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화 〉4장. 문(9) (52/155)



〈 52화 〉4장. 문(9)

불가에 모여앉아 식사도 마치고 수다도 어느 정도  그들의 자세가 점점 풀리더니, 시가 자기 침낭을 꺼낸 걸 시작으로 다들 주섬주섬 챙겨온 걸 꺼내기 시작했다.
서리나린은 일어나서 옆에 걸어놓은 도포자락을 매만졌다. 도포 끝자락이 좀 차갑긴 해도 마르긴 잘 말랐다. 그녀는 옷을 도로 입었다. 잘 때는 온도가 낮으니 껴입고 자려는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민이네 집에서 챙겨온 담요도 꺼내려고 허리춤에 찬 복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어?”

서리나린이 우뚝 선 채 불안한 한 마디를 내뱉자, 냐호야가 자기 잠자리를 꾸리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왜?”


“복주머니가...”

서리나린은 도포를 들어서 허리춤을 직접 확인해보았다. 거기는 옆으로 맨 수통만 들려있지 복주머니는 끊어진 줄만 달랑 남고 주머니는 사라져있었다. 아침에 봤었던 주머니가 그 자리에서 없어진 걸 본 냐호야가 숨을 헤엑 들이마셨다.


“너 주머니- 어디 갔지? 아까 연못에 빠졌을 때 끊어진 거 아니야?”

“그런 거 같아. 아...”

누워있던 시가 눈을 들어서 서리나린 쪽을 보았다. 서리나린은 자기가 빠진 연못 가로 눈을 돌렸다. 이미 밤이 된지 오래라 물가는 새카만 암흑에 잠겨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밤눈이 어두운 그녀는 얼마 나아가지도 못하고 중간에 우뚝 서서 팔뚝을 애타게 비비기만 했다. 너무 어두운 것도 어두운 거지만 모닥불에서 벗어나니까 바로 추웠다.

“삐약이! 물 쪽 가지 마, 위험해. 주머니에 지금 당장 써야하는 거 있어?”

“담요... 챙겨왔는데.”

서리나린이 울상을 지었다.
주머니 안에는 담요 뿐 아니라 이것저것 많이 들어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사실상 그녀의 전 재산이었다. 주머니 자체가 자경단의 상징이라 귀한 것이기도 했다. 백희한테서 받을  마법이  물건이니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들었던 것도 기억났다.

“일단 오늘은 나랑 같이 덮고 자자. 날이 밝아야 다시 찾든가 어쩌든가 하지. 그 안에 중요한 거 많이 들었어?”


“그냥 담요랑... 칼이랑... 하- 그리고 내  들어있어...”

“저런, 돈 많이 들어있었어?“

서리나린이 냐호야 쪽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몸의 힘이 쭉 빠졌다.

“많이 들어있던 건 아닌데, 내  재산이야.”


“윽, 안 됐네. 나중에 연못에서 찾아보면 바로 보일 수도 있어.”

냐호야는 긍정적으로 말했지만, 서리나린도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저런 큰 연못에 조그만 주머니를 빠뜨렸다면, 영영 못 찾을 거라고. 주머니가 떠내려가지 않고 얌전히 빠진 자리에 그대로 가라앉았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떠내려갔다면 그대로 끝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돈 말고는 중요한 물건 또 없지?”

힘없는 병아리처럼 걸어온 서리나린을 맞아 자리를 좀 옆으로 비키며 냐호야가 물었다. 서리나린은 그녀의 깔개 위에 조심스럽게 주저앉았다.


“칼... 선물 받은 거였는데.”


“괜찮아. 등불이 밝아오면 찾을  있을 거야. 주머니 꽃분홍색이잖아. 아침에 보면 바로 눈에 띌 걸.”


냐호야가 서리나린을 가볍게 토닥였다. 주머니의 특이한 색깔이 떠오르자 조금은 희망이 생기는 것도 같았다. 물론 주머니가 멀리 안 떠내려가고 거기 남아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서리나린은 힘없이 누웠다. 냐호야가 자기 베개를 좀 비켜주었다.


“괜찮아, 언니.  그냥 팔 베고 잘게.”

“같이 써도 괜찮은데.”

“아니,  어차피  베고 자려고 내 베개는 안 챙겨왔었어. 그냥 언니  언니가  써.”


서리나린이 시원시원하게 말하고는 자기 팔을 베고 누웠다. 그러고 누우니 불 반대편에 번듯한 침낭을 가지고 포근하게 누운 시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이대로 자도 되는 건가? 시 씨, 자는 동안에도 능력 유지할  있어요?”

서리나린이 문득 물었다. 저녁 먹고 해이해진 상태에선 졸리단 생각밖에 안 들었었지만, 주머니를 잃어버린 걸 깨닫고 나서는 잊고 있었던 현실 감각이 조금은 돌아온 기분이었다.

“네, 그런 식의 수련은 아주 철저히 했거든요.”

그 말대로 시의 머리맡에는 잘 안보이긴 했지만 아직도 세 개의 거품이 두둥실 떠있었다.

“헤... 보통 자고 있을 때도 능력을 유지시킬 수 있나? 원래 그런가?”

“능력마다 달라요... 항상 발동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고, 시전이 둔해지는 사람도 있고, 아예 못 쓰는 사람도 있고.
저도 전에는 자고 있는 동안은 설치해둔 능력이 다 깨졌었는데, 각고의 노력 끝에 수면 중에도 예민하게 유지시킬  있게 됐죠.”

“시 씨는 대단하시네요.”

서리나린은 중얼거리며 자기 능력에 대해서 떠올렸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실험을 거치지 않아서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이때까지 유추해본 바로는 자기가 다치는 모습을 상대방에게 보임으로서 그가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능력이었다.  감정은 사랑, 걱정, 슬픔 등 잘은 몰라도 그런 류의 감정으로 예상됐다. 이런 능력이라면 자고 있는 동안에도 자동으로 발동되지 않을까? 서리나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백 번 생각하는 것보단 한번 깨우치는 게 확실했다. 그녀는 조용히 나중에 헤뢴한테 부탁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그가 질색하는 표정이 자동으로 연상됐다.

“구름류를 계승하는 자라면  정도는 당연하죠...”


시가 중얼거렸다.

“네? 구름류... 뭐요?”

“제 능력 이름이요. 그렇게 불러요.”

“무슨 도술 같네.”

“도술 맞지.”

서리나린의 뒤에서 냐호야가 말했다.


“구름류는 쟤네 가문에서만 쓰는 능력이야. 가문 단위로 연구해서 개발하는데 술법이라고 부를 만 하지.”

“능력을 가문 단위로 쓴다고? 어떻게? 여기 가족들은 피가 이어진 게 아니잖아?”


“저희는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난  아니지만 비슷한 재능으로 이어져 있어요. 구름 가의 일원이 된다는 건 곧 구름류를 쓰는 술사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에요.”

시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럼 다 같은 능력을 써요? 시 씨네 가족 사람들은 다 시 씨처럼 물을 다루고...? 우와!”


“처음 가문에 들어올 때만 해도 미미한 정도의 능력이에요. 저희 가문은 엄격히 심사해서 물 관련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뽑아요. 물론 물 관련된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하지만, 구름류 계승자에 필요한 다른 자질도 꼼꼼하게 따져서 가려 뽑죠.”

“와... 처음에는 약한 정도의 능력이었다가 가문에 들어가고 나서 제대로 개발해내는 거 에요?”

“네. 가문에 전통적으로 이어지는 술향이 있어요. 외부인들 한테 절대 유출되지 않도록 극비리에 맡아지는 향이죠. 저는 5년 전에 구름 가의 자재로 선발돼서 그 때부터 수련해왔어요.”


“5년 전  씨는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에 비하면 보잘  없었죠... 저는 물을 사용해서 보호벽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어요. 그 능력도 현재에 비하면 굉장히 약했죠. 막 형태로 짜지도 못했고, 그냥 원시적으로 물을 길어내서 충격을 완화시키는 벽을 만드는 수준이었으니까.”

“우와- 그것도 진짜 대단한 데요! 어쩌다가 그런 걸 다룰 수 있게 되는 거지?”

서리나린이 동경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벼,  거 아녔어요. 벽이라기 보단 기둥에 가까웠죠. 크게 만들지도 못했어요. 제 몸이나 간신히 지킬 수 있는 정도...? 그리고 한 번 만들어 내는  정신력을 엄청 소모해서 뭘 가까스로 막아낼 때마다 몸이 벌벌 떨렸었죠.”

시가 조금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정말 그 때의 능력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해서 진심으로 겸허하게 말하는 투였다.

“물이나 바람을 다루는 능력을 보면 정말 신기하더라. 나는 그런  감도 안 오는데...”


서리나린이 정자세로 자세를 고쳐 누우며 말했다.


“애초에 능력이 있는  자체가 신기해. 그것부터 일반인을 벗어난 거잖아.”

냐호야가 말했다.


“언니는 능력 없어?”

“없는데? 그거 그렇게 흔한  아니야.”

“헤에- 자경단 사람들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자경단도 능력이 없는 사람이 꽤 있어. 그래도 작전 수행 잘 해.”

냐호야가 진지하게 말했다.


“능력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과 대등하게 일할 수 있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대신에 그만큼 다른 걸 키우지. 뭐, 근력을 키운다든가- 능력을 가진 사람은 보통 능력 개발에만 집중해서 다른 거, 예를 들면 체력적인 부분이나 그런 건 다소 부족한 경향이 있거든. 물론 자경단인 이상 일반인 보다는 뛰어난 수준으로 단련했겠지만.”


“능력이 있다고 꼭 다른 부분이 떨어지는  아니에요.”

“그래? 나는 무엇보다 널 보고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 능력은 잘 다루지만 몸싸움은 좀 하냐?”


냐호야가  쪽에다 대고 말했다.


“저- 힘 약하지 않아요! 단련할 때 보면 알잖아요. 딱히 남들보다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라고요.”

“단순히 근육을 키우는 거랑 싸움박질하는 건 달라. 너 싸워본 적 있어?”


“윽... 능력을 잘 다루면 싸움을 할 필요가 없죠. 애초에 제 구름류 자체가 근접전이랑 안 어울리고 위험을 마주하기 전에 미리 감지하는 게 전공인데.”

“그럴  알았어. 누구한테 주먹 한 번 안 날려본 도련님 낌새가 폴폴 나. 너 나랑 싸워도  걸.”

냐호야가 냐하하 웃었다.

“그런  별로 경험 안 해봐도 돼요. 필요 없다고요.”

시가 새침하게 말했다.

“필요할 것 같던데.”


서리나린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붉은 숲에서 허수아비와 당도했을 때를 떠올렸다.
당장 허수아비가 팔을 감아오자 부드럽고 얇은 천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뿌리치지 못했더랬다. 너무 당황하기도 했었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녀 자체가 힘이 약해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헤뢴은 간단하게 허수아비의 팔을 붙잡고 떼어냈다. 그는 흉내내기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힘도 세고 머리도 똑똑했다. 철저하게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해가며 수십 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강해진 걸까?
게다가 그는 조향사 일을 오래하면서 주워들은 게 많아서 잡 상식도 풍부했다. 아마 마을 사람들이 남에게 함부로 알려주지 않는 기술들도 그는 조향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혔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능숙하게 베를 짜고 바느질을 하는 헤뢴을 상상해보다가 문득, 개발한 능력을 저장하기 위해 향으로 만든다면 헤뢴이 그 내용 또한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술을 향으로 저장한다면 그 조향은 누가 맡아요? 전문 조향사가?”

“처음에는 가문 내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었었는데, 아무래도 그러면 기억의 질이 떨어지다 보니... 현재에 와서는 믿을  있는 전문 조향사에게 의뢰해서 맡기고 있어요.”

“헤뢴이요?”

서리나린이 별 생각 없이 물었다. 시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왜 궁금해 하시죠?”

“아아, 저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죄송해요. 물어보면 안 되나...요?”

서리나린은 덜컥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도 물어보면 안 되는 거냐고 또 되물었다.


“술을 탐내는 무리들이 많거든요. 저희 가문에 쳐들어와서 술향을 빼가기는 힘드니까 대신에 조향사 쪽을 노리는 이가 많죠. 어느 술을 쓰는 가문이든 간에 계승자한테 어느 조향사에게 일을 맡기냐고 묻는 건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고,  의심받을만한 짓이에요.”


시가 또박또박 말했다. 서리나린은 적잖이 당황했다.

“죄송해요. 그게 그런 의미인 줄은 몰랐어요.  그냥... 그냥 물어본  에요. 죄송합니다.”

“알아요. 그냥 다음에 다른 가문 분들을 만나면 조심하시라고요.”

시가 태연하게 말했다. 서리나린은 민망한 마음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역시 오래 침묵하지는 못했다.

“다른 가문도 있어요? 능력을 계승하는?”


“있죠.  있어요.”


“천공의 제도에 있는 웬만큼 큰 섬 이름은 가문에서 쓰는 능력을 따서 지은 거야.”

냐호야가 끼어들었다.

“구름 가가 있는 구름섬. 돌풍 가가 있는 돌풍섬. 겁화 가가 있는 겁화섬...”


냐호야가 하나씩 읊어주었다.


“그럼 이름이 겁화류가 되나? 무시무시하네.”

서리나린이 몸을 으으 떨었다. 이름만 들어도 어떤 능력인지 상상이 됐다. 정작 자기가 오늘 하루 종일  나무를 홀라당 태워먹었단 건 이미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데 겁화나 돌풍이라는 이름에 비하면 구름은 정말 얌전한 작명인 것 같아요.”

서리나린이 별 생각 없이 시 쪽을 보며 말했다. 시가 입술을 삐죽이며 그녀를 살짝 째려보자 아차 싶었다.


“구름류는 정적인 술이니까요. 저희는 정찰과 경계에 특화됐죠.”

시가 조금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그렇겠네요. 그럼 구름 가문 분들은 대부분 정찰병이신가요?”

서리나린이 얼른 맞장구를 치고 또 질문을 했다.

“능력 계승자라고 무조건 자경단으로 일하는 건 아니에요. 연구 개발 자체에 중점을 두는 어르신들이 더 많으시죠...
그렇지만, 네. 자경단으로 일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정찰병과에 속하십니다. 다 그러신  아니고 몇몇 분들은 전투병으로 일하시죠.”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침울해졌다.

“시도 저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최소 정찰병 아니면 끽해봤자 전투병이 될 거야. 어떡하냐, 냐핫.”

냐호야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서리나린은 무슨 뜻이지 하다가 곧 시가 다리를 건너는 걸 무서워한단  떠올려냈다.


“시 씨, 천공의 제도에 있는 다른 다리는 거침없이 건너시잖아요?”


“그, 그렇죠. 저 고소공포증 같은 거 없어요.”


“냐하~ 그게 거침없이 건너는 거야? 얼굴이 팍 굳어가지고 부들부들 떨면서 건너는 데.”

“에, 진짜??”

“아니에요-!”

그가 인상을 찡그리고 입술을 비틀었다.

“천공의 제도에 있는 평범한 다리들은 그나마- 아니, 그냥 괜찮아요!”

“그런데 좀  다리는 안 되는 거 에요? 하긴 길수록 중앙 부분이 많이 흔들리긴 하네.”


서리나린이 멍하게 말했다.
천공의 제도 중에서 제일 긴 다리는 마을 밖으로 나가는 모래섬으로 오르는, 낡은 물푸레나무 다리였다. 그 다리는 어찌나 긴지 중앙부분을 걸을 때는 허리가 오색 안개에 푹 잠겼다. 다리는 안개 아래로 파묻혀서 그 부분을 걸을 때는 잠시 구름 위를 걷는 기분도 났다. 워낙 오래되고 낡은 다리라 다른 다리보다 많이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다리를 건널 때 그리 무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시는 아무 말도 않고 불편하게 입술만 우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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