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7장. 유등축제(4)
서리나린은 전날 일찍 잠든 덕에 눈이 반짝 하고 떠졌다. 그녀는 축제 전 날이라고 설레서 밤잠을 못 이루고 하는 성격은 아녔다. 그녀의 다소 맹한 성격은 달리 말하자면 무슨 별난 일이 일어나든 무덤덤하게 잘 받아들이고 크게 놀라진 않는단 뜻이었다.
힘차게 이불을 재끼자 으레 맞은편에서 쿨쿨 자고 있을 이민이 자리에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너도 놀러가?”
“당연한 거 아냐? 1년에 한 번 있는 축젠데.”
이민이 경쾌하게 말했다. 평소 더벅한 머리로 대충 다녀서 마치 회갈색 갈기를 가진 사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그녀는 어느 새 차분하고 귀염상인 소녀가 되어있었다.
“어제 일 안 했어?”
“했지. 들어와서 4시간 밖에 안 잤어.”
“와우.”
“최선을 다해서 놀 테다-”
이민은 결연하게 중얼거리며 화장대에서 일어났다.
“-넌 훈련생들이랑 놀러가겠지? 나 보면 아는 척 해줘. 오빠랑 같이 다닐 거야.”
“재민 씨?”
“아직 말 안 놨었나? 그냥 놔버려~ 오빠 그런 걸로 삐딱하게 굴진 않는다고.”
“헤에... 일찍 나가네.”
“얼른 놀고 저녁에 쪽잠 자야하거든. 그리고 지금 나가야 오빠 일할 시간이라 옆에서 음식 냄새 풍기며 놀릴 수 있어, 키키키.”
이민이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서리나린도 킥킥 웃었다. 이민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애들이랑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백호섬 입구에서 9시, 오빠랑...”
서리나린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어제 저녁, 뒷섬에서 벗어나려는데 유곰이 다가와서 일러줬던 게 떠올랐다. 그 때도 다른 여자애들은 킬킬 웃으며 보고 있었고 미치도록 민망했다. 그 기억이 떠오르니 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오빠 누구?”
“...”
“헉, 설마 서리나린 너- 남자 만나니?”
“...”
입꼬리가 마구 뒤틀려서 꾹 깨무는 그녀였다.
“진짜?! 세상에! 너 당장 일어나!!”
“응? 왜?”
“남친 만나는 데 그러고 나갈 거얏-?!”
이민이 호들갑을 떨며 서리나린에게로 다가와 침대에서 끌어내렸다.
“남친 아니야! 아직 그럴 마음 없어. 그냥 만나자고 해서...”
“그럼 더더욱 열심히 꾸며야지! 당장 씻어! 씻고 나와!”
이민은 서리나린을 완전히 끌어내려서 욕실로 등을 팡팡 밀었다. 서리나린은 엉거주춤하게 욕실로 걸어갔다.
“뭐, 뭐하게?”
“너 화장품 없잖아? 아니, 화장품 쓰라고 줘도 화장할 줄 모르지? 내가 해줄게! 당장 씻고 나와.”
“야, 그럴 것 까진-”
“어허!”
이민은 짐짓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섰다. 이렇게 된 거 도와주겠다고 나선 이민의 시간을 지체시킬 순 없었다.
서리나린은 민망해서 고개를 저으며 욕실로 도망쳐 들어갔다.
-
유곰은 금빛섬에서 백호섬으로 넘어오는 다리 주변에 있는 해시계 옆에 서있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정말 시간이 궁금해서 보던 건 아녔다.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참 신세가 처량했다. 아무 것도 모를 서리나린도 참 처량했고.
“오빠?”
서리나린이 유곰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려다가 그만 딱 멈추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리나린이 머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서리나린은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꽤나 예뻐진 상태였다. 옷차림이야 평소와 같았지만 이민이 얼굴에 조금 손대준 것만으로 그녀는 눈에 띄게 확 예뻐졌다. 화장을 해주던 이민이 많이 만지지도 않고선 감탄하고 일어나더니, 더 이상 손댈 데가 없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물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욕심이 남는지 계속해서 서리나린의 얼굴을 붙잡고 혼을 다해 꾸며 주었다.
서리나린 스스로도 자기한테 화장이 그렇게 잘 받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민망했지만, 그녀가 거울에서 본 모습은 오래 전 꿈에서 본 눈부시게 아름답던 그 나신의 여자와 참 닮았더랬다. 물론 꿈속의 여자처럼 엄청난 몸매는 없었지만 말이다.
서리나린은 백희처럼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다. 사실 뭐 그렇게까지 숨 막히게 예쁜 건 아녔다. 다만 지금, 평소 대충대충 다니던 얼굴에 빗대 분위기가 전환됐을 뿐이다.
그녀와 이민만 그렇게 느꼈던 건 아닌지, 유곰도 뭐라 말을 못 꺼내고 한참을 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깔고 있던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 진짜 예쁘게 하고 왔구나.”
“으악! 그러지 마세요. 어색하잖아요, 오빠.”
그녀가 한쪽 얼굴을 찡그리고 웃어보였다. 절대 예쁜 척하는 표정은 아녔다. 덕분에 평소 그녀의 분위기가 돌아왔다. 유곰이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진짜 예쁜데? 평소에도 그렇게 꾸미고 다니지 않고.”
“제가 화장한 거 아녜요. 같이 사는 애가...”
그녀는 짐짓 눈을 돌리며 웃어보였다. 정말정말 민망했지만 그녀는 현재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은 엄청 예뻤다! 이 상태로는 누가 보던지 눈을 번쩍 뜨며 호감을 심어주기위한 미소를 꾸며내서 그녀를 대하리라.
유곰이 왼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민 손을 잡았다.
“밥부터 먹자. 먹고 싶은 음식 있어?”
“별로. 전 아무거나 잘 먹어요.”
‘단무지 빼고요.’
“내가 이 마을 맛집은 속속들이 다 알고 있거든. 오빠 한 번 믿어볼래?”
“그러죠.”
그가 시시덕 웃었다. 어제 엄청 부끄러워하던 것과 달리 지금은 묘하게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별 생각 없었다.
오랫동안 축제를 준비하며 여기저기 천으로만 비밀스럽게 덮여있던 백호섬 시장통이 오늘에서야 덮개를 벗고 준비해온 자태를 뽐냈다. 각 초가집과 나무 위로 줄이 매이고 거기엔 현란한 종이 등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여기저기서 신명나는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물론이었다.
그녀는 절로 신이 났다.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그가 그녀를 돌아보더니 미소 지었다.
“너는 축제 처음이지?”
“네!”
“딴 건 몰라도 천공의 제도 비밀 맛집들은 다 알려줄게. 애초에 이 축제도 먹고 마시는 게 주된 목표거든.”
그는 한 국숫집 밖에 난 평상을 가리켰다. 그녀가 통통 뛰어가서 앉자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여유롭게 앉았다.
가게 바깥에 큼직한 가격표가 세로로 세워져 있었다. 이 세계엔 글이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정보를 써놓아야 할 땐 그림문자를 이용했다. 서리나린은 한눈에 이해하기 어려워했지만 유곰은 어찌나 오래 살았는지 표를 보지 않고서도 가격을 척척 알았다. 혹은 그가 이 식당에 단골이라 그런 걸지도.
그가 읊어주는 음식 이름과 가격을 열심히 듣고 그녀는 생각에 빠졌다. 어젯밤 헤뢴이 무정하게도 한 푼도 더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진 돈이 그리 많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축제를 즐기기에는 충분한 돈이었지만 앞으로 계속 생활비로 써야하는 돈이었다. 사실상 헤뢴에게 빚진 돈이기도 했고.
그녀가 바로 결정을 못 내리고 고민하고 있자 그가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내가 사줄게.”
“네? 아, 그럴 필요 없어요.”
“괜찮아. 내가 오늘 다 내줄게. 먹고 싶은 거 시켜.”
“헉, 오빠...”
“이래 봬도 나는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사람이니까.”
“저 빚지고 사는 거 싫어해요. 그냥 제가 살게요.”
“내가 만나자고 했으니 내가 다 내게 해줘.”
“그치만 오빠, 오늘 하루만 만나고 말 것도 아닌데 첫날부터 그렇게 돈을 쓰시면 앞으로 부담스러우실 텐데요-”
그녀는 엉겁결에 말을 내뱉자마자 되레 지가 놀라서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이어 말했다.
“-아, 아니, 앞으로도 계속 만날 생각이란 건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정말 칼같이 나누는 구나.”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앗, 그냥 제가 빚지기 싫어서 그런 거 에요...”
“그래. 그럼, 네가 편할 데로 해.”
조금 주눅 든 기세였다. 그녀는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른 주문했다. 아직 손님이 몰리기 전 아침이라 그런지 뜨끈한 손칼국수 두 그릇이 금방 나왔다.
그녀도 꽤나 빠르게 먹는 편이었지만 유곰에 비할 바는 못 됐다. 그는 먹는 걸 보기만 해도 배부르단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복스럽게 잘 먹었다.
“오빠, 진짜 빨리 드시네용.”
그녀가 면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금세 다 먹고 여유롭게 있으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맨날 그녀 앞에서 눈총 받으며 밥 먹던 헤뢴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천천히 먹어도 돼.”
“저도 빨리 먹는 편인데.”
“흐흐, 이 몸집은 숨 쉬다가 불린 게 아니라구.”
“여기서도 살이 쪄요? 제 말은-”
그녀가 문득 물었다.
“-이 세계에서도 체형이 변해요? 나이는 안 먹잖아요.”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아니야. 자기 심리 상태에 따라 변하는 거지. 하하, 솔직히 내가 먹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데 날씬한 체형으로 있으면 치사하지 않겠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오빠 정도면 건강한 편이죠. 너무 마르면 별로에요.”
“하하! 빈말이라도 고맙네.”
두 사람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그와 대화하는 게 편했다. 한편으로는 그에게 단 한 치도 연정이 없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어 불편해졌다. 복잡한 그녀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도 정말 고민걱정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난 몰라도 이 오빠는, 좀 불편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평소랑 똑같네.’
그녀는 칼국수를 먹는 척 유곰의 얼굴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그는 시장을 지나가는 한 무리의 사당패를 웃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어제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게 시이나가 말했던, 그 ‘연륜’이란 걸까?
그녀는 시답잖은 생각에 먹던 걸 풉 뿜으며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먹어도 된다니까. 물 줄까?”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댔다. 그러나 그는 친절하게도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그녀는 민망해서 일부로 눈을 들고 자기도 사당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소 사당패 왁자지껄한 시간대엔 시장통을 지나지 않기도 했지만, 돈 나가는 게 무서워 판이 벌어진다 싶으면 호다닥 도망다녔다.
아니나 다를까 국숫집 평상에 앉아있기만 하는 그들에게도 개 가면을 쓴 작은 여사당이 양손으로 치마를 들고 나아와 자연스럽게 벌려보였다. 서리나린이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 유곰이 빠르게 두 사람 어치의 돈을 건넸다. 여사당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그 때, 한참을 느린 박자로 작게 쳐대서 의식조차 되지 않았던 북소리가 점차 고조되었다. 좌중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오색의 별난 옷을 내어 입은 남녀 혼성의 사당들은 하나 같이 가면을 써서 그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니, 남녀 옷을 나눠입었다 뿐이지 실제 성별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북치는 소리에 맞춰 다른 사당들도 제각기 매어진 악기를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아직은 단순히 그 음을 맞추기 위해 조율을 하는 단계에 불과했지만, 서리나린은 먹던 국수를 놓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처음엔 각기 따로 놀던 악기 소리가 차츰 합을 이루어 갔다. 그 기묘한 화음의 순간은, 그야말로 소름이 돋도록 아름다웠다.
그녀는 국수에 관심이 뚝 떨어져 천천히 몸을 돌리고 앉았다.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제까지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던 이들도 입을 닫고 무대를 돌아보았다.
사당들 중 가장 앞에 나와 서있던, 오색 치마를 두르고 토끼 모양의 가면을 쓴 광대가 목을 푸는 선창을 시작했다. 밝은 금색으로 빛나는 긴 머리를 끝까지 땋아서 화려하게 장식을 올린, 작은 체구의 그녀가 입을 열자 드넓은 시장통이 오롯이 그녀의 우렁찬 목소리만으로 꽉 찼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라보는 가운데, 작은 가수가 뛰어난 가락을 뽑았다. 가볍게 목을 푸는 소리였지만 그 정도만 들어도 엄청나게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가진 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흠흠 목을 가다듬자 시장 구석에서 작은 환호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