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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1장. 사후 세계로(3) (3/155)



〈 3화 〉1장. 사후 세계로(3)

소녀가 즉각 눈을 뜸과 동시에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그만 뒤로 엉덩방아를 찍으며 나자빠지고 말았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 데다 더불어 해진 직후 푸르스름한 숲의 어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는 영문을 모른 채 잠시 멍하게 앉아 있다가 서둘러 일어났다. 백희의 마법에 깜짝 놀란 건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크게 놀란 티를 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기 사이로 들려오는 부산한 소리가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 망할 너구리! 너지!”

잔뜩 성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숲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소녀는 아까보다 좀 더 굵고 뚜렷해지긴 했지만 백희의 목소리라는 걸 바로 눈치챘다. 곧이어 백희가 호탕하게 웃어대서 혼자 화내고 혼자 웃어대는 꼴에 그녀는 당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흰 섬광이 번쩍하더니 검은 연기를 순식간에 몰아내고 푸르른 저녁 숲을 밝혀냈다. 밝은 조명이 비치는 숲 한가운데 여우는 온데간데없고 백발의 청년 둘이 마주 보고 서있었다.
청년이 새하얀 도포 위에 차려입은 세련된 분홍색 쾌자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화수가 놓아져 있고 화려한 장식을 줄줄이 드리운 허리띠로 여며져있었으나 한 번 흙바닥에 뒹군 터인지 하얀 소매엔  얼룩이 묻은 데다 옷이 온통 구겨져서 안타까워 보일 지경이었다.
청년은 한  보면 눈을 쉽사리 떼지 못할 거라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미남이었으나 분노와 당혹감에 휩싸인 표정 때문에  순간은 잠시 미모가 퇴색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 위로 소녀에 눈에 익은 쫑긋한 귀가 나 있었지만 지금 그 귀는 한껏 뒤로 젖혀져 자신의 감정을 명백히 표출하고 있었다. 그가 백희란 건 한눈에 알아보았다.
다만 소녀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던  백희의 맞은편에 똑같이 산발을  백희가 또 있었다는 점이다.


“내 일을 방해하다니! 이번 건 절대로 용서 못 해, 망할 너구리!”

“내가  말을 흉내 내지 마!  이건 선 넘는 짓이야!”


“무슨...!”


두 백희가 서로에게 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분노에서 경악한 표정으로, 그러다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다시 어이없음에 화가 난 표정으로 서서히 변하는 게 둘이 아주 판박이였다. 소녀는 멍하게 완벽히 똑같이 생긴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죽여 버릴 거야!”

 백희가 짐승의 울음소리인지 사람의 말소리인지 분간이 잘되지 않을 정도로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듯한 비명소리를 냈다. 소리를 내지른 것은 전혀 진정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는 점점 더 화가 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발을 쾅쾅 구르고 맞은편 자신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거라고! 내가 널 마지막으로 봤을 때 뭐라고 했었지?”

“너... 그건...! 나인 척하지 마, 사악한 너구리!”

“이번에는 내 사람에게 해코지 못 해!”


“난, 길 잃은 영혼이 다치게 둔 적 없어!”


맞은편의 백희도 분노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푸르고 서늘한 공기에 열기가 가해지는 느낌이 들어 소녀는 점점 두려워졌다. 그녀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기운이  공간을 가득 채운 듯했다.
그녀의 코앞에서  악마가 분노에 가득 차 당장이라도 붙어서 싸움을 벌일 태세였다.


“내 일을 모욕하다니! 이러고서도 내가 널 가만히 둘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야, 너굴민!”

“내가 할 말을...”

백희가 말하다 말고 발을 동동 구르며 답답함을 표했다. 너무 억울해서 말이 입술 밖으로 넘어가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숨을 몰아쉬던 다른 백희가 고개를 들어 뒷걸음질 치고 있던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백희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녀는 잘못이라도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말하는 백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화가 잔뜩 나 있지만 한결 부드러운 어조였다.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해. 이 녀석은 아마... 아니 딱 봐도  망할 너구리 악마야. 다른 이들에게 장난을 치고 환상을 보여주는  지 삶의 목표인 나쁜 새끼야. 이런, 욕해서 미안해. 그냥 이놈은 쓰레기야-”

백희는 말을 빠르게 내뱉고는 다시 백희를 보며 쏘아붙였다.

“-너를 좋아하는 이는 이 영혼 세계 어디에도 없어.”


“넌 네 입으로 그런 말하기 부끄럽지도 않니? 친구 없는 걸 스스로 알고 있긴 하구나.”

백희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비웃음 섞인 대답을 했다. 두 남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쏘아보기만 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적대감이 소녀에게도 여과 없이 흘러들어와 드러난 어깨를 긴장하게 했다.


“난 일하는 중이고 네 장단에 어울려 주진 않을 거야.”


마침내 백희가 적대적인 고요를 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녀에게로 몸을 돌려 다가왔다. 그녀가 상황을 이해하고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다른 백희가 바람같이 달려 들어와  사이를 갈라섰다.


“지금 나인 척하면서 누굴 데려가려는 거야?”


“나는 당연히... 너...”

백희는 말을 하다가 순식간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이제 그는 방금 전처럼 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분노한 건 아니었으나 대놓고 완전히 역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저렇게 잘생긴 사람도 표정을 자유롭게 짓는구나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가 바로 뜬금없다며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살짝 힐난했다.


“말도 안 돼. 이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장난이야. 도대체 이런 짓을 해서 얻는 게 뭔데?”

“네가 하는 말에 휘둘리지 않아.”


다른 백희가 소녀의 팔을 잡아서 자기 쪽으로 끌었다. 이에 질세라 백희도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그녀가 냅다 소리를 지르자 화들짝 손을 떼려고 하다가 완전히 떼지도 못하는 애매모호한 행동을 했다.

“그만, 됐어! 둘 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진짜 백희라도 매한가지야,  건드리지 마!”


 백희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소녀의 눈치만 살폈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쳐서 완전히 똑같이 생긴  남자에게서 살짝 멀어지며 말했다.

“둘 중 누가 진짜 백희인 지는 중요한  아니야. 중요한 건 내가 마을에 들어가는 거지. 마을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 줘.”

“현명해!”


“안 돼!”

처음으로 두 백희가 상반된 반응을 보여서 소녀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백희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가 잽싸게 한 명에게 물었다.

“왜 마을로 가면  된다는 거지?”


“너굴민은 온갖 환각을 지어내는 데에 특출난 재능을 가진 악마야.  모습으로 둔갑한 걸 보면   있잖아. 전혀 다른 길로 안내하고서는 마을 풍경을 꾸며내서 충분히 너를 속일 수 있어-”


개인 반론 시간을 할당받자 백희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물론 나는 그 길로 가면 안 된다고 주장하겠지만 넌 내 말을 믿지 못하겠지. 당장 눈앞에 펼쳐진 마을로 달려가버리면 그걸로 끝나는 거야.
저놈은 사람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마법을 부리진 않아도 수법이 아주 악독해서 한 번 그의 환각을 멋모르고 믿어버리면 저 자식이 내보내줄 때까지 영영 환각 속을 헤매게 돼. 그런 지경까지 가면 아무리 나라도 바로 구해줄 수는 없어-”

백희가 폭풍같이 말을 하고는 다급하게 숨을 들이쉬고 큰 소리로 이어 말했다.


“-차라리 내가 여기서 저 자식을 끝장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직접적인 힘겨루기는 상대가 안 되는 놈이니까. 진짜 싸우자고 하면 쏜살같이 도망갈걸.”


“저 녀석 말을 듣지 마! 악마의 싸움에 너를 휘말리게  작정이야.”

다른 백희가 눈썹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그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기세로 소녀에 곁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꼭 붙었다. 그녀가 되뇌었다.

“악마라고?”


“물론 악마지. 너굴민도, 그리고 나도. 아까 내 마기에 대해 물은 걸 마저 이야기 못 해줬구나.”

“아니야! 믿지 마! 난 악마가 아니야!-”

백희가 기겁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의 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에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해 소녀를 당황케 했다.

“-난 악마가 아니야!”


“지금  흉내 내는 거야, 설마? 진심으로 역겨워 죽겠어.”

다른 백희는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조소를 지었다. 굉장히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소녀는 곁눈질로 본 것만으로 순간 심장이 얼음장에 빠졌다가 다시 건져진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아예 팔짱을 끼고 붙어있는 백희를 살짝 떼어내려고 했다. 백희는 자신만만한 냉소를 지으며 맞은 편 자기를 바라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소녀가 자신에게서 슬슬 멀어지는 걸 눈치 채지 못 했다. 맞은 편 백희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점점 붉게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서늘한 두려움이 뚜렷이 서려있었다. 꽉 진 주먹을 덜덜 떨기 시작한 그는 잦아들어가는 비명 소리 비슷한  중얼거렸다.

“난 절대로... 내 일을 모욕한 데 더불어 나까지 모욕하려고 들다니...”


“모욕은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거지. 씨알도 안 먹힐 내 흉내를 지금-”

차가운 백희의 말은 다 끝내기도 전에 작은 폭발 소리에 묻혀버렸다. 얼굴로  불어오는 매캐한 검은 연기에 백희는 손을 크게 내저으며 어푸푸 거렸다.

“이 빌어먹을 너구리 놈이 흉내질이 여의치 않으니까...!”


백희는 크게 기침하고 손을 한 번 내저어 아까 그랬던 것처럼 검은 연기를 한순간에 걷히게 했다. 백희의 손끝에서 나온 희고 눈부신 여우불 여러 개가 높이 떠서 어두운 숲속을 환하게 밝혔다. 그러나 이미 푸른 숲속엔 그 밖에 없었다.
덤불이며 나무 덩굴이 소란하게 흔들리다가 점차 멎어들고 이내 숲은  막히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백희에게 그 어떤 때보다도 더 큰 두려움이 찾아들었다.

“안 돼... 안 돼...”

해가 진 깊고 어두운 숲속 흰 여우가 분노에 차 울부짖는 소리는 그리 멀리 퍼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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