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화 〉2장. 조향사(13) (29/155)



〈 29화 〉2장. 조향사(13)

멀리 가지 않아 서리나린의 눈에도 익은 돌길이 펼쳐졌다.
길 양 옆으로 기둥이 늘어서 있었다. 아직 등불이 안 진 탓인지 기둥의 등에는 불이 안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서슬과 이 길을 걸었던 때를 떠올렸다. 불어오는 무거운 바람에 어깨가 근질근질해져서 손바닥으로 마구 비볐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헤뢴은 여전히 태연해 보였다.

“넌 어찌 그리 여유로워 보여?”

“그래? 몰라.”

“항상 태연해 보여.”

“조향사 일을 하면서 미리 들어서 알게  게 많거든. 아무래도 향을 맡는 일도 많고. 다른 조향사한테 의뢰했던 향을 다시 나한테 오래가게 해달라며 재의뢰하는 것도 많이 받아봤어. 만들어진 향을 피워보면 그걸 실제로 겪은 것 마냥 느낄 수 있지. 그래서 다른 사람이 새롭게 느낄만한 일도 나에겐 이미 알고 있는 일을 재차 하는 느낌이야.
물론 서슬 퍼런 악마를 실제로 만났을 때 그가 나한테 호의적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부분은 긴장이 되긴 해.”

“인생이 지루하겠네.”


“별로 그러지도. 그만큼 새로 알게 되는 것도 많거든. 사실 알게 되는  더 많지.”

그는 돌길 위로 걸어가다가  나무 기둥 가까이 가서 손으로 직접 결을 만지며 촉감을 느꼈다. 손으로 기둥을 더듬어 올라가 둥그런 등잔 바닥까지 어루만졌다.
서리나린은 그의 행동을 쳐다보다가 새삼스럽게 그의 손이 온갖 굳은살과 잔 상처로 가득하단 걸 깨달았다. 어쩐지 손을 잡았을 때 거칠거칠하긴 했다. 헤뢴은 다음 기둥까지 걸어가서도 손으로 면밀히 더듬었다. 마치 향만 맡았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촉감이나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기억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헤뢴은 이제 돌이 단정하게 깔린 바닥을 발로 밟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머리가 조금씩 무거워지고 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째 헤뢴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서리나린보다는 훨씬 강한 마기를 가지고 있어서 영향도  받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그냥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걷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돌길 옆으로 돌담이 죽 늘어섰다. 담 너머 단청이 알록달록한 눈에 익은 기와집이 드러났다. 그들은 계속해서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대문까지 도착했다.
그녀는 이번에도 멍하게 발만 보며 가다가 나란히 걷던 헤뢴이 멈춰 서자 깜짝 놀라며 따라 섰다. 그는 돌담 사이에 난 문 앞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가 서리나린을 돌아보았다.

“어떡하지?”

그가 물었다.


“왜 나한테 물어? 서슬 만나러 가자고 한 건 너였잖아.”


“네가 가고 싶어 했잖아.”


“무슨 소리야? 네가 가자고 안했으면 난 오늘 얌전히 훈련받고 있었을 거야.”


그는 아무 말 없이 닫힌 대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안쪽에서 굳게 잠긴  문은 꿈쩍도 않았다. 그는  더 힘을 주며 밀어보다가 말고 똑똑 두드려 보았다. 나무 울리는 소리가 크게 났음에도 집 안에선 누가 나오는 기척이 없었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며 멀뚱멀뚱한 눈빛으로 서리나린을 보았다.


“지금 안에 없나?”

그녀가 말했다.


“음, 하긴 호수에 산다고 해서 하루종일 여기 붙어있진 않겠지. 애초에 영혼을 거두는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그가 합리적인 추론을 했다.

“그럼 어떡하지? 서슬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아.”

“환생을 원하는 사람들은 시간대 관계없이 호수로 떠났어. 여기에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들 서슬 퍼런 악마가 의아해 하진 않을걸.”

“근데 우린 환생하러 온  아니잖아! 서슬이 우리더러  하러 왔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


그녀가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지만 왠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견학하러 왔다고 하면  되나?”


“...”


“서슬도 헛소리를 하면 질린다는 표정으로 째려보려나? 백희처럼.”

“어이없다는 표정 짓는   적 있는데...”


그들은 말없이 각자 자기 생각에 빠졌다.
붉은 숲은 매우 조용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서리나린이 침묵을 깼다.

“난 호수가 보고 싶어.”

“나도. 내 눈으로 직접.”

“이 길을 따라가면 호수가 나오나?”


그녀가 돌길을 보며 말했다. 계속해서 이어진 돌길은 저 어귀에서 굽이굽이 나무를 끼고 돌아 끝자락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먼저 호수 쪽으로 출발했다. 그녀도 따라갔다.


“호수에 허락 없이 들어갔다고 화내진 않겠지? 설마?”


그가 말했다.

“넌 호수에 대한 기억 맡거나 들어본 적 없어?”


“있긴 있는데 백년도 더 전의 기억이야. 지금 어떻게 바뀌었을지 몰라.”

“그 때 기억으론 어떤데?”


“그냥 뭐... 호숫가에 영혼이 아주 많고, 사람도 있고, 서슬과 백희가 같이 있고... 대충 그런 식의 기억이던데.”


“다 같이 있다고? 어떻게?”

“예전에는 서슬이랑 백희가 사이좋았어.”

“그런데 어쩌다가 지금 따로 살게  거야? 지금은 둘이 서로 싫어하지 않아?”


“음... 너한테 말해줄 순 없어. 아니,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이건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정보야. 장담하건데 이거 알면 너 환생 1년 늦어진다.”

“그 때 사람들은 천공의 제도가 아니라 호숫가에서 살았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리나린은 서슬네 집이 혼자 살기엔 너무 크다고 생각했던 걸 떠올렸다.

“-어쩐지 집이 무슨 여관처럼 생겼더라. 방이 100칸은 되는 것 같던데.”

“난 아무 말도 안할 거다.”

그가  잘라 말했다.


“백희가 입막음했어?”


“알아서 입을 다무는 거야. 나는 아는 게 많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아는 몸이거든.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평화가 깨진단다.”

“그래~  아는  많아서 좋겠다.”

그녀는 볼에 바람을 넣어서 부풀리고 있다가 투덜거렸다.


“서리나린, 아는 게 많다는 건 저주야.”


“그런데 넌 그걸 좋아하잖아.”

“맞아.”

그가 씨익 웃었다.


“조향사 일이 싫었으면 한참 전에 그만둘 수 있었어. 나에게 인과가 쌓이더라도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건... 너무 재밌잖아-”

그는 좀 쉬었지만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 켈록 잔기침을 했다.

“-농담 아니고 진짜  너무 아파. 근 3년 간 하루에 제일 말 많이 한  같아. 넌 안 아파?”

“괜찮은 것 같은데. 하나도 안 아파.”

“아직 사람 되려면 며칠 남았구먼. 너도 오래 살다보면 닳고 닳을 지어다. 네 가방에 물  줘.”


그들은 돌길을 따라 붉은 나무를 돌아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바로 놀랄 만큼  호수가 나왔다. 아직까지 생명의 등불이 떠있는 시각이었지만 물은 너무나도 검었다. 검고 큰 물 주변에는 이때까지 본 중에 가장 많은 수의 영혼이 한꺼번에 몰려있었다. 영혼세계의 순수한 영혼들은 다 여기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물가를 따라 붉은 색의 키가 작은 풀이 나 있었다. 새하얀 영혼들은 풀잎 위에 앉아 있기도 하고 천천히 날아다니기도 했다.
서리나린은 헤뢴을 쳐다보았다. 헤뢴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큰데? 이렇게 큰 호수였어?”

“나도 예전에 다른 조향사가 만든 흐릿한 향만 맡아봐서... 그런데 직접 보니 왜 향마다 어마어마하게 큰 호수라고 표현했는지 알겠네.”

“여길 건너가야 환생할  있다지 않았어?”

“순수한 영혼의 모습으로. 그런데 손톱만한 날개로 저 너머까지 날아가려면 무슨 사흘밤낮을 날아가야겠는데?”

그녀는 호수 너머를 바라보았다. 푸른 숲만큼 자욱하진 않았지만 검은 안개가 끼어서 호수 반대편 둑이 보이지 않았다. 호수라고 들은 바가 없으면 바다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영혼이 날아가다가 힘이 빠지면 어떡해? 깊이도 엄청 깊어 보이는데.”

그녀가 말했다.

“그러게. 환생이 쉽지가 않다는  그런 뜻으로 말하던 건가?  이 세계에 더 살고 싶은 미련을 떨쳐내는 게 어렵다고 받아들였었는데. 이제 보니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모르는 건너편 둑으로 날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겠다.”


“혼자 어둠을 헤치고? 얼마나 가야하는 지도 모른 채? 가다가 용기가 약해져서 다시 돌아오는 영혼도 있겠다...”


그들은 다시 크고 넓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라기 보단 마치 땅에  큰 구멍 같았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한두 발짝 앞으로 걸어가자 급격히 몸이 빨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화들짝 놀라 옆에 선 헤뢴을 붙잡았지만 실제로 몸이 빨려 들어가진 않았다. 호수가 풍기는 기운은 너무 무겁고 강렬해서 그 앞에 선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끼게끔 했다.
 마기 덩어리 앞에 선 그녀는 자기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형태의 영혼, 아니 먼지보다 못한... 아무 의미 없는, 아무 것도 아닌...

“무거워.”

그녀가 겨우 입을 벌려서 말했다. 그리곤 겁이 나서 도로 몇 걸음 뒤로 도망쳤다. 헤뢴은 용기 있게 호수 쪽으로 걸어갔다. 서리나린보다 좀 더 호수에 가까이 걸어간 그는 허리를 숙이고 물결이 거의 없는 얕은 물가를 살펴보았다.

“그러네.  호수, 마기가 어마어마해. 내가 맡은 옛 향에선 이 정돈 아니었는데. 백 년간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나만 겁나는 거 아니지? 너는 멀쩡해?”

“너는 마기가 없다시피 하니까 영향을 더 많이 받으려나? 그런데 나한테도 으슥한 기분이 드는  똑같아. 이건 단순히 영혼을 몇 개 먹고 말고 한 수준의 마기가 아니야.
그냥... 이 세계 자체의 마기 같아. 세계수 근처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세계수가 어디 있는데? 아,  검은 숲이었나? 생명의 어머니가 산다는?”

“어. 그래도 거기는 이렇게 무거운 느낌은 안 들었는데.  년 사이 세계수보다 호수의 마기가 더 강해졌다고? 이거 서슬 퍼런 악마와 무슨 연관이...”

그는 말을 하다가  끊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뒷걸음질로 황급히 물러났다.
서리나린은 호수의 얕은 부분은 바닥이 비쳐보이려나 싶어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뒤로 물러나면서 그녀를 다급하게 툭툭 쳤다.

“때리지 마! 왜?”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굳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호수 건너편을 가리켰다.


“넌 저게 뭔 거 같냐?”

그가 가리킨 곳이 정확히 호수 건너편인지 호수 위 어딘가 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그녀는 막연히 앞을 쳐다봤다. 호수는 칠흑같이 검은 물이 차있었고 수면 위로는 검은 안개가 자욱했다.

“뭘 보라는 거야?”

“호수 위에.”


“안개.”

“안개 사이에 사람...”

“??”

그녀는 다시 안개 사이에 누군가 있는 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검은 안개 한 중간에 이상하리만치 다른 곳보다 어두운 부분이 있었다. 마치 누가 그려놓은 그림에 어두운 색 물감을 잘못 칠한 것처럼. 어둠이 검은 안개 사이에 숨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그녀가 사람 비슷한 형상을 찾기 시작하자 얼마 안 가 바로 찾을  있었다. 자욱한 안개 사이에, 검고 큰 물 위에 죽음이 둥둥 떠 있었다. 그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그녀는 즉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헤뢴도 더 이상 뭐라 말을 않았다.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둘 다 같은 것을 봤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둘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단 것도 알았다.
그들은 어느 정도 뒷걸음질 치다가 붉은 나무가 있는 곳까지 가서는 뒤돌아서 빠른 속도로 걸었다. 감히 뛸 용기는 없었다. 그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소리를 내지 않고 걸어서 나무  그루를 돌아 직선으로 난 돌길 위에 올랐다.

“여기 있어! 죽음의 아버지야! 우리가 떠드는 걸 못 들었나?”

서리나린이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몰라. 꽤 큰 소리로 떠들었을 텐데...”

“우리가 있는  알면 공격할까?”

“몰라. 진짜 모르겠어.  사람 지금 불안정해서 어떤 행동을 할지. 원래는 좀 꺼림칙하긴 해도 전혀 무서워할 거 없는 사람이었는데 백호궁에서 깽판 쳤던  보면...”

헤뢴이 말하다가  끊고 멈춰 섰다. 이번에는 서리나린도 그가 왜 멈췄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선 돌길 맞은 편 끝에 본 적 있는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서슬 퍼런 악마가 그의 거처로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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