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제 1.5화 : 짧은 송별회
숨만 내쉬어도 하얀김이 보일정도로 추운 1월 어느날, 유난히도 동장군이 위세를 떨치는 겨울의 밤하늘 아래로 윤과 친구들은 비닐하우스 안에 마련되어 있는 바베큐 장에 중앙에 있는 그릴 앞에 도란도란 모여 있었다.
"자, 그러면. 윤의 일본정복을 위하여!!"
"위하... 아니, 아니. 내가 왜 일본을 정복해야 하는 건데."
"너 일본에 있는 소설 정복하러 가는 거잖아."
"약은 제시간에 챙겨먹어라."
윤은 건배를 하기 위해 일어선 친구의 등을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 그 친구와 눈치 딱 마주치자 동정 어린 시선을 사양하지 않고 마음껏 발사 해주고선 고개를 양 옆으로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신정주, 작작해라. 때와 장소는 가려야지."
"어중간한 드립은 자신에게 독 밖에 안 돼. 형."
"저건 드립도 아니야... 그냥 개소리야."
"어쩌겠어? 그게 신정주라는 존재인걸?"
"쿡쿡."
"쯧쯧..."
윤뿐만이 아니라 모여 있던 친구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비난의 비수를 팍팍 날려주었다.
건배하기 전 드립 좀 쳐서 분위기를 살리려 했던 정주는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기에 불만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분위기가 띄워졌기에 찜찜한 기분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정주는 하지만 하루 이틀 받는 대접도 아니었기에 전혀 개의치 않고 건배제의를 이어나갔다.
"하여튼 애니화 대박 기념 및 앞으로 윤작가의 건강. 그리고 곧 군대에 가는 지욱이의 건강을 위해 건배!!!"
다소 엉성하고 진지함이 없는 건배제의였지만 친구들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식탁 정 가운데에서 잔을 부딪쳤다.
"대박은 무슨..."
윤은 건배를 하고 내용물을 들이키기 직전에 손동작을 멈추고 정주에게 핀잔을 주었다.
윤이 애니화의 계약으로 출국한 했던 시기가 올해 6월. 어느 새인가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나름대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애니메이션은 방영을 마친 상태였다.
"아직 어떤지 모른다니까."
윤은 겸손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겸손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직 어떠한 것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여느 애니메이션처럼 관련 상품 등은 만들어지고 있었고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화제가 되긴 했었지만 이를 근거로 흥행에 성공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거기다 실제적으로 차기작이 나올지 어떨지 판가름을 내는 bule-ray판매가 이제 막 시작된 단계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맞아. 형이 무슨 대박이야."
"시끄럿. 너 때매 더빙 구경도 못한 거 생각하면 진짜."
윤은 옆에 앉아 쓸데없는 한마디를 붙인 동생(지욱)에게 6개월 전 당시의 기분을 추억하며(?)머리에 꿀밤을 매겼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지욱은 윤이 급하게 귀국 할 정도로 크게 다치지 않았었다. 교통사고로 인해 입원을 하긴 했었지만 다리뼈에 금이 가고 오른팔이 조금 골절된 정도로 편집장의 말대로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었다.
윤은 그 당시 생각만나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종종 이런식으로 지욱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아앗, 군대 끌려갈 사람한테 너무하네. 진짜."
"시끄러 생캬."
"그런데 윤작가."
"왜? 강작가?"
"...강작가라고 하지 말랬지."
"윤작가라고 부르지 않으면 생각해 보도록 하지."
윤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강작가(예빈)는 뭔가 말하려는 불만 섞인 표정을 잠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말씨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원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집이나 그런 건 다 구했어?"
"집? 그건 현지 가서 구해야지."
"그럼 그 동안은? 호텔?"
"호텔은 무슨. 내가 돈이 어딨다고. 아는 사람집에있을거야."
윤은 불필요한 지출은 줄어드는 편이 좋았기에 성하의 집에 어떻게든 빌 붙어보려고 나름대로 작전을 짜는 중이었다.
"윤작가 궁상떠는 것 좀 보소. 우리 중에 제일 떴으면서. 안 그러냐? 범석아."
"시끄럽고. 고기나 구워. 굽는 속도가 못 따라 가잖아."
"윽! 난 그냥 고기 굽는 아저씨냐!"
"그럼 여기 왜 있는데."
"배신당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진짜로 찍어 줄까? 도끼는 없고 아까 보니까 바베큐 할 때 쓰는 긴 쇠꼬챙이는 있던데."
범석이라고 불린 건장한 체격의 청년은 정주에게 차가운 태도의 표본을 제대로 보여주며 아까 우연히 보았었던 쇠꼬챙이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진심은 아니었고 장난이 10%정도 녹아 20%, 30%, 50%.. 그러니까 에... 장난삼아 한 말일 것이다. 아마도...
"조용히 고기 굽겠습니다."
이 협박 아닌 협박을 알아들은 정주는 얌전히 고개를 숙인 뒤, 들고 있는 집게로 고기와 야채를 '샤샤샥'소리가 날정도로 빠르게 뒤집기 시작했다.
"맨날 재미없는 콩트만 준비하는 것 같아. 쿡쿡."
"유은월, 나랑 저 녀석이랑 세트 취급하지 마. 내 존재의 격이 떨어지잖아."
"하지만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는걸 뭐. 안 그래 예빈아?"
"응? 뭐... 그렇지."
"누나 말대로 아주 멋진 콤비죠."
"그렇지? 그렇지? 유니가 쓴 소설에도 나오잖아. 둘을 모티브로 삼은 만담 캐릭터."
"그렇긴 한데... 너, 유니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냐."
윤은 기껏 만든 예명이 여자아이 이름 같이 불리자 들고 있던 바비큐 꼬치도 내려놓고 반응을 보였지만 한숨 섞인 핀잔을 주는 것으로 끝냈다. 한두 번도 아니었고, 어차피 말을 한다한들 들어줄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 이름이 더 귀여운걸?"
"귀여울려고 지은 예명 아니거든..."
"하지만 유니는 유니인걸."
"... 내가 말을 말지."
"야, 근데 네 소설에 내가 모티브인 캐릭터가 있었냐?"
고기를 바쁘게 구우면서도 소설의내용을 곰곰이 더듬어보던 정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감조차 잡히지 않자 이를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꺼냈다.
"음... 있긴 한데...아니다."
그 의문에 무심코 대답을 해주려던 윤은 됐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고기와 함께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마주쳤던 시선도 다른 쪽으로 돌리며 정주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뭐, 뭐야. 그 리액션은!"
"아니 뭐, 그냥. 아무것도 아냐."
"형, 소설 읽긴 했어?"
"당연히 읽었지...신간도 꼬박꼬박 챙겨보고 있다고. 그런데 나 같은 캐릭터는 없었는데?"
"이 형은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읽었는데도 모르면... 참."
지욱은 혀를 끌끌차며 정주를 항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이는 지욱만이 아니었다. 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눈치 없는 친구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뭐, 뭐야. 그 시선들은! 뭐라고 말 좀 해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지. 아~아~ 불쌍한 우리의 자칭 매니저."
"얏! 윤초원 이럴 때만 신나서 떠들지 맛! 윤작가! 뭐라고 말 좀 해봐! 이런 반응이 더 싫다고!"
"음... 정말로 알고 싶냐?"
"뭐, 뭐야... 갑자기 마치 출생의 비밀을 말하기 직전의 비장한 표정의 엄마와도 같은 말투는."
"엉뚱한 데서 소설같이 해설 넣지 마."
비교적 진지한 분위기에서 말을 이어가던 윤은 반사적으로 대응해주는 정주의 드립에 표정을 무너트리며 그 원인 제공자를 응시했다.
"어찌되었든. 어서 진상규명을 해줘. 윤작가."
"흐음..."
"형, 현실은 잔혹한 법이야. 말해줘."
"더 시간 끌면 정주가 불쌍해지잖아."
"모티브인 본인에게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구상한 사람이 말 해 줘야 곧바로 받아들이지. 거기다 그렇게 충격적인 사실도 아니고."
"그런가...뭐, 그렇다면야. 포미야."
말 할까 말까 고민하던 윤은 주위에서 거듭되는 재촉에 그냥 말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시원스레 그 캐릭터의 이름을 이야기 해주었다.
"포미?... 그런 정령이 나왔던가?"
소설의 내용을 독파한 정주는 그 캐릭터가 무슨 캐릭터인지 곧바로 떠올랐지만 애써 외면했다. 외면은 하려 했지만 꾀나 충격을 받았는지 뒷부분의 이어가는 말은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친구들은 친절하게도(?) 그 캐릭터에 대해 설명 해주기 위해 지욱을 선두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개에요. 개."
"아마, 주인공이 기르는 강아지였지?"
"컥."
1차적으로 원욱과 은월이 캐릭터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고
"땡. 은월아. 그냥 강아지가 아니랍니다."
"??"
"드립치는 개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지? 윤초원."
"정답~ 역시 내 오빠야."
"큭.."
"덧붙여 말하자면 분량도 거의 없는 불쌍한 역이랍니다."
"없긴 왜 없어. 2~3권에는 나름 나오는구만."
"..."
2차적으로 초원과 범석이 그 캐릭터의 작중 역할에 대해 말해주고
"나올 때마다 드립만 쳐서 문제겠지..."
"크헉!"
마지막으로 조용히 있던 예빈이 결정타를 가하며 현실 도피하려고 했던 정주의 정신을 제자리에 돌려놓다 못해 그 가슴에 비수를 팍팍 꽃아 넣었다.
정주는 애써 잊으려고 했던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하나하나 나올 때 마다 일일이 효과음을 넣었고 마지막 한 마디를 받은 순간 고기를 굽고 있던 집게를 움켜쥐며 장렬하게(?)전사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친구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마다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너 워킹홀리가 1년이었냐?"
"어? 어."
"1년이라... 그럼 내년 겨울에나 귀국하겠네."
"아마도? 일찍 돌아와도 상관은 없긴 한데. 모처럼이니까 1년 다 채우고 와야지."
"하긴, 하려면 확실히 하고 와야 뭐라도 남지."
"그러니까. 1년 정도면 JLPT 1급 정도는 우습..."
"잠깐! 1년이라고?!"
"어? 어..."
맥주를 마시며 조용히 범석과 대화를 주고 받고 있던 윤은 언성을 높이며 대화에 끼어든 은월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 거리며 대답했다.
이 바람에 들고 있는 잔에서 흘러넘친 맥주의 거품이 잔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후움... 큰일 났습니다. 초원대장님! 유니가 없으면 노래를 만들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괜찮네, 유대원. 전 세계는 인터넷으로 이어져 있으니 말이네. 인터넷으로 곡을 보내 줄 걸세."
"오~오~ 그게 사실입니까? 대장님."
"김칫국부터마시지 마시지."
윤은 '됐네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불판에서 막 탈출한 삼겹살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은월은 윤의 냉담한 태도와 그 표정을 잠시 쳐다보다 훡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달려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애교 작전에 돌입했다.
"에이~ 유니야 왜 그래."
"... 떨어져."
"곡 준다고 할 때까지 안 떨어 질 꺼다. 흥."
보통 남자는 여자가 이런 식으로 들이대면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하더라도 남자와 여자, 그것도 가장 혈기 왕성할 시기의 20대 초반의 남성이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이런 식으로 달라붙는다면 관계를 떠나 본능에 의거해 순간 혹해 얼굴을 붉혀야 정상이었다. 정상일터인데...
"떨어지시지."
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젓가락으로 집은 삽겹살에 쌈장을 바르고 있었다. 오히려 귀찮다는 표정으로 은월을 쳐다보며 구두 경고를 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윤이 남들과는 조금 다른 이성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은월 한정으로 어린시절부터 하도 당하다 보니 면역력이 생겼을 뿐이었다. 거기다 이미 은월에게는
"여친 좀 데려가시죠. 아우님. 무지 귀찮게 구는데..."
"저도 포기한지 오래입니다. 형님."
"넌 여친이 외간남자한테 매달려 있어도 되냐?"
"형이니까. 그다지 상관없어... 누나가 그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남자친구가 이미 있었다. 그것도 상대는 윤의 동생인 이지욱!
지욱과 은월은 사귄지 3년째는 커플이었다.
"... 우우. 너무해. 남친님에게 배신당했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유니를 따라 일본으로!!"
"누나[너] 여권은 있어?"
"쿠궁. 우앙~ 초원아. 유니랑 남친님이 괴롭혀."
"그래, 그래. 괜찮아. 괜찮아."
은월은 듣기만 해도 '무슨 일이 있나?' 라며 고개를 돌릴 정도로 우는 소리를 냈지만 그 아무도 굳이 은월을 주목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연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한편의 시티콤을 보는듯한 미적지근한 시선만을 보냈다.
"그런데 정말 곡은 어떻게 할 건데?"
"만들어 주고 싶어도 저쪽에는 그런 기기도 없고, 악기도 없고, 프로그램 하나로 뚝딱 만들 만큼 쉬운 작업도 아니고. 것보다 그럴 시간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뭘. 저쪽 가서는 알바도 하고 학원도 다니고 하면은... 아마 소설쓰기도 빠듯하겠지. 거기다 이 녀석 내년에 군대 가잖아."
"어? 아... 맞다. 너 군대 가지? 내년에."
"아, 맞다. 잠시 깜빡 하고 있었어."
범석과 초원은 내년이면 군대라는 감옥에 끌려갈 지욱을 새삼스레 주목했다.
오늘 윤을 포함한 친구들이 모처럼만에 모여 여행 온 이유는 윤의 출국도 있지만 지욱이 곧 군대에 가기에 이를 위한 송별회까지 겸하고 있었다.
"둘 다 너무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초원에 품에 안겨 있던 은월은 그 품 안에서 빠져 나와 씁쓸한 맛의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남자친구를 대신해 볼을부풀리며 귀엽게 화를 냈다.
"누나... 됐어. 어차피 곧 군인아저씨인데 뭘..."
"우욱! 지욱아~!"
"여기도 꽁트 찍냐... 여튼 그럼 이 기회에 밴드도 휴식기 좀 가져."
여기에 있는 예빈, 정주를 제외한 윤, 은월, 초원, 지욱, 범석은 홍대를 주축으로 활동하는 'sky'라는 밴드에 멤버였다. 비록 인디밴드이기는 하지만 정기적으로 공연도 하고 있고, 홍대에 좀 놀러다닌다 싶은 사람들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기도 했다.
윤은 sky에서 곡을 만들어주는 전담 프로듀서이자 작곡가 겸 일렉트로닉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자, 자. 그런 세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 오늘은 마시고 노는 데만 전념 하자고!"
한 동안 대화를 지켜보던 정주는 모처럼 달아오른 분위기를 다운시킬 수 있는 주제가 나오자 반 정도 내용물이 차있는 맥주캔을 들며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도 오늘 이 시간만큼은 그냥 접어두고 싶었기에 재차 건배 제의에 찬동하며 들고 있던 맥주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