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희망의 검, 승리의 깃발
114.
그레이스.
윈터폴 백작가의 삼녀, 그레이스 윈터폴.
국립 검술 아카데미 수석 졸업.
국왕배 가을 마상창시합 준우승.
왕실 근위기사단 최연소 입단 및 선임기사 승진.
근위기사 그레이스 윈터폴 경.
검을 잡기 위해서 태어난 여자.
적어도 왕국 안에서, 동년배에는 적수가 없다고 평가받는 천재.
영재, 천재, 그레이스에게는 언제나 그런 수식어들이 따라붙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가족들도, 몇 없는친우들도, 그만큼 그녀를 대견하게 여겨주었다. 본인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오만이었다. 역전의 전사조차 작은 불운에 덧없이 죽어나가는, 진짜 전장 속에서 풋풋한 자신감은 통하지 않을 만용이 되어버렸다. 죽음의 위기는 부지불식간에 덮쳐들었다.
진다, 죽는다. 처음으로 느낀 무력감. 절망. 죽고 죽이는 사투에서 한 사람의 존재는 그만큼 덧없고 미약했다.
전장의 대세는 결코 개인이 항거할 수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해일처럼 이곳저곳을 휩쓸며, 마침내 그레이스의 목숨마저 거둬가려던 순간이었다.
그 모든 흐름이, 단 한명으로 인해서 거꾸로 뒤집어졌다. 너무도 쉽게 역전되었다. 죽음 속에 잠겨들던 그레이스는마지막 한 발짝, 운명의 품에 안기기 직전, 기적의 존재를 마주했다.
그날 그레이스는 생과 사, 그 경계를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는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를 실감했다. 한 사람의 존재감이 그토록 찬연하게 빛날 수 있다는 것도. 한번이라도 보게 되면 마음을 빼앗기는 찬연함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염원하고, 소원하고, 갈망해왔다. 근위기사로서 임무를 이어가며 단 한번이라도 다시 마주치기를 바랐다.
그 바람은 아주 극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유난히 치열했던 전장 속에서, 다시 한 번 그레이스를 위기에서 구원해준 재회. ‘그녀’는 그때와 똑같이 흐름을 뒤집고 정해진 승패를 바꾸어냈다.
여전히 눈부시도록 빛났다. 아름답고 강인한 금강석처럼. 처음 봤을때보다 더더욱. 그 광채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마음을 잡아끌었다.
첫눈에 반했고, 두번째는운명이라 확신했다.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마치 심장을 빼앗긴 것처럼. 내란이 끝날 때까지, 끝나고 나서도, 기억 속의 아름답고 강인했던 누군가의 모습을 항상 되돌아보고 있었다.
꿈에서라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기사단장의 서임. 사열 한가운데에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일찍이 그레이스의 열의를 알고있던 부단장이, 그녀의 전공과 성과를 감안해서 특별히 신임 기사단장의 부관으로 선임해주었을 때는, 정말 일생에 바라마지않던 소망이 드디어 이뤄졌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는데.
“흡, 하아아……♡”
"아."
시간마저 멈춘듯한 집무실의 침묵.
그 한복판에서, 그레이스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머릿속은 그저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이성이 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손에 잡혀있는 것부터 숨겼겠지만, 딱 굳어버린 몸뚱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의 체취가 옅게 배여있던 예식용 망토에 얼굴을 파묻은 모습 그대로 고장나버렸다.
조금이나마 제정신이 돌아온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런데도 몸뚱이는 망부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대신 간신히 눈동자만 굴려서, 아직도 머뭇거리는 인기척을 슬쩍 훔쳐보았다. 눈앞의 광경에 당황한 듯, 난처한 듯,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선망하고, 존경하고, 사모해 마지않던 자태 그대로였다. 다만 얼굴에 피어있는 난감한 기색만큼은, 몇 번이고 혼자서 그려냈던 상상속에선 결코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그레이스는 자신이 무슨 추태를 보였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아버렸다.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어질어질했다. 넘치다 못해 뒤집어지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더는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작동하질 않았다.
결심은 쉬웠다.
죽자.
미련없이 죽자.
그레이스는 굳어있던 팔다리를 뒤늦게 움직였다. 집무실의 커다란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망설임 없이 창문을 드르륵 올리고, 난간에 발을 하나 턱 걸친 순간 등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
그와 동시에 팔목을 꽉 잡아오는, 섬세하고도 단단한 손아귀가 누구의 것인지 실감한 순간 그레이스는 다시 한 번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단지 맞닿은 것만으로도. 다른 의미로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버려서, 어쩔 줄 몰라 고장난 것처럼 딱 멈춰버렸다.
그러는 그녀를, 아현은 일단 창문에서 떼어냈다. 최대한 멀리 끌어당겨서 앉히는데, 의외로 저항은 없었다. 생각보다 얌전한 반응에 의아해서 흘끗 내다보니 표정이 무슨 정지화면처럼 그대로 굳어있었다.
팔목을 붙잡은 순간부터.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그레이스는 얼굴만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곧 터질지도 모르겠다.
일단 그녀를 창가에서 멀리 떨어진 소파에 앉혀놓고, 아현도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손목을 놓아주자 그제야 숨을 거세게 몰아쉬는 모습. 이쪽과는 시선도 맞추지 못한다.
하늘색 눈동자가 흠뻑 젖어서 그저 오갈데 없이흔들리고 있었다.
“…….”
무슨 의미로 그러고 있었는지 물어보면, 이후의 반응이 진심으로 감당 안될 것 같아서 아현은 일단 저가 본 광경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다.
뭔가,시한폭탄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그저 막막했다. 아현은 속으로 한숨만 삼켰다.
“그러니까….”
*****
관저를 걸어나가면서 참았던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하아……."
어찌저찌 달래서 일단 간신히 일을 수습하긴 했는데, 아직도 대체 뭐가뭔지 모르겠다. 대화같지도 않았던 방금 전의 상황들을 잠시 떠올리며 어질어질한 기분을 추슬렀다.
그래도 좋게 생각해보자면, 적어도 이쪽에게 나쁜 감정은… 없어보였으니까, 그래. 일단은 그걸로 괜찮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모르겠다.’
바쁘지만 않았더라도 좀 더 고민해봤을 상황이지만, 지금 당장 준비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미루기엔 더없이 중요한 사안들이었다.
제국의 군단은 이미 국경에 닿았다. 전쟁은 이미 시작됐지만,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력의 격차를 매꾸기 위해서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준비하고 수를 짜내야 했다.
왕국의 수비와 제국의 군단에는 처음부터 압도적인 규모의 격차가 있었다. 그 전력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혀두는 것이, 지금 당장으로서는 가장 절박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왕국에서 징집할 수 있는 병사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그 이상으로 인적 자원을 충원하려면 결국, 돈을 주고 사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전쟁을 생업으로 삼는 전사들. 용병. 얼마전까지 내란을 치른 왕국 근처에는 이미 수많은용병단들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눈이 있다. 전장에서살아왔기에, 오히려 더욱 대세를 민감하게 느끼게 되는 부류였다.
그러니까 승패가 뻔한 전쟁에서, 아무리 웃돈을 주더라도 지는 쪽에 붙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럴만도 하다. 급여도 전쟁에서 이겨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유불리를 따지는 것은 당연한 판단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번 경우에 패색이 짙은 쪽은 왕국이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용병대가 이쪽의 고용을 거절했다.
왕국은 누가봐도 약자였다. 질 것 같은 쪽의 아군이 될만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아예 없진 않더라.
정말로 절박한 상황에서 뜻밖에도 내밀어진 손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직접 만나러 가는 것이다. 유일하게 협상 테이블에 앉아준, 용병대의 수장을 마주하기 위해서.
복도의 끝자락.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덮수룩한 갈색머리. 제법 잘생긴 청년이, 서글서글 웃음짓는 눈매로 이쪽을 반겼다.
왕국에서 활동하는 '모험가 용병단 조합'의 대표였다.
"이야, 드디어 만났네요! 반갑습니다 정말로!!"
말해 무엇하리. 압도적인 유불리를 무시하고 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일만한 이들은, 때로는 계산적인 이득보다도 순간적인 즉흥에 이끌리는 사람들, 오직 플레이어 뿐이었다.
"보세요 여러분들, 제가 진짜 오늘기대하셔도 좋다고 했잖아요? 네?"
눈앞의 상대는 이래저래 제법 인지도가 있는 플레이어라고 들었다. 조금 경박해보일 정도로 하이텐션. 개인방송으로도 유명하다던가, 지금도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게 말하는듯 시종일관 중얼거렸다.
그런 태도가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별달리 문제삼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부터 진행되는 협상이 이런 식으로나마 기록되는 것 자체로 이득이었다. 다른 의미의 공증을 추가할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가상현실에서의 약속은 신뢰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게임 속에서 만나는 상대에게 책임감을 기대할 순 없었다. 그러니 일개 플레이어가 아니라, 그 이상의 입장을 걸고 나서게 하는 편이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마주하고 있는 상대도,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사람이더라. 어디 커뮤니티 채널의 관리자라던가, 개인방송으로도 상당히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던가.
잘 된 일이다. 이름값이 높을수록 처신을 주의할테니까.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행실을 믿을만한 사람이기도 했다. 적어도 아현이 미리부터 찾아본 바로는 그랬다.
'성격은 상당히 기분파… 라고 했었나?'
딱 봐도 그렇게 느껴졌다.
“이야, 이야~”
그 잠깐 사이에 아현을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뭔가 감탄하고 있다. 조금은 자중할 법도 한데. 그 능글거리는 태도가 살짝 거슬렸지만, 별다른 지적을 하진 않았다.
솔직히, 절박한 것은 이쪽이었다. 제국의 압도적인 물량공세에, 병사 한 명 한 명이 절실할 지경이어서. 플레이어 용병단의 연합이 타협의 여지를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결코 놓쳐서는 안될 기회가 되어버렸다.
저쪽에서 협상의 대표자로 굳이 한 사람을 콕찝어서 불러낸 자리를 순순히 응해준 것도 그런 이유였다.
플레이어니까. 같은 입장에서 상대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게다가 형식적으로나마 기사단장직위를 서임받은 신분이니, 여왕의군권을 대리할 자격이 모자르진 않았다.
정신없는 인사치례를 넘기고 본격적인 협상의 자리에 앉았다. 고급스러운 찻잔들이 서로의 앞에 놓이는 와중, 사내는 첫마디부터 대뜸 그렇게 던졌다.
“솔직히 이번 전쟁, 왕국한테 승산이 있긴 합니까?”
“…….”
아현은 잠깐 침묵했다. 이쪽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대답밖에 안나올텐데도, 구태어 언급하니 조금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다시 생각해서, 확신한 끝에 답했다.
"이길 수 있어요."
진심이었다. 솔직히 승리할 가능성이 아예 없었더라면, 아현은 리엔느가 무엇을 각오하고 있던간에 강제로 피신부터 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압도적인 전력의 격차에 불구하고, 기어코 실마리를 찾아냈기에 최선을 다해서 뒤집어볼 여지가 있었다. 그 계획들을 지금은 알려줄 수 없다는게 아쉽지만, 확신을 담아서 그렇게 말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오케이. 그럼 계약합시다."
"네?"
기다렸다는듯 너무나 수월하게 나온 대답에 아현이 조금 벙쪘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태연하게 덧붙였다.
"조건은 일전에 제시해주신 그대로 맞죠?"
아현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급은 평균의 3.5배에다가, 보급 일체 제공, 전투수당 따로. 2개월 이상 고용 연장시 추가 재계약…….”
당장의 입장차를 제대로 이용당한 폭리이긴 했지만, 그래도 재무관이 허용해준 협상조건 안쪽이긴 했다.
“좋습니다. 계약하죠.”
오히려 더 이상 흥정하지 않고 선선히 받아들인 것부터가, 저쪽에서 상당히 양보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솔직히 좀 의문스러웠다.
아무리 플레이어라지만 이 판에 발들이는 위험부담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당장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먹으려 해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상대방은 그저 반듯한 미소만을 걸치고, 서로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을 뿐이었다.
“자, 건배.”
“…….”
한동안 도자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밖에 울리지 않았다.
따뜻한 찻물에 입술을 적시며, 아현은 맞은편에 앉은 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민했다. 무언의 양보를 그저 호의로만 받아들여도 되는걸까. 어쩐지 뭔가를 노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뒤늦게 추가로 덧붙이는 말에도 놀라지 않았다.
“나중에 저희 채널에 게스트로 한 번 출연해주세요.”
뜻밖의 제안. 그는 지나가듯 이야기를 흘렸다. 하지만 이조차도 협상의 범주 안에 있다는 걸 아현은 눈치챘다.
게임 속 모험가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이어지는 거래였다. 그래서 대가의 지불은 왕국이 아닌, 아현 개인에게 달려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조금 당황했고, 이내 자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전쟁의 결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리엔느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채널이요?”
“넵. 한 번만 출연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찬밥 더운밥 가릴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기에.
“네, 뭐, 그 정도라면…….”
그렇게 생각하며 수락하려던 찰나였다.
"메이드복 입고."
찻잔이 으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