상깊었던 이야기의 막이 내릴 거라고 짐작했다.
분명 그러했는데...
**
반란의 주동자, 선대 국왕을 시해한 대역죄인, 독사 공작.
그 노인의 머리가 담긴 목함이 연회장의 한가운데서 적나라하게 열려 보여졌다.
칼날같은 침묵이 공기에 감돌았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도록 모두의 덜미를 옥죄고 있었다.
“....”
“.......”
덩그러니 놓인, 핏기하나 없이 창백한 독사 공작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붉은 눈동자 한 쌍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머리가 담긴 목함을 대관식의 축물로 바쳐온 제국 재상의 우묵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를 보는 젊은 여왕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끊어지기 직전까지 당겨진 긴장감만이 잠시 맴돌았다.
새로운 전쟁의 불씨가 다시 한 번 날아들었단 사실을 모두가 직감했기에.
누구조차 감히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플레이어 페른 역시도 이 순간 속에 있었다.
그렇기에 이때, 그는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소리 없는 혼란, 만인의 경악 속에서, 언제나처럼 차분한 단 하나의 눈동자를 결국 발견해냈다.
서늘한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그리고 익숙했다.
수도 없는 전장에서 항상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았던 그것이다. 칼날처럼 스스로를 다듬어낸, 그리고망설임 없이 목숨을 던지는 사투에서만 빛나던, 잠시동안 찾지못했던, 그리고 이젠 더는 볼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그...
‘아.’
그걸 확인한 순간, 소름이 돋았다.
뱃속을 확 달구는 전율감이 등골을 타고 짜릿하게 흘렀다.
지금의 그녀는 달라졌다. 그 가장 큰 변화를 이 순간에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에서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읽어버렸다. 단지 마음에 얽매인 의무감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열망. 칼날의 끝에서 스스로를 찾은 사람의 위험천만한 열락이. 목숨이 오갈 정도로 강렬한 경험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때때로 그런 상황 속에 다시 한 번 뛰어들기를 원한다. 그건 그 자체만으로도 삶에 충실한 시간이기에. 위기는 곧 자기 자신을 증명할 가장 아찔한 기회로 다가올 때도 있다.
후회, 죄책감, 의무, 혹은 그게 뭐든 어찌되었든 이제 더는 상관없을 그 헤매임을 넘어서, 지금에야 오롯히 홀로 남겨지게 된 그 순수한 열망이, 다시 한 번 죽음 목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긴장과 성취에 대한 남모를 기대감이 그 아름답고 서늘한 눈동자 너머에 옅게 아른거리는 걸 본 순간...
페른은 아무도 모르게 환희했다.
그가 반하고, 줄곧 선망했던 그 싸움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게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