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0화 〉4장. 문(17) (60/155)



〈 60화 〉4장. 문(17)

다행히도 은우의 바람대로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만귀가 드글드글한 영역을 빠져나가는 올바른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끈질긴 몇몇은 희미한 피 냄새를 좇아 슬그머니 따라왔고, 마침내 계곡이 완만해지는 하류 초입에 이르자 물을 건너 달려들었다.
은우는 방금 전 머리통을 몸에서 분리시킨 만귀를 안개 너머로 픽 던졌다. 쫓아오던 다른 만귀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신선한 피 냄새를 풀풀 풍기는 동료의 몸뚱아리에 덤벼들었다. 은우는 흐르는 물에 입을 담구고 피를 씻어냈다. 이렇게 하면 이쪽에 관심이 끌리지 않을 터였다.
그는 역겨운 포식의 광경을 뒤로 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들이 물을 타고 걸으면서 만귀가 많이 사는 영역을 확실히 지나쳐 왔는지 어제처럼 새로운 녀석들이 꾸역꾸역 밀려오진 않았다.


“저걸 다 먹으면  따라오려나? 만귀는 자기 영역 밖으로는 멀리 안 나올 텐데.”


유곰이 끔찍한 광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두 남자는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아무 방향이나 잡고 서둘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몰라. 저걸로 만족하고 이제 안 왔으면 좋겠어. 근데 너 진짜 쓸모없다.”


사람 모습으로 돌아온 은우가 터덜터덜 걸으며 말했다. 그는 샛노란 눈을 들어 유곰을 흘겨보았다. 유곰이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 어디  다치진 않았어? 보여줘.”

“됐어.”


“어제 다친 데 좀 보자. 계속 피가 밴 붕대를 안 갈아주면 몰려들 수도 있어.”

은우는 짜증난다는 듯 머리칼을 털면서도 유곰이 다가와 자기 옷자락을 헤집어 보는 걸 그대로 나두었다. 붕대는 아직 깨끗했다.


“안 벌어졌나 보네.”

“겨우 이 정도 싸운 거 가지고 호들갑은.”


“그래도 계속 확인해야하니까...”

유곰은 몸을 돌려 자기들이 지나온 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악마들이 동료의 시체를 할퀴고 찢으며 조금이라도  많은 피를 먹으려고 하던 구역질나는 광경은 이미 안개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이제 따라오는 녀석은 없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쪽은 만귀가 별로 안 사는 영역인가 봐. 겨우 한  돌릴  있겠네.”

“여기에 무슨 괴상한 놈이 더 있을지 모르지. 또 어제처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밝아오는  아닌가 몰라. 하...”


“좀만 쉬다갈까? 넌 어제 하루 종일 싸우고 밤엔 잠도  잤잖아. 오늘 등불이 뜨자마자 또 걷고.”

유곰의 말대로 은우는 너무 지쳐서 한 발  발 내딛기도 힘든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유곰이 고집스럽게 걸어가는 은우의 어깨를 잡고 멈춰 세웠다.


“조금만 쉬자. 내일도 하루 종일 이러고 다닐 수는 없어. 일단 여유가 생겼으니까 최대한 기력을 회복해보자.”

“괜찮다고...”


“너 쓰러지면 죽도 밥도 안 돼.  수 있을 때는 쉬면서 가자. 알겠지?”

유곰은 옆에 있는 적당한 절벽을 가리켰다. 은우도 속으로는 너무 피곤했기에 별 저항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큰 바위에 기대앉았다. 유곰의 말대로 이런 식으로 계속 걸어가기만 하면 탈진해서 쓰러질 터였다. 여유가 나면 악착같이 쉬어 가는 시간도 필요했다.
그는 앉은 채로 유곰이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는 걸 멍하게 바라보았다. 유곰은 얼마 부스럭거리지도 않았는데 훌륭한 모닥불을 금방 피워냈다.

“그거  거였냐? 성냥.”

“아, 응. 필요할 거라 생각해서 가져왔지.”

“나는 야영이라고 들었을 때도 불 피울 도구 챙길 생각은  들던데. 암튼 잘 챙겨왔네.”

“필요할 것 같아서...”

유곰은 은우 옆으로 가서 수줍게 쪼그려 앉았다.


“배고프다. 하... 집에서 먹을 것 좀 챙겨올 걸.”

“조교님이 물 외에는 음식 절대 가져오지 말라셨잖아. 몰래 가져와도 다 알 수 있다고.”

“그랬으면 씨바 밥을 줘야지! 어제 점심 이후로 만귀  말고는 입에 댄 게 없어. 누가 그냥 산에다  던지고 알아서 챙겨먹으랄  알았느냐고. 것도 악마가 드글드글 거리는...”

“사냥... 해야겠지?”


유곰이 머쓱하게 은우를 쳐다보았다. 은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보고 사냥까지 하라고?”

“어제 아침에 보니까 사냥 되게 잘하던데, 너.”

“아아-”

은우는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스르륵 미끄러지며 드러누웠다. 어차피 사냥을 해서 셋째 날까지 먹고 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옆에 앉아서 염치도 없이 숟가락을 얹는  인간은 갑자기 뭐란 말인가?


“-너는 나한테 도움 되는 게 뭐냐 도대체?? 혼자서 사냥도 못 해, 싸움도  해, 그렇다고  번에 나를 말끔하게 치유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미안... 불 피우는 거?”


“난 개로 둔갑하면 추위도 안 타고 날고기도 잘 씹어 먹는데?”

“그... 그래? 대단하네...”

은우는 누운 상태 그대로 눈만 돌려서 유곰을 바라보았다. 유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그 꼴을 보니 어이없는 분노가 더더욱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너- 뭐- 하, 차... 어이가 없네... 나는 왜 따라오겠다고 한 건데?  쓸모를 말해봐.”

“...지금 당장은 말해주기가 그렇네.”

“뭐라도 하나 말하지 않으면 성냥만 뺏고 너는 여기 버리고 갈 거야. 아니, 네 주머니를 통째로 뺏고 너만 놔두고 갈 테니까.”

“윽, 농담이지? 그런 무서운 농담 싫다~?”

“농담 같냐? 장난해? 아! 이딴 자식 데리고 오지 말  그랬어!! 내가 미쳤지, 잠을 못자서 미쳐가지고 별 쓸모도 없는 인간을 등에 태우고 낑낑...”

은우는 주먹으로 땅을 쾅쾅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가 주먹질을 할 때 마다 유곰은 움찔움찔 놀랬다. 유곰은 너무 미안하고 겁이 난 나머지 옆으로 살짝 몸을 옮겼다.


“미안해... 은우야, 나 쓸모없지 않아.”


“존나 쓸모없어.”


“너한테 꼭 도움이 될게. 믿어줘. 지금은 진짜 쓸모없게 느껴지겠지만...”

유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말을  다 하지도 못하고 흐리더니 손톱 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은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유곰을 더 무섭게 했다.
그들 사이의 침묵이 점차 숨 쉬기도 힘들 정도로 무거워지자 유곰은 힘겹게 입을 열어 뭐든 간에 말을 해보려고 했다.

“진짜  버리고 가려고 생각하- 어마나!!”


유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은우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곰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나뒹굴었다. 갑자기 일어선 은우는 엎어진 유곰 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앞으로 슬슬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빠르게 걸어가면서 머리를 털더니 어느 새 큰 개의 모습이 되어 마침내는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유곰이 기겁해서 자리에서 튕겨나듯 따라 일어섰을 땐 이미 청회색 사냥개는 안개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유곰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바로 그를 따라갈 엄두도 못 내고 자리에 엉거주춤 입만 벌리고 섰다. 은우가 정말 자길 버리고 가 버렸다. 은우는 아무 것도, 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유곰은 정신을 퍼뜩 차리고 은우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갔다. 은우의 이름을 크게 입 밖으로 부르짖으려 할  갑자기  개가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토끼 한 마리를 입에  채였다.
유곰은 그 자리에서 우뚝 섰다. 은우는 방금처럼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몇 걸음 지나쳐서 걸어가더니, 입에 문 토끼를 모닥불 언저리에 툭 던졌다. 은우는 도로 몸을 돌려 걸어가면서,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서 가만히 서있는 유곰에게 톡 쏘아붙였다.

“손질하고 굽는  네가 해라.”

“어, 어?”


“요리 정도는 네가 하라고! 사냥은 내가 하니까!! 이 답답한- 어우...”

은우는 사납게 말을 내뱉더니 진절머리 난다는  머리를 털고 다시 안개 속으로 뛰어나갔다. 유곰은 쭈뼛거리며 서 있다가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후다닥 불가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어떻게든 같이 꼽사리 낄 수 있게  모양이었다. 유곰은 바보스런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가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토끼 가죽을 벗기는 동안 은우가 몇 번 더 드나들며 작은 동물들을 무심하게 던지고 갔다.

-


사람 손을 전혀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밀림을 헤치고 나아간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단순히 ‘쉬운 일이 아니다’ 정도가 아니다. 그래, 미친 듯이 힘들다. 토할 것 같다. 발바닥이 아프다. 배고프다 등등...
정신을 반쯤 빼놓고 걸어가던 서리나린은 한 나무에 퍽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박았다. 당연하지만 일부러 박은  아니었다. 그녀는 천천히 팔로 나무를 짚으며 머리를 뗐다. 얼마나 오래 걸어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얼마나 멀리 왔느냐’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서 자기가 내려온 길을 올려다보았다. 당연하게도 눈에 보이는 거라곤 안개뿐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나무에 기대서 주르륵 미끄러지듯 앉았다. 최대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려 고는 했지만 이토록 험한  속에서는, 게다가 이리 자욱한 안개 속에서는 자기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지 절대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지나가면서 나무에 칼집도 내어보고, 땅에 돌멩이로 표시도 해보고 하면서 최대한 직선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다 소용이 없었다. 이 곳은 너무 험했고 시야는 불친절했다. 걸어가면서도 지금 이동하고 있긴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서리나린은 그냥 그런 헛짓거리를 모두 포기하고 일단은 내리막으로 걷기만 했다. 최소한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것보다야 멀리 나아갈 거란 생각에서였다.
반복되는 똑같은 풍경, 그리고 안개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무한한 안개 지옥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녀는 자기가 어느 방향으로 걷고 있었는지 잊지 않으려고 단검을 땅에 놓고 날 끝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 넓디넓은 시험장도 끝은 있을 거고,  어딘가에는 벽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내일 생명의 등불이 뜨면  벽에 문이 생길 터이고. 훈련생들은 문이 있는 동안에 나가야 했다. 그녀는 벽이 외따로 놓여있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낮 동안 이었고, 그 시간동안  안개 구덩이를 싹 다 뒤져서 문이든 벽이든 찾아내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이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유리한 시험이 아니었다. 당연히 노력 없이 운으로만 성공할 수도 없게 만들어진 시험일테다. 이건 험지를 최대한 많이, 열심히, 끊임없이 탐험하는 자질을 보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무언가 단서를 찾아서 정직하게 돌아다녀야 했다. 최소한 서리나린은 그렇게 해석했다.
그런 생각까지 드니 이렇게 가만히 쉬고 있는 시간조차도 아깝게 느껴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간이 아깝다기보다는,  안개 너머에 그녀가 찾아 헤매는 게 분명히 있는데 여기서 가만히 앉아 있는 자신이 게으르게 느껴졌다. 어쩌면 바로 앞에 있을 지도 몰랐다.
그녀는 누가 일어나라고 호통 친 것 마냥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빈둥거리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뭘  수 있는지 당당히 보이고 싶었다. 점차 발걸음이 출발했을 때처럼 가벼워졌다. 자랑스럽게 내보이리라.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얼마나 대단한 걸 해보일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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