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제 9화 : 애니멜로 서머 라이브! (11)
총감독인 오노는 사전에 미리 제출했었던 요조라의 무대 연출을 바탕으로 객원 프로듀서인 마츠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해가며 ‘달빛요정’에 맞춰 무대의 전체적인 연출을 바꿔나가는 한편, 갑작스럽게 무대에 서게 된 윤의 무대 진입 동선을 시작해 무대 등장 방법, 무대 세팅, 무대 위 동선. 그리고 퇴장 동선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하나 꼼꼼하면서도 거침없이 전부 고쳐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오노는 윤의 무대 참가라는 변수 때문에 기존의 무대 계획을 완벽하게 뒤엎어 버리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대 위에서 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호시노 요조라’라는 가수가 더 좋은 무대를 꾸미기 위한 감초 역할. 성우 ‘호시노 요조라’와는 같은 무대에 서기는 하지만 무대 자체에는 영향을 주지 않도록. 그냥 감초 역할에서만 끝나도록 계획을 수정한 것이었다.
윤 역시 오노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아니, 오히려 스스로가 자신의 역할에 제약을 걸면서 무대에서 정말 신경 쓰지 않는 한 눈에 띄지 않도록 의견을 냈다.
그렇게 길면서도 짧은 리허설이 끝나고 나서도 의상, 메이크업 등으로 시간을 쏜살같이 보낸 윤은,
“[그러니까... 무대는 옆에서 대기하다가 소개 해주면 등장하면서 짧게 인사를 하고 무대 뒤에서 기타 세팅. 그리고 메인 스테이지로 돌아오고 토크가 끝나며 신호를 준 뒤 시작. 기타 연주에서도 퍼포먼스는 최대한 줄이고. 노래가 끝나면...]”
대기실의 소파에 앉아 아까 정한 자신의 이동 동선을 한국말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마 앞뒤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지금의 윤의 모습을 본다면 분명 ‘정신줄(?)을 놓았네...’라고 단정을 지어 버릴 것이다.
“우아~ 프로듀서님. 매니저님이 망가져 버렸어요. 랄까? 영혼도 빠져나갈 기세예요.”
“뭐... 갑자기 이런 일이 돼 버렸으니까. 아마 미우라 선생님이라도 이런 일을 당하면 긴장하고 마실걸?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실 수도 있겠지만.”
“음~ 그래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여유로웠었잖아요. 역시 할아버지 말대로 사람이란 상황에 처하면 바뀌는 법이네요.”
“아마 지금 윤은 무대 위에 서기 전의 긴장감이라는 녀석과 열심히 싸우고 있을 거야.”
마츠다와 미츠키는 TV를 보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청자처럼 대화를 무덤덤하게 주고받았다.
“[으~ 연습. 연습. 가만히 있다간 떨려 뒤지겠다.]”
윤은 조금 전 오노의 배려로 받아 온 일렉트로닉기타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뒤 팔이 움직이는 대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달빛요정’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 자체는 누가 듣더라도 나무랄 때가 없을 정도로 능숙했다. 아마 sky의 친구들이 바로 옆에 앉아 연주를 듣고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별 다른 불평을 이야기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가까웠지만! 윤은 긴장을 조금이라도 누그러트리고자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마음에 들 때까지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연주했다. 그러면서도 신기한 것은,
“저... 분명 지금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겠죠?”
“저건 노래라기보다는... 랩? 아니, 아니지. 불경?”
입으로는 여전히 무대 동선을 외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해외 토픽에 나오더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진풍경이라면 진풍경이었다. 여기에 윤은,
“긴장 앞에서는 장사가 없네요.”
“그런 거지.”
“거기, 조용히!”
당사자를 앞에 놓고도 천연덕스럽게 실황중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마츠다와 미츠키에게까지 착실하게 태클을 걸어주었다.
“... 자~ 그러면. 퇴장할 시간이야 미츠키.”
태클을 걸면서도, 걸고 나서도 여전히 연주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윤의 얼굴을 아주 잠깐 들여다보더니 양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어서.”
마츠다는 회전의자에 앉아서 몸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미츠키의 오른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미츠키는,
“꺗! 프로듀서님!”
몸의 중심을 잃고 마츠다가 서 있는 출입문 방향으로 고꾸라질 뻔하다가 마츠다가 팔을 한층 더 강하게 잡아끌자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대기실에서 다소 부산스럽게 퇴장했다.
그렇게 대기실 안에는 떨리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고자 연습을 하는 윤과 이 일을 저질러 준(?) 요조라.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에... 그러니까 그.’
리허설을 하기 전만 해도 긴장을 주체하지 못했었던 요조라는 온데간데없었다. 소파 위에는 완전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이 믿을 정도로 아주 조신한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물론, 이는 겉모습뿐으로 속으로는...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해버렸나?’
‘일을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방향으로 전개시키지 않았나?’라는 생각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니,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어찌 되었든! 요조라는 윤의 눈치를 살피다가 정면에 놓여 있는 물병을 바라보기를 일정 주기로 반복 중이었다.
‘역시 그렇겠지? 지금 윤작가님을 보고 있으면...’
요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기한 기분에 떠밀려 윤에게 같이 무대에 서자고 부탁을 했었지만 지금 윤의 분위기와 표정을 바로 옆에서 맞대고 있으니 윤의 입장을 너무 고려하지 않았느냐는 걱정까지 들었다. 너무 자기 멋대로가 아니었느냐고...
‘아~ 정말. 아까 도대체 왜 그랬던 거지?’
누군가 그랬던가? 인간은 늘 후회하는 동물이라고... 불과 수 십 분 전만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넘쳤었던 요조라는 어느새인가 후회라는 글자를 머릿속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칠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꼭 해야 해. 무조건...’
한편, 기타를 치면서 불경(?)을 외고 있던 윤은...
‘하아~ 연습이고 자시고. 그만, 그만. 여기서 더 했다간 손가락만 나가겠다.’
옆에서 열심히 장난을 걸어준 미츠키와 마츠다 덕분에 어느덧 진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연습하다 본 공연에서 망하는 것보다 멍청하고 꼴사나운 짓도 없으니까.’
윤은 마음 같아서는 무대에 서기 직전까지 잡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싶었지만 본 무대에 설 때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자 일렉트로닉기타를 소파 옆에 조심스레 세워두었다. 그리고 요조라를 향해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응?’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표정을 힐끔힐끔 살피고 있던 요조라와 눈이 딱하고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
“...”
윤도, 요조라도 숨을 꼴깍하고 넘기면서도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방금 전과 같은 편안함에 사로잡혀 그냥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지금 시선을 돌려버린다면 어색해질 거라는 생각에 눈을 피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아니, 못했다. 못했지만, 말문도 덩달아 막혀 버려 사이좋게 꿀 먹은 병아리가 되어 버렸다.
‘아니, 아니. 또 왜...’
윤은 요조라의 표정을 시야의 정 가운데 넣은 순간 딱하고 직감했다. 지금 요조라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보고 있는지. 왜 시선을 돌리고 있지 않은지. 지금 어떤 기분으로 있을지...
‘이건 미안해할 일이 아니잖아. 그... 내가 잠시 패닉에 빠지긴 했었지만 나도 내가 좋아서 하기로 한 거고.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내가 무대에 서는 사람치고 떨지 않는 사람을 못 봤다고. 그 은월이 조차도 무대에 서기 전에는 그렇게 떠는데. 내가 좀 오버한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윤은 앞으로 요조라가 할 말을 가로채 버리기 위해 입을 열기로 마음먹고 성대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이때,
“윤작가님 고마워요.”
이러한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던 요조라가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네?”
‘미안해요’, ‘죄송해요’ 등등 사과의 말을 하리라고 예상하였던 윤은 요조라에게 무심코 되묻고 말았다.
“고마워요. 오늘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덕분에 많이 안심하고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야말로 이런 무대에 설 기회가 생겼으니까 오히려...”
“아뇨. 그러니까... 절 설득하러 집까지 와주었던 작년 7월, 지진을 겪었었던 올해 1월. 그리고 아오츠키 프로덕션에서 같이 일하게 되면서 오늘 이 애니멜로 서머에 서기까지... 늘 부족한 절 옆에서 도와주고, 제 어리광에 어울려주고, 언제나 제 부탁을 들어주어서 정말로 고마워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요조라는 그동안 차곡차곡 담아두고 있었던 마음을 윤에게 꺼내 보였다.
윤이 애니멜로서머 무대에 서는 것을 허락해주어서인지. 아니면 불꽃놀이 대회 날 밤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전에 윤을 바라보면서 느꼈었던 신기한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지금 단둘이 있기 때문인지... 어쩌면 이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윤에게 이러한 말을 해야 한다는 기분이 들었고 그냥 그 기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
윤은 요조라의 고맙다는 이 한 마디가 귓구멍을 통과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자. 아니, 그 진심이 가슴 안으로 사르르 울려 퍼지자 의식이 현실에서 순간적으로 멀어지면서 말 그대로 일명 ‘멍~ ’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지금.’
윤은 20년 조금 더 되는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고맙다는 종류의 말을 숱하게 들어보았었지만 듣는 순간 가슴이 쿵쾅하고 내리 앉는 느낌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냥 단순히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게 아니라, 감사의 인사를 받은 게 아니라 마치... 마치...
‘아니,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감사의. 감사의 인사라고.’
지윤은 평소보다 2배 넘게 빨리 뛰고 있는 심장을 나무라며 요조라가 앉은 각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오른손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오른손가락 사이사이에서는 손바닥에서 베어나온 땀방울들이 군데군데 뭉쳐 반짝반짝했다.
‘내가 분명 지금 요조라한테 관심이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이런 걸로 착각하지 말라고 진짜. 그냥, 그냥. 감사의 인사라고. 응. 맞아. 감사의 인사. 내가 여태까지 이래저래 많이 도와줬었잖아? 도움을 받은 것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그냥 인사라고. 인사. 들뜨지 말라고 진짜.’
윤은 마른침을 꼴깍 삼킨 뒤 지금 머릿속에 떠돌고 있는 단어를 지워버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저도 이래저래 도움을 받았잖아요? 덕분에 아르바이트도 무사히 찾아서 일본에서 생각보다 재미있고 순조롭게 생활하는 중이고. 무엇보다도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넓어졌다고 해야 하나? 저도 정말 고마워요. 그러니까 오늘 무대는 무조건 성공시키도록 노력하죠. 아니, 성공시켜요.”
“네!”
요조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