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2장. 조향사(9)
그녀는 도대체 저게 뭘까 쳐다보다가 문득 주변 풍경에 비해 두루미가 너무 크다는 걸 알아챘다. 징검다리 위에 선 그녀에 빗대서 계산해보면 멀리 앉은 두루미의 몸통이 그녀의 몸통보다 더 두꺼웠다. 두루미의 팔은 그녀의 팔보다 5배 넘게 길어보였다.
그녀가 두루미를 보고 있는 것처럼 두루미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는 척 하지 마.”
헤뢴이 말했다.
“뭘?”
서리나린은 기묘한 두루미에게서 눈을 떼고 멍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항상 그랬듯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딱딱했다.
“못 본척 해.”
그녀는 순간 중대한 무언가를 깨닫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입이 벌어졌지만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징검다리 건너편을 가리켰다. 다리를 건넘과 동시에 두 사람은 투명한 얼룩이 지며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조용히 계곡을 건너서 왔던 길로 다시 올라갔다.
그녀는 몸이 숨겨져 있단 건 알아도 감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헤뢴의 손이 생명줄처럼 느껴졌다. 그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숨도 안 쉰 그녀였다.
“별 일 없어서 다행이네.”
“뭐야? 악마야? 우리 큰일 날 뻔 했던 거 맞지...?”
헤뢴이 입을 열자마자 서리나린도 참아왔던 질문을 터트렸다.
그들은 이제 푸른 숲 깊은 곳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좀 바보스럽지만 계곡에서 빨리 멀어지고 싶어서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거의 그녀가 헤뢴을 이끄는 형국이었다. 물론 그는 반쯤 끌려가면서도 침착하게 방향을 인도했다.
“마을 주변에 사는 놈들은 그렇게 포악하진 않으니까 괜찮아. 그냥 좀 귀찮아서 그렇지. 얼굴 봤어?”
“얼굴? 그냥 엄청 커다란 새라고 생각했어. 얼굴은 모르겠는데.”
“새? 나는 처음 봤을 때 웬 이불을 내다버렸나 생각했었는데. 아무튼 얼굴을 못 봤다면 됐어.”
“얼굴을 보면 안 되는 거야?”
“‘허수아비’라고 불러. 저게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귀찮은 존재가 돼. 무의식적으로 어느 부분을 얼굴로 알아보면 그 때부터 진짜 죽어라고 쫓아와. 생김새도 점점 기괴하게 변하고...
처음엔 해코지는 안 하는데 계속 시야 한 구석에 들어 있으려고 해서 많이 거치적거려. 그 상태로 또 오래 방치해두면 나중엔 뭐, 다른 악마랑 똑같지.”
“그... 그 정도까지 가면 어떻게 물리쳐야 하는데?”
“본체를 어떻게든 찾아서 없애거나 마법으로 기억을 지우는 수밖에 없어. 사념 계 악마 놈들은 다 그래. 직접적인 해코지는 별로 안 하는 대신에 본체를 제거하긴 어렵고 관심을 받을수록 힘을 무럭무럭 키우지. 애초부터 안 알아보는 게 최선이야.”
그녀는 소름이 돋은 어깨를 으으 소리를 내며 더듬었다. 당장 잡아먹으려고 하진 않는대도 어딘지 오싹한 느낌이 물씬 드는 악마였다. 머릿속으로 자꾸만 팔이 세 개 달린 두루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루미도 꼼짝없이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라고 보긴 어려웠어. 팔이 세 개나 달려 있었거든. 저게 뭔가 싶었어...”
“그 짧은 시간에 뭘 그리 자세하게 봤냐? 앞으로 비슷한 걸 보거든 바로 눈을 돌려버려. 팔 개수는 또 어떻게 샜다니.”
“그냥 보였어.”
“사람인 척하는 인형이야. 사람이 아니고, 새 모습도 아니지. 조악하게 흉내 내는 거에 불과해. 저게 뭐지 싶어서 골똘히 보게 만드는 술수야.
거기에 빠져서 계속 보다 보면 점점 허수아비의 원래 모습이 보일거야. 기억을 지우기 전까지 잠도 못 자고 울고 헛소리만 하던 사람들 많이 봤어. 조심해.”
“무섭잖아! 악마라는 게 단순히 영혼을 먹는 괴물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오싹한 존재였어?”
“사념 계 놈들은 대부분? 그 놈들은 영혼을 먹는 거보다 영혼이 괴로워하는 것 자체를 즐기거든. 진이 다 빠질 때까지 놀려먹다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서야 잡아먹지. 어떤 면은 물리 계 놈들보다 더 악질이야.
마을이 아무리 싫어도 그 안에서만 살아야한다니까.”
“악마도 종류가 있나 보구나.”
“너도 교육을 좀 받으면 알게 될 거야. 악마들은 천편일률적이지 않아. 똑같이 밥 먹고 사는 인간군상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 같은 걸 먹고 산다고 똑같이 행동하진 않는다고. 익숙해졌다고 우습게보면 안 돼.”
그녀는 첫날부터 중요한 훈련을 빼먹은 게 이때까지 중에 가장 크게 후회됐다.
“네가 능력을 쓰고 있으면 안전한 거 맞지? 맞다고 해줘.”
“이봐, 18년 동안 돌아다녔다고.”
“네가 일하고 있을 땐 꼼짝없이 드러난 상태로 있어야 하잖아. 계곡에서도 우리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자마자 30분도 안돼서 옆에 다가왔었어.”
“알겠어, 알겠어.”
“그냥 알겠다고만...”
가방이 덜그럭거리고 옷자락을 부스럭거리며 뒤지는 소리가 났다. 허공에서 낯익은 청동단검이 나타났다.
“이거 받아. 호신용 무기로 써.”
“이걸로 몸을 지킬 수 있을까? 공격하는 게 나랑 같은 사람이면 몰라. 악마라면...”
그녀가 공중에 떠있는 단검을 받아들며 말했다.
“몸을 지키란 게 아냐. 시간을 벌라는 거지, 내가 너하고 닿을 때까지. 그리고 그걸 쓸 만한 상황 자체가 없을 거야.”
“없길 바라는 거 아니고? 악마한테 이런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긴 해?”
“웬만한 악마한텐 다 통해. 자, 잘 들어. 얼굴 마주치자마자 너한테 달려들면 그걸로 찔러버려. 멀리서 널 쳐다보고만 있거나 말을 걸어오면 무시해. 알겠지?
말을 걸어오는 놈들은 대부분 사념 계 악마야. 다 그런 건 아니고. 물리 계 놈들도 말은 할 줄 알아, 대화보다 포식을 하고 싶어 해서 그렇지.
참고로 푸른 숲에 있는 놈들은 대부분 사념 계 악마야. 사람한테 위험한 물리 계 놈들은 자경단이 웬만해선 다 밀어냈거든.
사념 계 놈들은 맞닥뜨리더라도 무시만 잘하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어. 또 녀석들은 보통 본체보단 분신으로 돌아다니는데 이 정도는 평범한 인간도 정신만 똑바로 차린다면 싸워서 없앨 수 있을 만큼 약해. 얼른 도망치지 않으면 곧 다른 분신이 나타나겠지만-”
서리나린의 시야 한 구석 거친 수풀 사이에 희끄무레한 잿빛이 슬쩍 들어왔다.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못 내고 눈을 확 돌렸다. 맞잡은 헤뢴의 손아귀에 힘을 주어서 신호를 보냈다.
“-왜?”
그가 눈치 없이 되물었다.
“뭐하냐?”
갑자기 들려온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서리나린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 했다. 최대한 아무 소리도 안 내기 위해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상태라 그렇지 평상시였으면 한껏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헤뢴은 긴장을 안 하고 있던 상태여서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흐악! 놀래라, 아...”
“오히려 내가 놀래 자빠져야지. 아무도 없는데 목소리만 들려와서 한참 이게 뭔 소린지 고민했던 거 아냐?”
사람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구석에서 갑자기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가 불쑥 일어섰다. 서리나린은 그 사람을 보고 허수아비로 착각했던 거였다. 허수아비가 아니라 사람인건 다행이지만 자경단과 마주친 이 상황은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절대 좋아진 상황은 아니었다.
“누구냐? 헤뢴 맞지? 아니면 해오락이냐? 지도 놀라는 거 보면 사람 맞는데.”
잿빛 머리카락에 가면을 쓴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서리나린은 자경단 회의에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가면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어서 희끄무레한 검은 눈과 눈썹만 보였다. 가면 탓인지 별로 친절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그는 가면 뿐 아니라 좀 더 어두운 잿빛의 쓰개로 온 몸을 칭칭 동여매서 숨기고 있었다. 마치 이불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양이었다.
“말을 걸었는데 얼어붙는다면 악마가 아니고 사람이지~”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잿빛 남자보다 좀 더 멀리 구석에서 한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둥근 안경을 쓴 그녀는 과하게 커다란 안경알 탓에 좀 맹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녀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땋아서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뜨렸다. 넓은 이마와 순한 눈매는 만만하단 느낌을 줬지만 그녀의 허리춤에는 살벌하게도 검이 두 자루나 매여 있었다.
서리나린은 이 여자를 회의에서 본 기억은 없었다. 거기엔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있어서 회의에 참석했었어도 기억에 안 남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냥 놀라서 그런 것뿐이야. 너네 들도 모습은 안 보이고 목소리만 냈잖아.”
헤뢴이 말했다. 대범하게도 그의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허공에서 헤뢴의 얼굴부터 어깨까지만 확 드러났다. 서리나린은 움찔했지만 그녀의 몸은 여전히 꽁꽁 숨겨진 채였다. 헤뢴이 서리나린의 손을 꽉 잡았다.
“먼저 그런 게 누군데?”
잿빛 남자가 툴툴거렸다. 그들이 헤뢴에게로 나아와서 서리나린은 부들부들 떨었다.
“우리는 악마라고 생각했어.”
안경을 쓴 여자가 말했다.
“다행히 나뿐 이야.”
헤뢴이 뻔뻔하게 말했다. 안경을 쓴 여자가 소름 돋게도 헤뢴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서리나린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진 않았지만 그녀가 자길 찾고 있다는 낌새를 강하게 받았다.
“누구랑 얘기하고 있었지?”
잿빛 남자가 말했다.
“누구랑 얘기-? 아, 나는 그냥 혼잣말 하고 있었어.”
헤뢴이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혼잣말을 왜하는데?”
잿빛 남자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의 표정에서 미친 사람이라도 만난 듯한 혐오감이 엿보였다.
“방금 허수아비를 만나서 도망쳐오는 길이거든. 불안해서 혼잣말 좀 했다, 왜? 너네 들은 불안하면 혼잣말 하고 그런 거 없냐?”
“근데 우리가 듣기로는 그냥 혼잣말이 아니고 누구 다른 사람한테 이르는 말투처럼 들렸는데~”
안경을 쓴 여자가 말했다. 그들은 이제 헤뢴과 가까이 와서 섰다. 서리나린은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그들이 지금 선 곳은 수상하게 그림자가 지거나 수풀이 갈라져서 의심을 살만한 땅은 아니었다. 그녀는 최대한 몸의 움직임을 줄이려고 뻣뻣하게 서서 눈동자만 굴려서 둘의 눈치를 보았다.
잿빛 남자는 서리나린에게서 팔만 뻗으면 닿을 위치에 있었다. 그가 갑자기 그녀가 있는 곳에 팔을 뻗어 찾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망쳐야하나? 헤뢴에게서 떨어지면 바로 능력이 풀릴 것이다...
“너희들 내가 싫다고 이렇게 다그치기 있냐? 나보고 어쩌라고? 선량한 주민을 아무 근거 없이 붙잡고 시비 거는 게 자경단 일이야?”
헤뢴이 오히려 화를 내며 비아냥댔다. 서리나린은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나 경악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가 진짜 무고했다면 충분히 화가 날만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헤뢴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까지 미루어보면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 터였다.
그의 태도는 그대로 적중해서 다그치던 두 사람은 적잖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잿빛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살짝 뒷걸음질 쳤다.
“엄한 사람 잡지 말고 가서 악마나 열심히 사냥하지 그래? 어? 아직도 사냥 준비 기간이냐? 쳐 놀다가 한 달에 한 번씩 겨우 일하는 게으른 새끼들...”
헤뢴이 적개심을 가득 품은 채 말했다.
“아가리 해라, 약쟁아.”
잿빛 남자가 으르렁댔다.
“아닌, 네가 제발 약 좀 달라고 빌던 게 떠오르네. 별로 오래 전도 아니지 않아? 그때는 팔 다리도 없고 내장 절반이 날아가서 꼴이 말도 아니었지. 새 살이 돋아나면 싸가지도 같이 돋아나는 건가?”
안경을 쓴 여자가 말릴 새도 없이 아닌이 쓰개 아래의 손을 들어 헤뢴의 뺨을 갈겼다. 서리나린은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소리를 내지 않고 그들에게 닿지 않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상태여서 날렵하게 그의 팔을 피했지만 헤뢴은 그대로 맞고 말았다.
퍽!
뺨을 때려서 날 수 있는 소리인지 의아할 정도로 크고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뢴은 조금 비틀거렸지만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곧바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아닌을 노려보았다.
“해보자고?”
헤뢴이 말했다. 그도 아닌에 지지 않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였다. 처 맞은 분노 뿐 아니라 오랜 증오마저 담겨있었다.
“그만~ 두 사람 다 그만~”
안경을 쓴 여자가 두 남자의 사이를 파고들며 말했다. 그녀는 두 팔을 뻗어 아닌과 헤뢴의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닌과 헤뢴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으려는 듯 버티고 서서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기만 했다.
“나를 아주 병신 좆만이로 보지? 전투병이라고 지가 나보다 잘난 줄 알아. 허구한 날 칼빵 수십 번 맞고 와서 낮밤으로 지랄발작을 하는 게...”
“계속 깝쳐 봐. 여기도 백희님 계신 줄 아네. 대가리 터진 변사체로 발견되고 싶으면 씨발아, 계속 씨부려 봐.”
“‘엄마... 엄마-흐윽, 제발... 엄마...’”
헤뢴이 갑자기 목소리를 싹 바꿔서 힘없이 흐느끼는 시늉을 했다. 서리나린으로선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소름끼치는 흉내였다. 아닌의 눈이 뒤집혀서 헤뢴에게 달려들었다.
“그만하라고! 아닌!!”
튕겨져 나갔던 여자가 다시 끼어들어 고함을 치며 둘 사이를 벌렸다. 아닌이 헤뢴의 멱살을 안 놓으려고 하자 아닌을 마구 때리기까지 했다. 아닌이 달려들자마자 서리나린은 날래게 헤뢴의 뒤쪽으로 이동해서 도포 자락 끝을 잡고 그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헤뢴도 양 손으로 아닌을 부여잡았다.
두 사람이 영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여자가 마침내 검을 뽑았다. 시퍼런 칼날이 사이로 파고들자 둘은 그제서야 씨익씨익거리며 서로 떨어졌다. 가면을 써서 얼굴을 보호하고 있는 아닌은 거의 맞은 기색이 없었지만 헤뢴은 맞은 뺨이 붓고 콧구멍 한 쪽에서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자경단이란 새끼가 사람이나 패고 다니는 거 느그 어매도 아시는지 모르겠네.”
헤뢴이 흐르는 코피에도 굴하지 않고 비아냥댔다.
“니 부모도 역겨운 니 버리고 도망갔으니 남의 엄마 얘기밖에 못하지? 너는 그냥 할 줄 아는 게 입 터는 거랑 남이 소멸하는 걸 방조하는 거 밖에 없잖아. 네 동생은 끝까지 너를 믿었을 거야. 너네 부모도 너 싫어서 콱 뒤지고 나니까 쭈욱 백희님 뒤에 숨어 있고."
아닌도 질세라 마구 쏘아붙였다.
"어, 계속 떠들어 봐~ 오랜만에 입이 뚫렸구나?"
"너네 부모 목매러 가면서 니보고 자멸하라고 얘기 안 해줬냐? 그래도 이 세계의 정이란 게 있었으면 알아서 뒤지라고 조언해줬을 텐데 아직까지 니가 꾸역꾸역 마을에 남아있는 거보면 그런 정도 싸그리 없어졌었나 보다.”
그는 가면을 벗고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가면을 벗자 심한 화상으로 얽은 얼굴이 드러났다. 콧대는 거의 없이 구멍만 나 있었고 그 아래 더 큰 구멍 안에는 검게 변색되고 군데군데 빠진 이가 나 있었다.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서리나린이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아닌은 전체적으로 환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아내랑 애새끼 패다가 감방 간 느그 애비만 하겠어. 슬슬 나올 때 되지 않았냐? 우리 아닌이 무서워서 어떡하지? 일할 때도 처 맞기만 하는데 집구석에서도 처 맞게 생겼네.
아이구... 보고 배운 게 그런 거 밖에 없으니 애새끼도 허구한 날 사람패고 다니지...”
“왜 아직 살아있어? 또 얼마나 많이 죽이려고? 얼마나 더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 만족할래? 실실 쳐 웃으면서 뒤로는 온갖 짓거리는 다하는 역겨운 변태 새끼...”
“네가 할 말이냐? 애비 오시면 이번에는 꼭 둘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공유해~”
“너부터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 헤뢴.”
아닌이 폭발해서 뭐라고 소리 지르는 걸 안경을 쓴 여자가 잽싸게 말을 끊었다. 아닌은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꾹 눌러 참았다.
“그리나이, 이거 폭행으로 신고 안 되냐?”
“글쎄, 증거가 없잖아?”
그리나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증거가 없긴 왜 없어? 여기 일방적으로 쳐 맞은 사람이 있는데.”
“네가 자해하고 거짓말하는 건지 아닌 지 어떻게 알아. 증인이 없잖아? 마을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뭐람. 그러니까 알아서 처신 잘 해.”
헤뢴은 말없이 그리나이도 노려보았다. 아닌은 심한 욕설을 지껄이며 다시 가면을 쓰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리나이는 헤뢴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진 않았지만 딱히 상냥하게 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