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도움이 되는 위선과 악의
그 시간 정미는 상희와 대화 중이었다. 딸 부부를 사무실에 보내고 사돈과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상희는 정미의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정미가 입을 열었다. "3일 전에는 내가 철저히 당한 것 같아서요."
"그 복수를 위해 2차전을 신청하신 건가요?"
"오늘은 애들이 없으니 당신의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고, 본심이 듣고 싶어요."
"뭐가 알고 싶으시죠?"
정미는 상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상희는 3일 전에 보여준 상냥한 얼굴이 아닌 차가운 현실주의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당신의 본모습인가요? 그 때는 영업용?"
"당신 앞에서 부정할 순 없겠죠. 맞아요." 그 말투까지 차갑고 냉정하게 바뀌어 있었다.
"이 것 때문에 당신 아들이 당신을 피하는 것이고?"
"잘 아시네요. 절 위선자라 부르죠. 지독히도 싫어하는."
"그런데 잘도 내 앞에서 드러내시네요?"
"당신 앞에서는 속이지 못할 테니까, 아니 속일 필요 없으니까."
정미와 상희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들 모두 눈빛 교환만으로 상대의 레벨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거짓말, 변명이 통하지 않는... 이제 겉얼굴로 속일 필요 없이 협상의 기술들만이 필요 했다.
"어쨌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둘이 서울에 있게 됐어요. 그럼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셔야죠."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건 뭐죠?"
"내 딸의 행복이죠."
"행복의 기준은 여러 가지죠? 어떤 것을 주고 싶으신 거죠?"
"어떤 것이라니요?"
"출세와 행복한 가정 중 어느 것이죠?"
"둘 다요."
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어정쩡하네요. 그럼 둘 다 안되는 경우가 태반이죠."
"그게 어째서 그렇죠?"
"불과 얼음처럼, 야심과 다정함은 양립할 수 없으니까."
"불과 얼음... 하지만 경수가 있다면 환희는 둘 다..."
"그래서 안되는 거죠."
"네?"
"당신 딸이 내 아들을 선택한 순간 출세를 포기하고 행복한 가정을 원한 거죠. 그런데 당신이나 경수가 당신 딸을 출세 시켜요? 그건 어렵다 못해 불가능해요."
"어째서..."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당신 딸이 절대 출세할 수 없다는 걸."
정미는 발끈했다. "당신이 그 애에 대해 뭘 알죠? 당신이 피아노를 아나요? 그 애의 재능이 얼만지..."
"뒷받침할 정신력이 없죠."
"큭." 정미는 정곡을 찔렸다. 자신이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최대의 약점이.
"만일 당신 딸이 출세하려 했다면, 절대 내 아들 같은 남자를 선택 안하죠.
저는 처음 내 아들과 당신 딸이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둘은 이름 뿐인 관계라든가 얼마 안가서 깨질 관계라고 생각했죠. 실제로 둘을 헤어지게 만들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왜 환희에게..."
"내 아들의 설명을 들었을 때에도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죠. 하지만 환희를 봤을 때 판단이 달라졌어요. 경수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죠.
그리고 환희는 절대 출세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출세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환희를 어떻게 보시죠? 그럼 왜 당신 아들을..."
"당신 딸은 어리다 못해 약해 빠져서 그 애 같은 남자를 선택한 겁니다. 자신의 출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아도 자신의 보통 생활을 지켜줄 수 있는 남자를 선택하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어린 아이죠."
"하지만 환희의 재능은..."
"뒷받침할 정신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재능은 오히려 저주죠."
"저주?"
"당신의 생각대로 환희가 세계 일류가 될 수는 있겠죠? 하지만 롱런은 안 될걸요? 그 것을 위해 경수가 희생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죠."
"당신은 당신 아들조차도 그 정도로 밖에 생각을..."
"당신도 그걸 알고 계시죠? 만약 당신이 건강하다면, 경수와 당신, 두 명이 함께 환희를 뒷받침하면 가능도 하겠죠. 하지만 병든 당신은?"
정미는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더구나 당신은 그 것을 미리 예상했죠? 당신 딸의 실패를 가정하고,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민씨 집안의 힘을 이용해 당신을 알아봤죠. 최주성씨."
“윽!"
상희는 득의한 듯 정미를 내려다보았고, 정미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정미래를 지원하는 일은 결국 환희가 한국에 돌아와도 아무 문제가 없도록 사전 작업이 아닌가요?"
정미는 이제 상희를 달리보기 시작했다. 평범한 서민이 아닌 수완가로. 그렇다면 더더욱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레벨을 높여야 했다.
"하하... 이거 대단한 사람을 사돈으로 뒀네요. 경수를 보고 보통의 평범한 가정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철저히 뒤통수를... 당신을 그저 이혼녀 싱글맘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안이했어요."
"저도 놀랐어요. 그냥 연기만 하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치밀하게 준비하시고 계셨다니. HGE에 대해 알아내는 것을 포기할 만큼 꽁꽁 숨겨 일을 진행하시고.
3일 간 알아낸 것이 겨우 당신이 최주성이라는 것과 HGE에 김미순, 정미래가 있다는 것 뿐.
그렇게 철저히 숨기는 이유를 짐작해도 증거를 얻지 못했어요."
하지만 상희는 숨기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HGE에 대한 조사를 중지한 것은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였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것이 아들 부부에게 더 도움이 되리라 판단되었다. 그녀가 끌어들일 세력을 우려하며.
"어떤 짐작을 하고 계시죠?"
"당신 같은 딸 바보의 의도."
"그럼 할 말이 없네요. 그 것이 당신한테도 이득이 될 테니."
"내 아들과 당신 딸이 헤어질 경우는 없을 테니까."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래요. 난 내 모든 것을 환희에게 주길 원해요. 내 재산까지."
"한국 내에서."
"맞아요. 둘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여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죠."
"둘을 막는 모든 걸 정리하고 계시죠? 김미순까지."
"두 사람의 최대의 난관은 정미래죠."
"그런데 당신은 쓰러지고 말았고."
그 말에 정미의 힘이 빠졌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죠. 몸도 마음도. 그 애가 없이는 못 견딜 만큼..."
"둘은 오지 말아야 할 시간에 오게 되었죠?"
"그러니 둘을 보내 놓고 빨리 일을 진행시키자 했죠. 1년 정도만."
"버틸 자신이 있나요?"
정미는 시선을 돌렸다. 그건 자신의 최대 약점이었다. 하지만 그 것을 알고 있는 앞에 있는 이 여자에게는 숨길 수 없었다.
협상에서 숨길 수 없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그 것을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태식이 말로는 30% 이하라죠. 이식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식이 안되면 수명이 6개월..."
"그럼 당신이 죽은 후에야 둘이 돌아올 수 있군요."
"그래도 준비해 놓고 지시해 놓으면 6개월은 예약 가능하겠죠. 그렇게 내가 죽은 걸 알리고 두 사람을 귀국하게 만들 생각이었어요."
"듣고 보니 정말로 딸 바보네요. 너무 따님을 사랑하시네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 전부였어요. 촬영이 길어져 그 애를 볼 수 없을 때에는 너무 힘들고, 유학 보내어 한국을 떠났을 때엔 내 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죠. 경수를 선택하고 내 곁을 떠날 때엔 그 애를 잡을 수 없는 제 몸이 너무 미웠어요."
"저는 누구를 그렇게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돕고 싶어요."
정미는 상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애정이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현실주의적 판단으로 돕는 것이었다.
이렇게 협상에서 몰렸을 때는 상대의 의도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정미는 상희의 의도를 판단하려 했다.
"왜죠? 아들조차 사랑하지 않는 당신이? 왜 내 딸을 돕겠다는 거죠?"
"간단해요. 난 절대 둘을 유럽으로 다시 보낼 수 없어요."
정미는 상희의 눈을 보며 잠시 생각을 했다. 첫 번째 만났을 때의 상희를. 그녀가 흥분하던 때를.
"장천... 뭐라는 사람의 아들과 며느리가 되면 안되니까?"
정미는 짐작대로 내뱉었지만 정곡을 찔렀다. 그 찌름이 상희에게 닿았다.
정미는 상희의 눈빛이 흔들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야 협상의 포인트를 잡았다.
"당연...하죠." 상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드디어 정미는 상대방의 약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시점이 되었다.
"그리고 며느리가 내 딸이자 유명 피아니스트라서?"
"물론이죠."
"지금이 환희의 마음을 얻을 절호의 기회고, 손자를 자기 손에 넣을 수 있어서? 그런 악의에 내 딸의 운명을 걸라는 건가요?"
"당신이 차고 더운걸 고를 시점이 아닐 텐데요?"
상희의 말에 정미는 더욱 냉정해졌다.
지금 이 말이 허세인지 진정인지를 파악해야 했다. 그리고 주도권을 쥔 시점에서 더욱더 밀어붙여야 했다.
"나를 도울 사람은 당신... 뿐이다?"
"그 인간이 움직이면 둘은 유럽으로 가야해요. 따님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아요?"
"당신과 민씨 집안 사람들이 나서지 않으면, 그 장씨는 움직이지 않을텐데?"
"우리가 나서지 않을 이유가 절대 없죠. 그럼 장천국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혈통이 경수 하나만 남은 그 남자가."
"태어나는 손자가 내 성을 잇는 것도 아닌데, 장씨던, 민씨던 관계가 없죠."
정미의 반격에 상희는 당황했지만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정미는 상희가 동요하는 것을 눈치 챘다. 허세였다.
"결국 우리와 장천국 사이를 저울질하시는 군요."
"환희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스폰서 H사가 더 중요하죠."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라면 내 쪽이 더 낫죠."
"그건 모르죠. 방금 혈통이 경수 뿐 이랬죠? 그럼 그 쪽이 더 적극적이지 않을까?"
이때는 서로의 거래가 필요할 순간이었다. 조건을 저울질해야 하는 건 상희 쪽이 아니었다.
상희는 그것을 알고 더 이상 정미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죠?"
"첫째는 환희의 신분보장. 당신이 며느리로 인정하는 것처럼 당신의 형제들도 그 애를 인정해야 해요."
"그건 당연하죠."
"둘째, 정미래를 포함해 경수의 과거에 대해 방패막이가 되어 주셔야죠."
"그건 처음 만났을 때 며느리와 약속한 것입니다."
"셋째, 환희의 이후 활동에 대해, 당신은 물론 당신 형제, 친척들의 지원이 필요해요."
"손자를 안겨주면 그 후에 해드리죠."
정미는 조금 숨을 가다듬었다. 다음에 내밀 조건이 핵심이었기에.
"마지막으로 내가 HGE를 통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비밀이 지켜지도록 도와주세요."
"어떤 식의 도움이 필요하시죠?"
"당신이 알 정도면 소문이 퍼졌겠죠? 언론을 통제해 주세요."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
"당신의 사촌이 도의원이고, 국회의원의 사위가 아닌가요? 당신의 친언니는 공무원과 결혼해 지금 3급이라죠? 그 정도면 가능하지 않나요?"
상희는 잠시 침묵했다. 거기까지 알고 있는 정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좋아요. 하지만 3개월 이상은 어려워요."
"6개월."
"해보죠. 6개월 동안 HGE에 대한 언론 통제. 그 것이면 됩니까?"
"물론."
"대신 당신과 환희는 절대 장천국이나 H사와 만나선 안됩니다."
"당신들이 하는 걸 봐서."
"역시 소문대로 군요."
"우선 000부터. 그 쪽에서 내 병실까지 왔었다는 군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협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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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상희가 돌아갔다.
정미는 침대를 내려 몸을 눕히고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악마와의 거래란 이런 건가? 저런 냉혈한과 거래라니..."
하지만 거래는 성사되었다. 남은 건 앞으로 양측이 이 계약에 성실히 임하는 것이다. 딸을 위해, 자신을 위해, 자기 회사를 위해, 정미는 자신보다 더 큰 상대와 계약했다. 그런 계약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아... 어설픈 선의보다 냉철한 악의가 더 도움을 준다고? 그 말이 이번 경우인가?
그 경수의 엄마가 저런 냉혈한이라니... 위선이 정말로 세계 챔피언급이었어.
저 차디찬 칼날이 환희에게 향하면 안되는데... 지켜주는 칼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조금만 건강했다면...."
정미는 혼잣말을 하며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웠다. 앞으로의 미래를 고민하며.
병원을 나서는 상희도 한숨을 쉬었다. 그녀 역시 아들과 며느리, 태어날 손자를 위해 거대한 세력을 끌어들여야 했다.
솔직히 그 세력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과 교류가 있었을 뿐인...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자신의 것이 전남편이 아니라 그들의 손에 빼앗길 가능성을 의미 했다.
그런 가능성을 염두 하면서도 그녀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의 아들 부부와 손자가 장천국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 인정할 수 없기에.
그녀는 즉시 중요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삼촌, 상희에요.
그래요.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HGE에 대해서... 그 쪽에서 6개월 정도는 비밀이 지켜지길 원합니다. 그게 조건입니다."
"물론입니다. 환희는 삼촌 생신 파티에 참석할 겁니다."
"그럼 행사날 뵙죠."
"특히... 알아보니 방송국에서 이 쪽을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그 쪽부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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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안은 신년을 맞아 새 업무를 시작하려는 분위기로 분주했지만, 진석과 수영은 정미와 HGE의 뒤를 캐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정미와 상희가 합의를 이룬 직후 두 사람은 보도 부장에게 호출 당했다.
부장은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노려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건 최종 명령이야. 이정미에게 손 떼."
부장에 명령에 수영이 저항했다.
"내가 물러서지 않을 거라고 말했을 텐데요?"
"둘에게 엄중 경고가 내려왔어. 모진석씨, 넌 다음 주부터 미국 뉴욕에 취재로 가게 됐어.
수영이 넌 오늘부터 한 달 간 정직이다."
수영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날 건드리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부장은 당황했다. "내 선에서 결정된 게 아냐? 도대체 너희들은 어디를 건드린 거지? 왜 이렇게 일이 크게 되는 거야."
진석이 부장에게 물었다. "이 정미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던가요? 방송국 취재를 좌우지할 정도의?"
"이 정미... 정도가 아냐..."
"그럼 누구죠? 어디서 압력이 들어온 거죠?"
"그건.... 말 못해..."
"수영씨, 당장 전송하세요."
그 말에 수영은 휴대전화를 만졌다.
"그만해. 제발... 이건 나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야. 어떻게 은퇴한 영화배우의 취재에 정치 쪽에서..."
"그러니까 그게 누구죠?"
수영는 휴대 전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지금 전송 버튼을 누르면 네 놈 딸이 어떻게 될까?"
두 사람의 협박에 못 이겨 부장의 입이 열렸다. "이익... 00시의 강명도."
진석은 크게 놀랐다. "강명도 의원? 어떻게 그런 거물이..."
수영이 물었다. "그게 누구죠?"
"전라도 00시 국회의원 강명도. 청와대와 직접 연결된 거물이죠. 이정미가 거기까지?"
"알겠어? 나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진석은 한 숨을 쉬었다. "거기까지라면... 좋습니다. 손 떼죠."
"진석씨, 무슨..."
진석은 수영을 손으로 제지했다. "우리 힘으로 더 이상 어쩌지 못할 일입니다. 여기까지군요. 우리 희망도."
"그러니 이제... 이번 취재는 이대로 끝내야 해. 알겠...어?"
잠시 숨을 가다듬고 진석은 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부장님. 우리에게 한가지는 해 주셔야 겠습니다. 지금 수영씨가 정직이라고 하셨죠? 그걸 막아주시죠."
"위에서 내려온 결정이야.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잘 알잖나?"
"정직이 아닌 휴가로 처리해 주실 수 있죠? 경력에 흠집가지 않도록."
"후우... 그 정도는... 좋아."
"병으로 인한 휴직으로. 유급에 기한은 2주로 해 주십시오. 그래야 수영씨의 경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아닙니까."
"나를 얼마나 몰아붙일 셈이지?"
"이 일로 당신은 부하 직원을 보호한 것이 됩니다. 직원들의 인망을 얻을 기회군요."
부장은 시선을 수영에게로 향했다. "수영이가 파일을 삭제해 준다면..."
"아직 수영씨는 전송 중단을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렇지 않고는 안심 못해." 부장도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한다는 눈치였다.
"그럼 수영씨의 아나운서 복귀라면 어떨까요?"
"그건..." 새로운 제안에 부장은 얼굴에 고민이 생겼다.
"이번 봄철 프로그램 개편에 수영씨를 아나운서로 복귀시켜주십시오. 시간은 아무 때라도 괜찮아요, 심야든 아침 방송이든."
진석는 수영를 보며 물었다. "그렇죠, 수영씨?"
수영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방송 복귀라면..."
"그건 내 권한 밖이야." 부장은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럼 강명도 측에 우리 뜻을 전달해요. 우리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무슨 소리지?"
"HGE의 수출입 거래에 대해 국세청에 진정하겠습니다."
부장은 더욱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도 거래를 제안하는 겁니다. 수영씨의 승진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그 쪽의 힘이면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전해주십시오. 그러면 그 쪽도 동의할 겁니다."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수영은 부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파일은 방송 복귀가 공식적으로 결정되면 삭제하지."
"그걸 어떻게 믿지?"
"지금까지 내가 당신을 믿어왔는데, 당신은 날 못 믿는다?"
그녀의 원망어린 눈빛에 부장도 물러서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