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제 5화 : 정령과 동물. 그리고 사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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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들다."
"불평하지 말라고. 멋대로 따라서온 건 너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팔색조의 둥지는 무사히 재건할 수가 있었다.
민정이 팔을 굽혔다 피기를 반복하며 먼 산만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진과 메이는 근처 산속에서도 비교적 기온이 따스하며 천적으로부터 공격이 덜 받을 만하고 팔색조가 지닌 보호색과도 잘 어울리는 장소를 물색해주었다. 물론, 둥지를 짓는 과정까지도 전부 손수 도와주어 팔색조 부부가 둥지를 짓는 속도의 10배는 빠르게 둥지를 완성했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새끼들까지 그 안으로 무사히 이주시켜주었다.
"계속 알만 들고 있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원래 둥지는 하루 종일 짓는 거야. 나하고 메이가 도와주었으니 망정이지. 그거 조금 든 거로 너무 불평하지 말라고."
"... 그거 조금이라고요?"
민정은 진의 마지막 한 마디에 발끈했다. 애니매이션틱하게 표현하자면 '머릿속에 있는 줄 하나가 '팅'하고 끊어진 뒤에 이마에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다이아몬드 형태로 핏줄이 서면서 눈꺼풀에 힘줄이 마음껏 떨리고 있다.'이 되겠다.
"저녁이 되기 전에는 내려왔잖아. 만족하라고."
"네... 저녁 되기 전에는 내려왔죠."
"원래는 저녁까지 거기 있었을지도 몰랐다고."
"... 지금을 저녁이라고 하지 않나요."
민정은 캠퍼스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7시 27분...”
“아직 저녁은 아니네. 여름이라면 해가 아직도 중천 일 시간이라고.”
“대충 계산해 봐도 3시간은 들고 있었을 텐데요.”
진이 민정에게 시킨 행동이 좀 심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민정은 그 3시간이 지루했을 뿐이지 체력적으로 힘들다거나 그러지는 않았었다. 진이 미리 나누어 준 ‘유’의 힘 덕분에 민정은 근육통의 ‘근’자도 구경을 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기분상의 문제였다.
"넌 네 의지로 알을 들고 있어 준다고 한 거잖아?"
"그건 그랬지만요. 그래도..."
"중간에 내팽개쳐 둘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있었어. 맞지?"
"네. 그건 맞지만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팔색조가 고마워서 주변을 날아다니니까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잖아. 팔색조에게는 가끔 놀러 오겠다고까지 말했으면서."
"그... 하아~ 됐어요."
민정은 이 이상 말해봐야 자기 입만 아파질 거로 생각하고 하려던 말을 전부 집어 삼켜버렸다. 안 그래도 정신적으로 지쳤는데 체력적으로까지 지치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정에게 있어서 오늘하루가 불만족의 연속은 아니었다. 천연기념물인 팔색조를 직접 보고, 만져보았다. 거기에 무엇보다도 동물과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특별한 경험에는 대만족하고 있는 중이었다. 현실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 70억 인구 중에 자신 혼자뿐일 거라고 123%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과 민정이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경상대학교 건물을 지나 제일 꼭대기에 있는 교내 셔틀버스 정류장을 지나칠 때였다.
"응?"
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로 가져갔다. 평소라면 한 번 끝났을 핸드폰 진동이 일정 간격으로 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요? 또 누가?"
"아니야. 전화야 전화."
민정은 진이 걸음을 멈추자 또 다른 동물들이 불러서 멈췄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에 진은 전화가 왔다며 핸드폰을 한 번 흔들어 강조해 보이고는 액정에서 깜빡 꺼리는 초록색 버튼을 화면 밖으로 밀어냈다.
"여보세요?"
[나다.]
"오~ 노예. 1호."
[... 누가 노예냐!!]
"유나씨 전화번호가 분명히 010-294..."
[아니얏! 노예야! 노예라고! 젠장 할...]
"그렇게 나와야지. 것보다 무슨 일인가?노예 1호."
[칫... 복구했어.]
"복구했다고? USB 안에 자료?"
[그래. 그 USB 안에 자료 말이다.]
"오. 기특하구만. 그럼 상으로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입에 담지 않기로 하지."
[아니. 잠깐만... 네 녀석 성격상 말 안 하고 나중에 혼자 알았다가는 분명 가만 안 있겠지.]
"뭔 소리야?"
[자료를 다 복구하지는 못했어. 일부자료는 싹 다 날아...]
"축하한다. 노예 1호. 귀하는 솔로 부대 훈련병으로서 5주간 지옥 훈련을 받으면 된다."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했잖아!!!]
"낚시질의 죄는 무겁다고. 엉?"
[네가 이야기를 끝까지 안 들은 것뿐이 잖앗!!!]
"오~ 너 태클 거는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그런 칭찬 받고 싶지 않다고. 이게 누구 때문인데... 아무튼 복구시킨 자료도 거의 어거지로 복구시킨 거라고.]
"... 뭐, 됐어. 어차피 그다지 기대도 안 했었으니까. 얼마나 복구됐는데?"
[50% 정도? 나도 파일은 내용까지는 확인 안 해봤으니까 확인해봐. 메일로 보내 놨다.]
"알았다. 수고했다."
[아, 진짜. 다음부터는...]
"그러면 USB는 조립해서 택배로 부쳐라."
[뭐? 택배? 야, 얌마!! 그건 무슨!]
"택배 몰라? 우편물이나 짐, 상품 따위를 요구하는 장소까지 직접 배달해 주는 일을 일 컷 는다."
[누가 말의 정의를 물어봤냐!!! 내가 왜 택배를 보내야 하는데! 네가 가지러 오라고!!]
"010-2943-984...."
[아! 진짜!! 알았다고!!]
"되도록 빨리 보내라."
[크... 젠장 대체 그건 어디서 알아가지고! 이걸로 회사 연수 이야기는 끝이다! 알았지?!!]
"그래 생각해보마. 노예 1호. 아, 착불로 보내면 가만 안 둔다."
[야, 얌마 내가 왜 돈...]
진은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비명과 비슷한 교철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우아... 누군지는 몰라도 불쌍하다.'
옆에서 전화 내용을 언뜻언뜻 엿듣고 있던 민정은 전화하는 상대방에게 애도 아닌 애도를 표했다. 평소 자신에게 하던 태도의 2배, 아니 10배. 여태까지 자신에게해왔던 까칠까칠한 말투는 새 발의 피라는 점을 깨닫고 앞으로의 처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까지 되었다.
"놀리는 보람이 있는 녀석이라니까."
"그런 보람은 안 좋아요."
"그럴만하니까 그러는 거야. 것보다 USB 안에 자료 복구했다고 하네."
"정말로요?!"
"어. 50% 정도 복구되었대. 그 50% 범위 안에 족보가 들어가 있기를 빌어야지. 일단 컴퓨터 실로 가자고."
"네!"
민정은 예상 밖에 들어온 희소식에 자연대학교로 향하던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고 진 역시 그 걸음 속도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평소 걸리는 시간보다 절반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자연대학교 컴퓨터실에 도착한 진과 민정은 모니터에 전원이 들어와 있는 컴퓨터를 순식간에 찾아내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진은 민정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터넷 창을 열고 E-mail 계정에 로그인했다.
"그런데 그 USB에 족보 말고 다른 자료도 많아?"
"네? 아뇨. 거의 없어요."
"다른 과목 족보도 있는 거지?"
"네."
"그러면 어떤 과목인지는 몰라도 그 족보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겠네."
"아마... 도요."
민정은 쇠한 기분이 정수리에 내려앉자 양어깨를 떨었지만 그 이유를 곧바로 깨닫지 못하고 모니터 안에서 움직이는 마우스 포인터만 주목했다.
"JPEG파일? 족보 스캔본이었어?"
"그러니까... 네. 그런 스캔본도 있고 워드로 된 것도 있을.... 잠깐만요!"
"어? 왜?"
진은 민정이 제동을 걸자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손가락은 더블 클릭을 마친 뒤였다. 포인트가 올라가 있던 곳은 메일 가장 위에 있던 의문의 JPEG의 파일. 컴퓨터는 사용자가 명령을 내린 대로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아...아..."
"뭐야? 모니터에 귀신이라도 나왔...어?"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린 진은 말문이 막혔다. 여태까지 무슨 상황에서라도 얄미운 말을 톡톡 쏴주던 그 입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딱 붙어버렸다.
모니터에서 비추고 있는 것은 요전 민정이 남몰래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 파일. 절친인 신희와 초이에게 까지 비밀로 하고 있던 그 문제의 파일. 아니, 사진. 절대로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그 사진이 띄워지고 있었다.
"아...아...."
거기다 하필이면 그 문제의 사진 중 가장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사진. 다시 말해 여행 갔을 당시 술을 마시고 괜히 분위기를 타 혼자서 거울의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안에 민정은 민낯에 편하게 티셔츠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뭐... 여기까지라면 민정이 뜻이 담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래쪽. 발가락 끝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허벅지부터 티셔츠까지의 공간에도 겉이라고 불릴만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하의는 시원한 속옷 차림이었다.
“아...”
요즘 같은 세상에 이 정도보다 수위가 높은 사진이나 동영상은 쌔고 쌨다. 진과 민정이 사는 이 나라는 성인 인증하느냐면 성인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 강국이니까. 진도 아마 그냥 집에서 우연히 이 사진을 봤다면 '아~... 뭐지?'라며 잠시 보다가 넘겨 버렸겠지만 역시 문제는 그게 아는 사람이고 그걸로도 모자라 본인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
진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입술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본질이 성별 구별이 뚜렷하지 않은 정령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볼 것 못 볼 것 (?) 다 본 20대 남성이라고는 하지만 그 장본인이 옆에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상황이 주는 당혹스러울 저~얼~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진이 사고는 시간을 멈췄다. 시선은 그냥 모니터로 고정한 그 상태 그대로였고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도 어떻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의사 시간 정지는....
"꺄아아아아아앗!!!!!"
컴퓨터실을 뛰쳐나와 복도가 떠나가라 울려 퍼져 나가는 민정의 비명으로 인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