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제 15화 : 유렵가
가을과 겨울의 경계 선상에서 아주 약간이지만 저울추가 겨울로기울어지는 시기인 11월 중순.
“으~”
진은 근처 대형마트에서 저녁 찬거리를 양손 가득 사고 귀가하는 중이었다.
‘겁나 춥네. 겉옷이라도 걸치고 나올걸.’
진은 초저녁의 쌀쌀한 기운이 소매와 옷깃을 통과해 속살까지 자극하자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합격결과도 확실히 나왔고. 이제 남은 건 집 구하는 것뿐인데. ... 물가가 장난이 아니라고 했단 말이지, 그 동네.’
진은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 앞에서 아주 잠깐 멈춰선 다음에 왕래하는 자동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건널목을 건넜다.
‘뭐, 암튼. ... ?’
진은 건널목을 건너고집이 있는 골목으로 진입하려다 바지 주머니 넣어둔 핸드폰의 진동을 느낀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멈칫거렸다.
“... 지금은 아직 안 돼. 조금만 더 참아. 한국 속담에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말이 있어.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조금 더 참아.”
진은 만약 근처에 누군가가 지나가고 있었다면 자기에게 말을 걸었나 싶어순간 멈칫거릴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혼잣말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혼잣말은아니었다. 대화 상대는 확실히 존재했다. 단지, 그 상대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샀잖아. 딸기우유.”
‘나 참, 진짜 딸기우유 못 마셔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딸기우유 진짜 좋아하네.’
진은 평소에는 잘 사지 않는 딸기우유가, 그것도 4+1로 구성된 한 팩이 장바구니안에 제대로 들어 있나 확인한 뒤에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어디 있어.
“응?”
가로등만이 쓸쓸히 비추고 있는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던 진은 또 한 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뭐지? 방금 목소리가. ... 기분 탓인가?’
진은 청력이 일반인 수준으로 확실히 낮아져 있는지 다시 한번 체크하고는 멈췄었던 걸음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
-지금 어디야?
... 하려다 집 근처 야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착각이 아닌데. 분명 익숙한데... 익숙한 목소리인데... 화신은아닐 거고. 정령인데. 정령... 아, 정말. 이런 거로 ’유‘의 힘쓰기 싫구만.’
진은 ‘유’의 힘을 발동시켜 지금 인생의 머릿속에 없는 타인의 기억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뒤지기 시작했다.이러한 진의 머리카락에서는 옅은 푸른빛이 은은하게 퍼져 나와 수증기가 와해 되듯이 현실에서 사라져갔다.
그러길 약 30초, 진은 원하는 정보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기억으로부터 끌어내자 순간적으로 장바구니를 놓칠 뻔했다.
‘소아... 미친, 내가 이 목소리를!!’
진은 두 다리를 ‘유’의 힘으로 무장시키고 목소리가 들려 왔을 야산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지금?!!’
진은 분명 아메리카 대륙 어딘가에 있어야 할 소아가 지금 이 근처에 있는 거로도 모자라 위험에 처해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떠밀려 그 움직임에 가속에 가속을 거듭했고... 지금 쌀쌀한 밤하늘을 지나가고 있는 건들바람보다 더 빠르게 야산 입구에 도착했다.
“소아!!! 너 있는 거냐?!! 있으면 대답해!!!!”
진은‘뜻이 담긴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분명 이 동네 주민들이 전부 집 밖으로 뛰쳐나올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아니, 사자후를 뿜었다.
-여기...
어느새인가 청력을 최대치까지 키운 진은 소아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마자 그 장소를 대략 특정해내고 예민해 질대로 예민해진 후각과 수리부엉이 못지않은 시야의 서포트를 받아 야산을 제집 안방 드나들듯이 가로질렀다.
진을 자신들을 사냥하러 오는 야생동물로 오해한 작은 초식동물들이 도망치는 가운데... 진은 집이 내려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산골짜기에 도착했다. 골짜기라고 표현을 했지만 산등선과 산등성 사이에 있는 좁은 협곡 같은 곳이었다.
‘어디지? 분명 여기 어디인데.’
진은 혹시라도 놓칠까싶어 협곡을 시선으로 샅샅이 훑으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길 약 1분, 진은 졸졸졸 흐르고 있는 시냇물 옆에 쓰러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그 옆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 쓰러져 있는 무언가는 이런 야산에는 절대로 있을 리가 없는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소아! 소아?! 소아, 너 맞아?!”
“...”
진은 소아로 추정되는 인물의 어깨를 들어 올렸다. 들어 올렸는데...
“?!”
순간이었다. 쓰러져 있는 무언가는 일순간 자신의 색을 그림자처럼 새까맣게 채우더니 일순간 고무줄이 늘어나듯이 그 부피를 수십 배로 팽창시켰다.
‘뭐야? ‘오염’? 아니야, ‘오염‘이었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진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발생하자 지금 이곳에서 바로 벗어나야 한다는 상식적인 판단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을 덮치고 있는 정체불명의 그림자 정체를 추측하면서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검은 그림자는 진을 완전히 집어삼키는가 싶더니 팔과 다리, 몸만을 포박하는 것으로그쳤다. 포박이 완전히 끝난 그 모습은 마치 머리가 엄청나게 작은 오뚝이 같았다.
‘뭐야, 이거.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데... ‘오염’은 확실히 아니고. ... 설마, 유렵가? 젠장.’
진은 온몸에 털이 삐쭉 서는 감각과 함께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고는 황급히 성대에 ‘유’의 힘을 둘렀다. 그리고 지금 이 마을에 살고 있을 세피와 자신의 사역마인 메이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
‘목소리가 안 나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의 힘을 담은 ‘뜻이 담긴 목소리’는커녕 일반적인 목소리조차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완전 당했다. 설마 소아를 미끼로... 소아가 당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 나중에 두고 보자!’
진은 이렇게 된 이상 실력행사로 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 ‘유’의 힘을 강제적으로, 무리하게소비해 검은 그림자 내부에서 폭발을 일으키려 했다. 그렇지만 이 역시...
‘... 망했다. 이거 진짜 위험한데?’
‘유’의 힘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구상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동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진은 검은 그림자를 완력으로 빠져나가 보려고 발버둥 쳐보았지만 검은 그림자는 진이 팔다리를 뻗으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진이 힘을 빼면 다시 수축을 반복하면서 잡은 먹잇감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쿡쿡쿡쿡쿡.”
진은 상대방을 비웃는 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 소리의 발신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간단히, 간단히 걸릴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이렇게 대물이!!”
진은 앙상해진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쬐고 있는 달빛 아래에 서 있는 인물을 향해 의식을 집중했지만그 빛이 워낙에 옅은 터라 자신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 여자... 아니, 남자? 허스키함이 가득 묻어나오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아, 정말 웃음이 멈추질 않아. 정령의 왕이라고? 모든 정령의 왕이라고? 이런 걸 잡아먹으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짐작조차 안가! 안 간다고!!”
정체불명의 인물은 기분 나쁜 웃음을 섞어가며 여유가 흘러넘치는 태도로 말을 했다.
“너무 재밌어, 너무 재밌어. 너무나도.”
‘완전히 맛탱이가 가버린 타입인 거 같은데. 하필 걸려도.’
“자아, 자아, 자아! 이제 너만 먹으면 자연계 정령들도 상대가 안 되겠지. 그러면, 그러면 나는,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정령을, 정령을 먹어 치울 수 있어! 캭캭캭캭캭캭!!! 웃음이 멈추질 않아!!!”
‘미친 새끼. ... 할 수 없지.’
진은 이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정령을 사냥하는 유렵가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것 하나뿐, ‘유’의 힘을 제한하는 이 정체불명의 그림자 따위에 당황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라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자~ 자~ 자~ 왕의 ‘유’의 힘은 어떠한 맛일까? 어떤 맛...”
정체불명의 유렵가는 그 말을 끝까지 이어나가지 못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는 ‘유’의 힘을 제한당해 꿈틀꿈틀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력한 정령은 온데간데없고 협곡 안을 그림자로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신수가, 한국의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환상종인 해태가 그 늠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태 특유의 구름을 그대로 붙여넣은 듯한 털 뭉치가 달빛을 이곳저곳으로 반사 시키며 어두운 협곡에 빛을 드리웠다.
“어째서, 어째서!‘정령의 안녕을 비는 자’가 동물로 변하는 거야? 동물로 변하는...”
-쿵!
진은 이렇게까지 상황이 역전되면 여태까지 자신을 깔본 상대에게 한 마디 쏘아 줄 법도 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짓은 일절 하지 않고 앞발로 유렵가를 사뿐히(?) 즈려밟아주었다. 비록 함정이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을 일순간에 무력화시킨 그 능력을 높이 샀기에 유렵가가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기 전에 재빠르게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이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실천으로 옮긴 것이었다.
‘현실은 만화 따위처럼 대사 읊을 동안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 ?’
진은 찍어 누른 뒤에 앞발에서 느껴져야 할 기분 나쁜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자 앞발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확실히 밟은 감촉은 있었는데... 밟은 뒤에 없어졌단 말이지. 일단 도망친 것 같은데.’
진은 유렵가가 도망쳤다는 사실이 아깝다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안도하기도 했다. 만약 이곳에서 유렵가와 정면충돌해 전투를 벌이면 100%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시 습격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일단 야산 입구까지 이대로 가고 거기서부터... 아낙, 장 본 거 다 엎어졌네.’
진은 방금 자신이 바닥으로 내팽개쳤었던 저녁 찬거리와 간식거리들이 계곡 옆 자갈밭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