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장. 사후 세계로(13)
국수집에 들어온 진은 메밀국수를 두 판 시켰다.
헤벌레 웃거나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거나 하지 않을 때의 진은 정말 곱게 생긴 미남이었다. 국수집의 다른 사람들이 낯선 그들을 어깨너머로 쳐다보았다.
호기심에 가득 찬 소곤거림을 적당히 무시하며 소녀가 진에게 물었다.
“진 씨, 남자로 오해 많이 받죠?”
“맨날 그라요-”
진이 예의바르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내 임무는 밤 동안에 백호궁의 경비를 서는 기라예. 일할 때는 석상마냥 가만히 있고 낮 동안에도 밖엔 잘 안 돌아다니니 이 마을엔 내 얼굴만 어찌어찌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남자라고 아는 사람들 많을 걸요.
흐흐흫, 그런 거 신경 안 쓰긴 해요.”
“밤에 일하시면 낮엔 주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심더. 내는 안 자고 일주일 넘게 버틸 수 있그든요.”
“인간이십니까...?”
“흐흐흐-”
진이 씨익 웃으며 이어 말했다.
“-자경단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짬이 찬 사람들은 일반적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신기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예.”
“신기한 재능이라뇨?”
“이 영혼 세계의 마기에 오래 영향을 받으면 그랍니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끔씩... 어떤 사람은 ‘변하는’ 거죠.”
“마기란 건 어마어마한 거네요. 이 세계에서 오래 살면 다 그렇게 되나요?”
“아니요. 오래 살아서 마기가 축적되었다고 해도 목적이 없으면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요. 자경단 사람들은 이 마을을 지킨다는 목적이 있으니까 마기가 밖으로 발현이 되는 게 아닌가...
추측일뿐 이지만요.”
“우와, 멋있는데요. 어떤 신기한 능력이 생기는 데요?”
“멋있을 거 하나도 없어예-”
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어 말했다.
“-내는 겨우 오래 깨어있어도 안 피곤한 능력이지요. 밤에 경비를 서는 일을 오래해서 이런 능력이 발현된 게 아닐까요?”
그 말을 듣고 소녀는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것처럼 불현듯 무언가를 깨닫고는 물었다.
“혹시 정록사 씨는 소리 안 내고 걷는 능력이에요?”
“오! 똑똑해.”
진이 웃으며 다시 판메밀을 한 젓가락 집어 간장에 둘둘 말아 한입에 후루룩 먹었다.
그녀가 말했다.
“정록사 형님은 정확하게 말하면 기척을 숨기고서도 빨리 움직이는 능력이지요.”
“정찰병 일을 오래해서 그런 능력이 생긴 건가요?”
“추측만 하는 거죠... 흐흐흐.”
“다른 아주 신기한 능력에는 뭐가 있어요? 궁금해요.”
“글쎄요, 막상 생각해보라니까 기억이 안 나는데. 냄새를 맡아서 위험을 감지하는 사람도 있고, 바람을 불어 일으키는 사람도 있고?”
“바람을 일으킨다면 어느 정도로요?”
“흐흐흫, 그 언니야는 자기 능력을 잘 제어 못한다는 게 흠이죠. 그냥 기분에 따라서 마구 요동쳐요. 전에 그 언니야가 크게 아팠을 때는 이 마을에 돌풍이 몰려왔었죠.”
“와, 멋있어. 마법같아...”
“진짜 마법에 비하면 이런 능력들은 아무것도 아니라예.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럽지요. 별것도 아닌 재주에 불과합니더. 마법은 악마가 쓰는 거지예. 평범한 영혼의 마기는 악마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도 몬해요.”
“악마는 마기가 강해요? 당연한 질문인건가.”
“영혼을 하나 먹으면 몸에 2명분의 마기가 쌓이니까요. 영혼들을 학살하고 포식한 극악무도한 악마는 얼매나 쎈 마기를 가지고 있을는지...”
“그런... 영혼을 잡아먹으면 자신의 마기가 강해지는 거 에요?”
“그니까 악마들이 기를 쓰고 하나라도 더 먹을라 하죠.”
“백희는 어떻게 영혼을 안 먹고서도 그렇게 강한 거죠?”
국수집이 찬물을 끼얹은 듯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소녀는 뭔가 어색해진 분위기에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아무래도 다른 식탁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모양이었다. 소곤거리던 목소리가 잦아든 국수집엔 순간 섬찟한 침묵이 드리웠다. 소녀는 무슨 말실수를 했나 식겁했지만 진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간장에 면을 말며 말했다.
“아주 오래 사셔서 아닐까요?”
“얼마나 오래 살았는데요...?”
“서슬 퍼런 악마보다는 적게 사셨다든데 그래도 이 세계에서 손에 꼽게 오래 사셨다 드라고요. 글쎄요, 몇천 년? 몇만 년? 흐흐흐흐... 우리는 추측만 하는 기라예.”
소녀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제가 방금 말실수한 건가요?”
“내는 충분히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백희님이 들으셨어도 기분 전혀 안 나빠하셨을걸요. 음, 분명해요.”
소녀는 가만히 백희가 이 마을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지를 생각해보았다. 국수집이 다시 사람들이 잡담하는 소리로 적당히 시끄러워지자 그녀가 물었다.
“백희님이라고 해야 해요? 반말해도 괜찮다 했었는데.”
“흐흐흐흐, 언니야는 맘대로 부르세요. 자경단만 존댓말해요. 우리들은 백희님을 원수로 삼는 일종의 군대거든요. 민병대에 불과하긴 하지만 뭐, 영혼 세계에서 가장 잘 짜여진 부대잖아요.”
“저는 그 애를 그냥 마법을 쓰는 여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 사람들은 정말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겠죠?”
“으흐흐흐흐흫... 그 표현 좋네요. ‘마법을 쓰는 여우’라. 백희님한테 물어보면 똑같이 자기를 소개하실 걸요. 다만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 분이 몹시 감사한 존재인 것도 맞지요.”
진이 깨끗이 비운 메밀판을 한 쪽으로 쌓아서 정리하고 일어섰다. 소녀도 따라 일어서서 그들은 함께 분주한 시장으로 나왔다.
자세히 보니 시장에는 장보러온 손님들 외에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딘가를 향하는 일꾼들도 많았다. 두꺼운 널빤지를 족히 스무 장은 이고 진 사람을 조심스레 피해가면서 소녀가 물었다.
“여기 어디 공사하나 봐요? 밖에서 보니 섬 대부분이 숲이던데 하긴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해서 오면 공사일이 많겠네요.”
“섬을 개간하는 것도 그렇지만 요새는 축제 준비로 바빠서 그래요.”
“축제요?”
“흐흐흐. 설레요? 물론 우리 마을에도 축제가 있죠. 그런 거 없으면 심심해서 사나요? 1년에 큰 축제가 2개 있어요. 지금은 유등축제 철이네요.”
그들은 다시 시장통을 지나서 꽃대궐로 향했다. 정록사와 달리 진은 대로로 천천히 걸으며 소녀가 시장의 경치를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그녀가 계속해서 설명했다.
“봄에는 봄꽃축제가 있고요, 가을에는 유등축제가 있어요. 이 제도에서 좀 크다 싶은 섬에는 다 강물이 흐르는 거 보셨으예? 농작물을 모두 수확하고 나면 날을 잡아서 진탕 먹고 마시지요. 그리고 밤에는 강마다 등을 띄우는 거에요.
우리를 위해 천공의 제도를 마련해주신 백희님의 대단한 마법을 기리는 의미의 축제라예.”
설명을 들으면서 소녀는 축제의 광경을 머릿속으로 찬찬히 그려보았다. 수많은 등으로 밝혀진 야밤의 제도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진이 계속해서 말했다.
“쌔까만 강물에 등을 올리는 것도 볼만하지만 역시 유등축제의 대미는 마을 밖에서 등이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보는 거죠. 수 백 수 천 등불이 검은 폭포를 따라 떨어지는 광경이 그리 예쁠 수가 없어요.
유등축제의 마지막을 마을 밖에서 보고 싶다면 미리 자경단에 신고를 하고 자리를 잡아놓아야 해요. 명당은 그날 초저녁부터 맡아둔 사람이 있지예. 흐흐흐...
내는 축제날도 백호궁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 장관을 함께 보진 못하요.”
“엥? 그런데 마치 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사실 여서 살면서 딱 한 번 본적 있어예. 그 날은 다른 동료가 대신해서 야간경비를 서줬죠. 명당에서 구경한 건 아니고 다른 자경단 사람들처럼 통제 임무에 참여한 거였지만 억수로 이뻤지요.”
“저도 보고 싶어요. 축제날이 언제에요?”
“원래는 보름도 더 남았는데, 새벽 사이 첫 서리가 내렸다 아잉교? 아직 수확이 안 끝난 논도 많은데 이른 서리가 내려서 꼭두새벽부터 농부들이 한숨을 쉬더라고요. 안 그래도 오늘 아침 마을회의에 그 얘기 했다 아잉교.
아무튼 동 지금이라도 수확시기를 앞당겨서 손실을 최소화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었지예. 축제날 변경안도 나왔었는데 농부들 고생이 크다고 일단은 날짜 변경은 보류로 뒀어요. 하지만 아직은 몰라요, 원래 수확이 끝난 다다음날 축제를 여는 게 전통이거든요.”
“전통이라, 그러고 보니 이 마을은 세워진지 몇 년이에요?”
“올해로 백 이 년째요. 유등축제는 이번이 구십구 회로 알아요.”
“오호라, 진 씨는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정록사 씨는...흐흐흐. 어머!”
“흐흐흐흐흐흐흐. 중독성 있지예?”
소녀가 흠흠 하고 민망한 헛기침을 했다. 진이 킬킬댔다.
그들은 이제 아까 있었던 한적한 계단 입구로 돌아왔다.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와 목덜미를 쓸어갔다.
진이 계단 입구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궁 안으로는 못 들어가셔요. 미안해요, 일단 언니야도 외부인이니까요. 원래 새로운 입주민은 백희님이 직접 데려오셔서 내는 권한이 없네요.”
“괜찮아요. 밖에서 기다릴 수 있어요.”
대궐 쪽에서 계단을 타고 바람이 불어왔다. 아까보다 더 강해진 바람이었다. 진이 계단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뭔 일이 생겼는가? 잠시 만요. 보고올-”
그녀의 마지막 말은 갑작스레 불어온 돌풍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어찌나 강한 바람이었는지 계단 아래 서있던 두 사람의 몸이 휘청할 정도였다.
소녀는 어리둥절했지만 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녀가 먼저 말했다.
“웬 바람이 이렇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기긴 했는가 봅니더. 올라가 봐야겠어요.”
“그럼 저는 여기 있을까요?”
“음-”
진은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은 채로 소녀를 돌아보며 잠시 고민했다.
“-아니요. 같이 갑시다. 아직은 위험상황인지 어떤지도 잘 모르니까요. 일단은 언니야의 안전을 지키는 게 내 최우선 임무에요.”
“그러면 따라갈게요.”
진이 계단을 한 두 개 더 올라가다가 다시 뒤돌아보며 말했다.
“내도 무슨 상황인지 몰라요. 올라가보고 웬만하면 내한테 꼭 붙어 있으쇼. 하지만 손짓하면 최대한 멀리 떨어지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바로 그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