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특별편 : 8개월 뒤 (3)
“미안해요. 한자와씨.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괜찮습니다. 꼭 오프닝 건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면 이미 감독님에게 이야기는 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어떠한가요? 오프닝에 대한 윤작가님의 생각은.”
“제 생각을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요조라씨가 부르고 싶다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이유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으신가요?”
“무언가 딱 이렇다 할 이유를 들은 바는 없었습니다. 그저... 그 제안을 할 때 호시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불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그렇군요...”
‘반드시...라...’
“정 그 이유가 신경 쓰이시면 호시노와 미팅을 잡도록 할까요? 요즘 워낙 바빠서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 아닙니다. 그 정도까지 궁금한 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그냥 왜 그런 제안을 했었는지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프로듀서님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흠... 그렇네요.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은 곡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작품의 흥행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고 보고 있고 음악적인 요소 역시 ‘너에게 안녕을’에 상당히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너에게 안녕을’의 2기 내용을 고려 해봤을 때 ‘달빛 요정’처럼 잔잔한 오프닝도 ‘된다(あり<아리>)’생각하니까요.”
“그렇군요. ... ... ...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 답을 드리긴 어려 울 것 같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윤은 잠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졌다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오구라와 키요타카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괜찮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출국하기 전에만 답을 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자, 그러면... 오늘 미팅은 이것으로.”
“자, 잠깐만요. 감독님. 오늘 윤작가님 2)blue-ray판 오마케(덤) 촬영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아~! 맞다, 맞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미팅이 끝났음을 알리려고 했던 오구라는 유리의 말을 듣고 주먹을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치면서 전형적이 ‘아 그랬었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윤작가님. 죄송하지만 이후에 시간 괜찮으신지요?”
“네... 별다른 예정은 없습니다만. 오마케 촬영이라고 하시면 1기 때 했었던그...”
‘카메라 앞에 두고 혼자서 뭘 말해야 할지 몰라 더듬더듬 거렸었던...’
“네. 맞습니다. 정석대로라면 본 방송이 방영될 때쯤 촬영을 해야 하는 건데... 그 시기라면 윤작가님을 일본에 다시 모시기 어렵지 않을까 싶어서 이왕 이렇게 오신 김에 촬영을 해두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어떠하신가요?”
“그러네요. 아무래도 그 시기에는 시험이 있다 보니... 이번에 찍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라도 해왔을 텐데.”
참고로 윤은 1기 오마케 촬영 때도 일주일 전부터 할 말을 준비하고 그 말들을달달 외울 정도로 연습했었는데도! 녹화 때 너무 긴장을 많이 해 일본어를 더듬더듬 말하다 결국 한국어로 대체해 자막을 입히는 형식으로 오마케 촬영을 마쳤었다.
일본에 살기 전이라 일본어가 그렇게 입에 붙어 있지 않은 시기이기는 했었지만... 일본어를 전공으로 공부해왔었던 윤 개인에게 있어서 흑역사라면 흑역사인 첫 오마케 촬영이었다.
“감독님도 참. 그런 중요한 사실을 촬영 직전에 전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정말로 그렇네요. 키요타카씨. 윤작가님이 당황하셨잖아요.”
“저라도 갑자기 오마케 촬영 이야기 꺼내면 당황할 거라고요? 감독님.”
키요타카와 한자와는 마치 이때를 기다렸던 것 마냥 오구라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날렸다.
“나, 나도 보고 받은 건 어젯밤이었다고. 갑자기 시즈오카씨가 그런 말을 꺼내서. 거기다 보통 이런 일은 데스크가 하는 일이잖아.”
“에... 에? 자, 잠시만요. 감독님! 전 오늘 아침에서야 감독님에게 전해 들었는걸요?!”
유리는 장난의 룰렛의 끝이 갑작스레 자신을 가리키자 심히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촬영하러 가는 동안 생각하면 되니까요. 그럼 지금 바로 가나요?”
“네. 지금 연락해 놓으면 도착할 때쯤 촬영 준비가 전부 끝나 있을 겁니다.”
한자와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대답했다.
“저 그럼 장소는?”
“마루노우치에 있는 스튜디오입니다.”
“마루노우치라...”
“Jas스튜디오 인가요?”
윤은 성하가 마루노우치까지 가는 길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리고 있는 사이, 한자와를 보면서 정확한 목적지를 물었다.
“네, 맞습니다. 알고계신가요?”
“당연하지. 작년에 아오츠키 프로덕션에서 일하시면서 수백 번은 가보셨을걸?”
오구라는 마치 윤을 대변하듯 두말하면 입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아. 그랬었나요?”
“네. 아마... 제가 스튜디오까지 따라 들어간 적은 별로 없어서 잘 모르실 거예요.”
참고로 윤은 작년에 아오츠키 프로덕션에서 일할 당시, 요조라나 미츠키가 스튜디오에서 일할 때면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혹여나 방해될까 싶어 따라 들어가지 않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 일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대기하곤 했었다. 물론, 소설을 쓰면서.
“아, 아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소설 집필에, 작곡에, 매니저일 까지...”
“그러니까 저번에 말했잖아요? 우리랑은 노는 물이 다르다고.”
“정말 그 말 그대로네요.”
“아하하하...”
당사자인 윤은 뭐라고 말을 꺼내지 못하고 멋쩍은 기분을 조금이라도 빨리 누그러트리고자 기쁜 듯하면서도 곤란한 듯한 쓴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이러쿵저러쿵하는 사이에 1차 미팅을 무사히 마친 윤은 생각지도 못한 Blue-ray 오마케 촬영을 위해 오구라 감독 일행과 같이 회의실을 나서게 되었다.
이로부터 15분 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줄곧 고민하던 윤은 성하가 차를 단번에 주차하자 고개를 들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어때? 다 정했어?”
“일단 고맙다는 인사하고... ‘너안’에 있는 에피소드 모티브 이야기 조금.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다. 이 정도?”
“그 정도만 해도 돼?”
“네, 뭐... 저번에도 간단하게 했었고. 어차피 말 그대로 오마케(덤)이니까요.”
윤과 성하는 이 말을 끝으로 차에서 동시에 내렸다.
대화는 이를 기점으로 잠깐 끊기는 듯 싶었지만 성하가 다시 입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속편에 관한 이야기는?”
“속편이요? 음... 정식 출간은 안 될 확률이 더 높으니 그냥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아, 아니다. 그냥 나올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해 볼까.”
“그렇게 말하고 2편 마지막 화에 그런 장면이 나오면... 전부다 100% 속편 나올 거라고 믿을 것 같은데.”
“뭐, 믿든 안 믿든 그건 독자들의 자유~ 라는 것으로. 어차피 소설은 속편이 나올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끝내 버렸으니까요.”
“참...”
성하는 윤의 능청스러운 태도가 눈에 들어오자 자연스레 쓴웃음을 삼켰다.
“것보다 어서가죠. 에어컨 냉기 보호막이 점점 닳아 없어지고 있... 으...”
윤은 차에서 내린지 불과 10초 만에 땀구멍이 활짝 열리며 금방이라도 땀이 배출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자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고 성하 역시 이런 불볕더위가 좋지는 않았기에 군말 없이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1분 뒤...
“우아... 1분도 안 걸은 것 같은데 벌써 땀나는 것 봐. 진짜 이놈의 더위는...”
스튜디오 건물 안으로 다이빙하다시피 들어 온 윤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은 아직 버틸만하다고 했나?]”
“[새벽에 창문 열고 자면 추울 정도입죠. 에어컨 없이 못사는 이런 동네랑은 다르다구요. 낮에 더운 건 매 한가지지만...]”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 여기 우롱차.”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유리에게 우롱차를 건네받은 성하와 윤은 각본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처럼 곧바로 뚜껑을 따고 우롱차를 입안에 들이 부었다.
두 사람 모두 우롱차가 품고 있는 냉기가 가슴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은 일본 몇년 차 인데 아직도 그래요?]”
“[더위는 그런 거랑은 상관없는 거야.]”
“아하하하... 그러면 지금 바로 촬영 진행할 스튜디오로 안내해 드릴게요.”
최대한 소리를 죽여 쓴웃음을 삼킨 유리는 오른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뻗어 스튜디오를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네. 윤 가자.]”
“[네.]”
‘어라? 방금 우리가 한 말을 알아들은 건가?’
윤은 방금 한국어로 주고받은 대화를 알아들은 듯한 유리의 반응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렇게 크게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기에 이 의문을 굳이 입으로 옮기지는 않고 유리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저기... 윤작가님.”
“네?”
“정말 죄송한데 저희가 잡은 스튜디오에 선약이 되어 있어서 1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유리는 자신의 탓도 아니면서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윤을 향해 머리를 숙였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더빙 중인가요?”
윤은 괜찮다고 손짓하며 빠르게 화제를 전환 시켰다.
“아뇨. 더빙은 아니고 보이스 체크를 하고 있어요.”
“아...”
“[보이스 체크?]”
“[본격적으로 더빙 시작하기 전에 성우가 연기하는 목소리하고 캐릭터하고 잘 맞는지 어떤지 최종적으로 체크하는 거예요. 마이크를 통과하면목소리가 약간씩 변하기도 해서.]”
“[아~ 그런 것도... 역시 1년간의 경험은 무시할 수가 없네. 전문가야, 전문가.]”
“[정확히는 10개월이지만요.]”
윤은 이때 이 설명을 하면서. 아니, ‘보이스 체크’라는 말을 들은 그 순간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보통 스튜디오는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계약을 통해 한 작품이 시잘 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빌리는 식이다. 기계의 종류라던가, 마이크, 엔지니어, 녹음실 환경 등등이 스튜디오마다 미묘하게 다른데다한 번 해 놓은 설정을 더빙 할 때마다 해줘야 하는 수고스러움도 덜기 위해 한 작품이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한 스튜디오만 사용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 윤이 오마케 촬영을 하기 위해 가고 있는 스튜디오는 ‘너에게 안녕을’ 2기 전용 스튜디오. 그런데 거기서 보이스 체크를 진행하고 있다면? ... ... ... 답은 안 봐도 비디오. 아니, blue-ray? 였다.
-띵동
어찌 되었든, 윤의 대답이 끝나자 선수 교대를 하듯이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나면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쪽으로.”
일행은 유리를 선두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스튜디오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으로 목소리를 바꾸지는 않나보구나.]”
“[바꾸는 일도 있다고 하긴 하는데 그건 특수한 상황 일 때만이고... 기본 방침은 리얼리티. 성우가 감독이 원하는 목소리를 만들어 오는 식이죠.]”
“[하긴 성우는 그게 직업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네. 그러면 보이스 체크에서 목소리를 만들때까지 하는 건가?]”
“[보통 오디션에서 회의를 거쳐 뽑으니까... 거의 간단한 체크? 거기다 장면마다 내야 하는 목소리가 다르니까 그냥 베이스를 다지는 차원인거죠. 10분 정도 걸린다고 했지만 이미 끝났을지도.]”
“[그러면 다음 분기나 4분기 작품의 보이스 체크를 하고 있다는 말이네.]”
“[그렇겠죠?]”
“[그러면 ‘너안’은?]”
“[‘너안’이요? 글쎄요... 1화 더빙하기 전에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텀이 꽤 되잖아. 이러면 또 하지 않을까?]”
“[그것까지는... 아,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유리의 뒤를 따라 스튜디오로 들어서려던 윤은 뒤늦게 쎄~~~한 기분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미 스튜디오 안으로 반 정도 들어가 버린 윤은,
“아, 오셨네요.”
그 안에서 보이스체크를 끝내고 오구라와 이야기를 하는 성우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았다.
-수고하십니다!
윤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서자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성우진은 일제히 윤을 향해 상채를 숙이며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윤은 기세에 눌렸다고 해야 하나? 누가 있는지 채 다 확인도 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상체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설마...’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 가운데... 윤은 상체를 들어 올리면서 스튜디오 안에. 정확히는 어떠한 성우가 와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이시카와 미유, 오토메씨, 나카무라 이쿠토, 히로미씨, 무라사키 아야나... 그리고 저 사람은 소아 역을 하게 된 하나사키 아이였고. 그리고... 아.’
감독으로부터 가까운 쪽에서부터 먼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윤은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삼총사와 시선이 딱하고 마주쳤다.
‘유우지, 아즈냥, 미츠키...’
윤은 일단 요조라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이 삼총사와의 만남도 그다지 원하지는 않고 있었기에 똑같이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참아라, 참아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웃음이 코끝을 간질이자 아랫입술의 안쪽을 있는 힘껏 깨물며 참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