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제 11화 : 7월의 콘서트 (8)
*
“그랬단 말인가?”
“어. 겁나 귀찮았다니까. 거기서 그런 식으로 마주칠 줄 누가 알았겠냐. 꿈이라면 분명 악몽이었을 거다.”
진은 식탁 위에 있는 황금색 과자봉지에서 감자칩을 하나 꺼내 고기를 씹듯이 콱하고 깨물었다. 그러자 과자 CF에 출현한 모델이 감자칩을 씹었을 때와 같이 아삭거리는 소리가 거실 안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역시 그대들은 라케시스가 정해준 운명이라고 볼 수밖에 없구먼.”
“시끄러... 그 녀석 헤어지기 전보다 더 무대포가 돼서 돌아왔다고. 헤어질 때까지 얼마나 붙어있던지. 그 버릇은 어떻게 생이 바뀌어도 변하질 않아. 귀찮게 진짜.”
“난 충격 그 자체란 말이야. 어떻게 나나카가...나나카가... 나나냔 말이야!”
니마는 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인과 헤어지고 난 뒤 술을 마시고 주정을 하는 사람처럼 식탁을 탕탕 두들기며 말했다.
진과 세피는 식탁 위에 올려놓은 코코아와 커피가 엎어질까 싶어 재빨리 머그컵을 들어올렸다.
“니마, 그대에게도 재난이었겠구먼... 그건 그렇고 윤, 이건 경계해야 할 일이네.”
세피는 일순간 목소리에 무게를 실으며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분위기를 띠었다.
지금 진의 맞은편에 앉아 말을 하고 있는 존재는 장난치기 좋아하는 초등학교 2학년이 아니었다. 수많은 세월을 보내며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지식을 축적해온 정령, 그 누구라도 현자로 존경하고 있는 ‘지혜의 흐름’이었다.
시선이 마주친 진은 일순간 표정이 굳어지며 들고 있던 머그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우연이라니까.”
“이 세상 모든 일에 우연이란 없네. 필연만이 존재할 뿐.”
“세피 말이 맞아, 윤. 나도 이번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솔직히 세피하고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나까지 만나버렸잖아.”
식탁에 엎어져 있던 니마는 고개만을 위로 들어 올려 진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진은 그 시선에서 하고 있는 행동과는 180도 다른 진지함이 느껴졌지만 ‘됐네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 시선을 가볍게 튕겨냈다.
“너까지 왜 그러냐. 그냥 우연이야. 우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아닐세. 지금 이러한 흐름이라면 당장 소아가 나타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여겨지네. 실은 자네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겐가? 마음 그 깊은 곳에서는 말이네.”
“필연으로 보이는 우연도 세상에는 존재해.”
“윤.”
“알았어. 알았어. 우연이 아니라고 쳐. 라케시스의 농간이라고 치자고. 하지만 그렇다고 예언이 꼭 현실로 나타나리라는 법은 없어. 예언은 어디까지나 예언일 뿐이야.”
말을 마친 진은 머그잔에 들어있던 코코아를 전부 마신 뒤에 싱크대 안에 있는 대야에 집어넣었다.
머그잔이 대야에 빠지며 난 풍덩 소리가 일순간 찾아온 정적 사이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렇지만 이 소리는 정적에 먹혀 금세 사라져버렸다.
“만물로 이어지는 인연이 완성되는 그때, 북극성은 더욱더 밝은 빛을 발하며 초신성이 되리라...”
여태까지 니마와 세피의 모든 말을 건성건성 받아내던 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싹 하고 굳어버렸다. 그 표정은 세피나 니마만큼이나 진지하고, 무겁게 바뀌어 있었다.
“애초에 그 예언이 우리들인지 어떤지 확실하지도 않잖아. 만물로 이어지는 인연이라는 것도 우리들일 확률이 높다는 것뿐이지.”
진은 보여주고 있는 표정만큼이나 침착하게 세피의 그 한 마디를 반박했다.
“그럴지도 모르네. 그 예언이 우리라고 정해지지는 않았네. 그렇지만 윤, 그대는 다르네. 예로부터 정령은 별에 많이 비유됐었고 그 별 중에서도 늘 그 자리를 지키며 다른 존재들을 이끄는 북극성은 정령들을 이끈다는 의미에서 ‘정령의 안녕을 비는 자’를 의미하고 있네.”
“나도 알아...”
“그리고 초신성이 된다는 의미는 별의 죽음. 즉, 그대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로 이어지네.”
“소아가 우리의 안녕을 빌어주고 있는데 존재성이 위협받을 리는 없잖아? 거기다가 나는 모든 정령에게 존재성을 보장받고 있는 위치에 있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가 ‘오염’에 쉽게 당할 리도 없고.”
“하지만... 요근래에 ‘오염’에게 삼켜질 뻔했던 일이 있지 않았었던가.”
“그건... 니마를 믿었으니까, 니마를 믿었으니까 그렇게 한 거야. 만약 내 존재가 위협받는다는 확신이 들었다면 민정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니마하고 강제로 탈출했을 거라고.”
“그렇다면 그 일은 그렇다고 함세. 그렇지만 정령은 원래 그 존재 자체가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존재일세. 오로지 구상의 힘에 의해서 태어나고 살아가기에 항시 존재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과언이 아니겠지.”
“과언이라 생각하는데.”
자리로 돌아온 진은 황금색 과자봉지 안으로 손을 뻗었지만 과자가 한 번에 잡히지 않자 과자봉지를 들어 눈으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칫... 벌써 다 먹었네. 질소값만 받아먹는 녀석들 같으니.”
과자봉지로 세피의 시선을 차단하고 딴청 부리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예언의 이야기를 하기 싫어한다는 것이 티가 나는 행동이었다.
“윤! 세피는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잖아.”
“...나도 알아. 세피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걱정이 되니까 이런 말을 해주는 거겠지. 다 안다고. 하지만 지금은 좀 지나치잖아. 지나쳐서 좋을 건 없다고.”
진은 여전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니마의 머리를 과자를 집지 않았던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소아하고는 간접적으로나마 연락을 취하고 있어서 절대로 만나지 않도록 하고 있어. 아니, 애초에 만물의 인연이 뭔데. 그게 우리들을 뜻하는 거면 진작 예언은 실현 되었어야 한다고. 우리들은 이미 강한 인연으로 묶여 있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아니네. 그대에게는 이미 변화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네. 그것을 본인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네.”
“그런 표정으로 말하지 마. 네가 의미심장하게 말하면 무섭단 말이야...”
진은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보려고 온몸을 부르르떠는 시늉까지 해봤지만 분위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주의하자는 거잖아. 여튼, 나나는 콘서트가 끝나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거야. 결국 그 예언의 요점은 우리 모두가 모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니까.”
“...”
“그리고 무언가 변화가 감지되면 곧바로 알릴 테니까. 설마 자기 자신에게 변화가 오고 있는데도 눈치채지 못하려고. 안 그래?”
“정말이지? 꼭 말해줘야 해.”
“알았다니까. 거기다 내가 이상하게 변하면 말 안 해도 눈치채잖아.”
“그건... 그렇지만.”
“흐음, 알겠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여기서 그치겠네만... 여기에 있는 여도 니마도 그대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알고 있어. 나나도. 어딘가에 있을 소아도 같은 마음이겠지. 그런 건 말 안 해도 충분히 알고 있고 느끼고 있으니까...”
진은 거실에 있는 창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만에 하나를 위해 여는 나나와 만나지 않겠네.”
“알았어. 안부만이라도 확실하게 전해 줄게.”
“부탁하겠네.”
세피는 들고 있는 잔을 입으로 천천히 가져가 그 안에 남아있는 커피를 조용히 마셨다.
*
“으~ 더워.”
“아낙. 그 녀석은 시원한데도 많은데 왜 굳이 여기서 보자고 한 거야.”
뙤약볕, 이 이외에는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따가운 햇볕 아래 니마와 진은 나란히 서 있었다. 니마는 조금이라도 햇볕을 피하고자 그늘진 곳으로 피신했지만 몸에서 뿜어지는 열기와 콘크리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인해 체감 온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으...으... 더는 못 참겠어. 윤! 우리 저기라도 들어가 있자.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아.”
“좀만 참아. 시간도 다 됐고. 우리들이 저기 있다가는 나나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잖아.”
“그래도... 그래도... 이번 생에는 윤의 전투력이 더 쌔잖아?”
“무슨 배틀 만화냐. 그 녀석 분명 이런 태도에 익숙해지면 또 예전과 같이 굴 거라고. 여태까지 그렇게 겪고도 모르냐?”
“분명 그렇겠지만... 그것보다 윤.”
“어?”
“나나가 나타났다고 해서 나나를 따라가거나 하지는 않을 거지?”
“더위라도 먹었냐. 내가 그 녀석을 왜 쫓아가.”
진은 눈에 힘을 풀며 무슨 한심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니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번 생의 취향은 작고 귀여운 여자애잖아. 나같이...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나 역시 인형같이 귀여운 편이고. 거기다 하는 짓도 귀여움이 철철 묻어나오고.”
“뭐... 나나가 이번 생의 이상형에 가깝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 정말?!”
니마는 그늘에서 벗어나 진을 향해 바짝 다가섰다. 아니, 서로의 열기가 서로에게 거의 100% 전달될 정도로 몸을 밀착시키며 진의 얼굴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진을 올려다보는 니마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리며 불안함을 한껏 표현하고 있었다.
“끝까지 들으라고. 이상형에 가깝다는 건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그 녀석은 일본에서 톱을 달리는 연예인이야. 그런데 일반 대학생이. 그걸로도 모자라 한국인인 나랑 이어지게 된다면 그냥 소동으로는 안 끝날 거라고.”
“그럼 나나를 결혼 상대로 생각하고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닌 거지? 그런 거지?”
“생각하기는커녕 상상해본 적도 없어. 어차피 그 녀석은 이번 콘서트가 끝나면 일본으로 돌아갈 거고 이번 생에서의 인연은 그걸로 끝이야. 나중에 일본에 갈 테니 우연히 만난다면 만날 수도 있겠지만. 아니, 애초에 2번 만난 상대량 결혼할 수 있겠냐. 아무리 나나라고는 하지만 우리 둘은 사는 세계가 달라. 여튼, 떨어져.더우니까.”
“응... 후~ 다행이다.”
니마는 진에게서 두 발자국 물러선 뒤에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말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어~~가?!”
“나, 나나?!”
“뭐? 우, 우악!!”
진과 갑작스럽게 들린 나나의 목소리에 놀라는 것도 잠시, 등 뒤에서 양팔로 고리를 만들어 목에 매달리는 나나의 행동을 버티기 위해 상체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는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뒤로 고꾸라지는 추태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야, 야! 목! 목! 목 꺾인다고!!”
몸무게 실어 매달린 탓에 이대로 버텼다가는 목이 꺾이거나, 부러지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에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에이~ 이렇게 건장한 남자의 목이 그렇게 쉽게 꺾일 리가 없잖아.”
“꺾인다고. 인마!”
“사람은 그렇게 간단히 죽지 않는다구.”
“풀어! 풀라고!!”
“음~ 그렇다면...”
나나는 이대로 가다간 진이 또 저번처럼 까칠하게 화를 낼 거라는 생각이 들자 어떻게 하면 자신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약 1.5초, 나나는 걸고 있던 팔걸이를 풀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크... 너 말이야. 진...”
“에잇!”
“컥!”
나나에게 따끔하게 한소리를 하려던 진은 2번째 기습에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땅에 내려왔었던 나나가 발로 바닥을 차며 진을 향해 날아올라 자신의 목에 또 한 번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나나는 진에게 최대한 밀착하며 강제 어부바(?)를 시전 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이 무더위에 뭐 하는 짓이래.’라는 핀잔이 절로 나올 정도로 찰싹 달라붙었다.
“야! 얌마!!”
“헤헤~아~ 역시 윤의 ‘유’의 힘은 언제 느껴도 기분이 좋아~”
“기분 좋고 뭐고 더워 죽겠다고! 달라붙지 마! 떨어져!! 떨어져!!”
“에이~ 나한테서 좋은 향기 나지 않아?”
“... 좋은 향이고 뭐고. 무거...”
“헤헤~ 지금 나한테서 나는 향기 맡은 거지? 그렇지?”
“아, 아니야! 떨어져!”
진은 정곡을 찔리자 일순간 얼굴을 붉히며 나나를 떼어내기 위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나에게 휘둘릴 일이 없다고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도 저런 식으로 하면 이번 생의 윤을 마음대로...’
그렇게 나나의 장난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
이던 니마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어서 떨어져 나나!!”
너무나도 사이가 좋아 보이는 그 모습을 참지 못하고 결국 나나와 진을 떼어 놓기 위해 두 팔 걷어붙이고 달려들었다.
그러고 약 10분 뒤.
“아낙... 더워 죽겠네.”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진, 니마, 나나는 유명한 커피 전문 체인점에 들어와 있었다.
진은 에어컨 바람 아래서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며 땀을 식혀 나갔고 니마는 조금이라도 열기를 빨리 식히기 위해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기 시작했다. 제일 많이 움직인 나나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기색을 내보이며 빨대로 바나나 주스를 마음껏 흡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