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5화 〉제 13화 : 새로운 시작 (6) (105/117)



〈 105화 〉제 13화 : 새로운 시작 (6)

*
“에? 정말로요?”
“네. 예전에 어디선가들어봤었던 이름이라고생각했었는데... 확인해 보니 맞아요.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는 말아주세요. 요조라씨가 하세가와씨를 대신해서 출현한 건 맞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으니까요.”

윤은 유료주차장 안의 빈자리를 향해 핸들을 틀면서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주어서.”

요조라는 다정함이 묻어나오는 윤의 배려에 입꼬리를 위로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런 일도 있고 하지만... 역시  하세가와씨의실력이 아깝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도 자기 의지가 아닌 다른 이유때문에 음악을 그만두게 되면...?!”

운전석에 앉아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던 윤은 어깨를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아직 대기 중에 감돌고 있는 꽃샘추위가 차 안으로 들어 왔기 때문은 아니었고, 어두운 밤거리가 보이는 창문 너머로 귀신같은 존재가 보였기 때문도 아니었다. 요조라가 기어 위에 올라가 있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감싸 쥐었기 때문이었다.

“전 윤작가님이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그래 주었던 것처럼... 분명 그 생각은 틀리지 않을 테니까요. 전 윤작가님을 믿어요.”

윤은 고개를 살며시 돌며 요조라의 얼굴을 아주 잠시동안 바라본 뒤 왼손을 위로 돌려 요조라의 오른손과 마주 잡았다.

“고마워요. ... 그러면 내리죠.”
“네.”

윤과 요조라는 시선을 한 차례 맞춘 뒤에 자연스럽게 마주 잡았던 손을 풀면서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윤은 요조라를 따라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어진 상점가를, 일전에 요조라가 유즈리나가 운영하는 초콜릿 가게를 찾아갈 때와 똑같은 길을 걸어 나갔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사이에 날씨가 풀려 군데군데 쌓여 있던 눈은 전부 녹아 사라진 상태였다.

“여기에요.”
“여기가...”

윤은 요조라가 멈춰 서자 고개를 아래서부터 위로 천천히 들어 올리면서 알록달록한 불빛이 거리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는 가게를 천천히 시야 안으로 넣었다.

‘일단 이야기만이라도 꺼내 보자. 이대로 사라지기에는 실력이 너무 아까워.’

“그러면 벨 누를게요.”
“아뇨. 제가 할게요.”

윤은 가게 문 오른쪽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이로부터 약 30초 뒤, 가게 문에 걸린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구세요?”

가게 문이열리면서 창문 사이에서 새어 나오던 불빛이 문틈으로 넓게 퍼지는 동시에 유즈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안녕하세요. 하세가와씨.”
“아...”

유즈리나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문이 열리고 윤과 눈이 마주치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대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어쩐 일이 신가요. 영업시간은 끝났는데...”

평소보다 약간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세가와씨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잠깐 시간 괜찮을까요?”
“혹시 제가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 통보해서...”
“그건 아닙니다.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저도 부탁드릴게요. 저희하고 잠시만이야기 해주지 않으시겠어요?”
“... ... ... 들어오세요.”

 옆으로 요조라가 서 있는 것을 확인한 유즈리나는 잠시 동안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람이 들어  수 있도록 문을 더욱더 활짝열었다.
유즈리나는 머리에는 에메랄드색 주방용 두건을 쓰고 있었고 앞치마역시 이에 맞춘 듯이 에메랄드색 바탕에 하얀색 하트 모양이 이곳저곳에 수놓아져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윤과 요조라는 유즈리나가 뒤로 물러서자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 안은 장식이라던가 분위기적인 면에서는 일전에 요조라가 방문했을 때와 비교 했을 때 별로 달라진 점은 없었다. 단지 달라진 점이 좀 있다고 한다면 진열장 대부분이 비어있었던 그 날과 달리 지금은 진열장 대부분이 가지각색의 모양의 초콜릿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쪽에 앉으세요. 뭔가 마실 걸 내 올게요.”
“네.”

윤과 요조라는 유즈리나가 안내한 접객용 유리 식탁 앞에 나란히 앉았다.

‘생각보다 큰 가게네... 이곳저곳에서 오래된 가게라는 느낌도 나고. 최소 몇십 년은 된 거 같은데. 가업을 잇겠다는 결심도 자연스럽게 나온 건지도 모르겠네.’

“윤작가님, 자신감을 갖고 말하면 분명 괜찮을 거예요.”
“고마워요. 여기까지 같이 와줘서.”
“아니에요. 저 역시 데뷔했다가 어쩔 수 없이... 음악을 그만둘 뻔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해야 하나... 그런 사건도 있었고. 어찌되었든 저도 만약 그렇다면 진지하게 도와주고 싶어요.”
“네.”

윤과요조라가 대화를 끝내고 얼마 되지 않아 연갈색의 부드러워 보이는 가루가 든 유리병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유가 든 유리컵을 담은 쟁반을 양손으로 들고 나타났다.

“코코아 가루에요. 우유에 타서 드시면 돼요. 입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아~ 코코아 좋아하는데...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윤은 유즈리나가 내준 코코아 가루를 우유에  숟가락을 넣었고, 요조라는 한 숟가락을 넣고 우유를 스푼으로 천천히 휘저어 코코아를 전부 녹여냈다.
윤의 코코아는 짙은 갈색을, 요조라의 코코아는 옅은 갈색을 띠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유즈리나는 윤과 요조라가  찾아 왔는지 대략적으로 짐작이 갔다. 짐작은 갔지만 그것이 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굴러들어 온 기회를 다시 발로 찬 자신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줄 괴짜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 제 나름대로 하세가와씨에 대해서 조사해보았습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해서 전 소속사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는지도... 어디까지나 제가 모은 정보들로 인한 추측이라  과정에 대해서 성급하게 언급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이번에는 하세가와씨의 생각을 제대로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 그건 무슨...”
“계약의 이야기를 떠나서 하세가와씨가 음악을 정말로 그만둘 생각인지... 주변 상황에 의한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

유즈리나는 윤의 이야기를 듣고, 마치 가슴을 쾅하고 내리 찍는 듯한 그 말에 자기도 모르는사이에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전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하세가와씨의 노래를 듣고, 라이브하는 영상을 보고 이대로 끝내기에는  실력이 정말로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대로 이렇게 끝날 가수가 아니라고, 어쩌면 지금도 전국투어에 매진하며 누구보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야  애니송 가수라고... 그러니까 본심을 들려주세요. 하겠다고만 하면 제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서포트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정말 제가 어째서이러한 상황이 되었는지 정말 알고는 계신 건가요. 정말로...”
“네. 소위 말하는 음지에서 활동하던 애니송 가수. 니지이로 프로덕션에서 게약 해지.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알고 계시겠네요. 한 번 붙은 꼬리표를 떼는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리 포기하지 않으려고 해도... 바뀌지 않는다구요. 바뀌는  아무것도 없다구요.”

유즈리나는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 톤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지금 감정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챌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여태까지 하세가와씨가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을 거고 하룻밤 이야기로 끝나지 않을 고생들도 많이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기때문에 여기서 주저앉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분명.”
“조금만 더... ... ... 정말 잔인한 말이네요. 기약 없이 해야 하는 노력이 얼마나 길고, 힘들고, 아픈지...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하세가와씨.”

여태까지 이야기를 시작하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요조라는 유즈리나가 잠시 숨을 삼킨 틈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저도 음악을 그만둬야 할 뻔한 시기가 있었어요. 흔히 말하는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데뷔 앨범까지 나왔었지만 가요계 데뷔가 무산되었어요. 그때 저도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른 일을 찾았었어요. 하지만 역시 음악은... 포기할 수 없었어요.”

‘요조라...’

윤은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서, 유즈리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픈 기억을 이야기하는 요조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조라는 얼핏 보면 담담한  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윤은 그러한 겉모습이 아니라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요조라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그때 그만두지 않고 억지로라도 앞으로 나아갔었던 건 정말 잘했다고 있어요. 만약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전 분명 똑같이 할 거예요. 지금 당장은 괴로울지도 몰라요. 분명 괴로울 거예요. 하지만 여기 있는 윤작... 아니, 윤 프로듀서님을 한 번만 믿어봐 주세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해주신 분이니까요.”
“... 지금 여기서 꼭 성공할 수 있다는 약속은 할  없어요. 그렇지만 만약 아직 음악에 미련이 남아있다면, 음악을 계속하고 싶다면... 제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해서 서포트해 드리겠습니다.”

윤은 분명 둘만 있다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얼굴에 있는 그대로 드러냈을 요조라의 발언을 일단은 가슴  깊은 곳으로 묻은 뒤에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긍정적인 거죠. 지난 수년간의 노력으로도 하지 못했던 일을 앞으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지난 수년 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말씀드릴  있는 겁니다. 여태까지의 노력을 없었던 걸로 하지 말아주세요.  노력도 분명 하세가와씨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분명 어떠한 형태로든 보답을 해줄 테니까요. ... 결코 강요는 하지않겠습니다. 저는 그저 하세가와씨의 본심을 듣고 싶어서 왔을 뿐입니다.”


윤의 마지막 말까지 들은 유즈리나는 아랫입술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깨물며 고개를 밑으로 약간 숙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