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7장. 유등축제(21)
‘기의 흐름이란 이런 느낌이구나. 이걸 다루는 데 익숙해지면 접촉하지 않고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는 걸까?’
마기를 다루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건 시였다. 처음 그는 부채를 들고서 능력을 다뤄서 부채에 무슨 마법이라도 들었나 싶었지만 나중엔 맨손으로 지휘하는 것만으로 물을 다루었다.
그녀는 우레가 바람을 부르는 모습도 몇 번 본 적 있었다. 그는 움직임 거의 없이 미세한 손짓만으로 일상적으로 바람을 불러냈다. 마을에 온 첫날에 본 이리도 손짓만으로 큰 돌풍을 만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움직임 없이 힘을 다루는 데 가장 능숙한 건 다름 아닌 죽음이었다. 그는 눈을 들어 흘깃 보는 것만으로 온갖 기묘한 현상을 일으켰다.
서리나린은 손을 도로 소매 속으로 집어넣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이제 직접 접촉하고 있는 와중에 서로 살짝 섞이는 정도만 겨우 한 번 경험해본 햇병아리였다. 뚜렷한 힘을 다루는 남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녔다.
뭔가 맥이 빠져,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마기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법을 배울 순 없으려나? 이론 수업시간에 배우기도 하지만 좀 더 자세하게는...
아, 그런 거 가르쳐 주는 데가 가문이구나. 하지만 큰 가문에 속하려면 거기서 다루는 술과 비슷한 능력을 미리 갖고 있어야 하잖아. 능력은 하나가 생기면 끝인가? 다른 능력을 배워서 쓸 순 없나??’
그녀는 뒤를 짚고 몸을 쭉 뻗었다. 지금 가진 능력이 해괴하긴 해도 사실 그리 싫진 않은 그녀였다.
‘일그러진 우상을 유지하면서 다른 능력도 가질 수는 없을까? 정 다른 걸 가지려면 지금 가진 걸 포기해야하나? 있는 능력을 포기 할 수도 있나?
기억을 지우면 되겠구나... 근데 그러면 여기 와서 산 인생 대부분을 잊을 테니 성격이나 외모가 바뀌어 버릴 수도.’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무영이 돌아와 지척에 섰다.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서리나린, 서리나린. 잠시만 나 따라 와볼래?”
“왜?”
“와서 저것 좀 같이 보자.”
“뭐를?”
“엄청 예쁜 장소 발견했어.”
그녀는 별 생각 없이 몸을 일으켰다. 무영은 싱긋 웃어 보이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 안쪽을 손짓했다. 그녀는 멍하게 그가 가리킨 구석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우뚝 굳었다.
“너 손 안 씻었지.”
“어? 아, 아니? 씻었는데?”
“손에 물기가 없잖아.”
“헤헤, 닦아서 그래.”
“차갑지도 않은데?”
“따뜻한 물로 씻었거든.”
“따뜻한 물이 있었다고? 간이 변소인데?”
그녀는 멍하게 되물었다. 그가 태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다는데 더 다그칠 수는 없어 그녀도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럼 뭐...”
“것보다 얼른 이리 와 봐봐.”
“왜? 거기 뭐가 있는데? ...허어-”
그녀의 물음은 앞서간 그가 풀을 걷어보이자 숨 들이마시는 소리로 변했다.
그들이 앉아있던 터와 그리 멀지않은 지척, 어두운 숲 안쪽에 수백 개는 될 법한 작은 연둣빛이 밝게 빛났다. 그녀는 연신 감탄을 내지르며 반딧불이 가득한 숲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와! 우와! 진짜 예쁘다... 이런 거 처음 봐.”
“예쁘지? 같이 보고 싶어서 불렀어.”
“잘했어. 진짜 예쁘다. 마을에는 반딧불이가 없나? 정말 처음 봐.”
들뜬 그녀는 숲 안쪽으로 걸어가다가 무언가 안 보이는 줄에 걸려서 흠칫 멈췄다. 나가지 말라고 자경단이 쳐놓은 줄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무영은 이미 줄 바깥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는 예쁜 반딧불을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
“마을에는 이 정도로 많이 없을 걸. 과연 사람들 발길이 많이 안 닿는 숲답다.”
“무영아, 줄 넘어가면 안 돼.”
“엇, 내가 줄을 넘었나? 이런-”
그는 뒤를 보더니 몇 발짝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그런데 살짝은 넘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멀리 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면 안 돼. 그냥 여기서만 보자.”
“저기 가보고 싶은데.”
“나도 그렇긴 한데, 그래도 규칙은 지켜야지.”
그녀는 무영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손을 맞잡았지만 줄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끌어내려는 듯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당겨져서 무릎에 줄이 걸려 휘청했다.
“어엇, 야, 잠깐- 당기지 마.”
“조금만 나와 봐.”
“왜? 야아! 나가면 안 되잖아.”
“쉿-”
그가 손가락을 들어 입가에 대며 그녀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조명에 그의 어렴풋한 턱선과 보랏빛 눈동자가 비쳤다.
“-나 믿고 한 번만, 와 봐봐.”
“뭘 믿는데?”
“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어디? 저 밖에?”
“응.”
“뭐?”
“나와 봐.”
“왜?”
“아니,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그녀는 입을 벌리고 눈만 깜빡였다. 뭔가... 깊이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짐짓 쳐다보는 꼴이, 그녀가 뭐 답답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투였다. 그의 눈동자를 보면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고민 없이 줄을 가볍게 넘어 그에게로 붙었다. 그가 씨익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뭘 보여줘?”
“일단 따라 와.”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고는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녀도 어리벙벙해서는 거의 들리다시피 해서 따라갔다.
몇 걸음을 걸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길이 어둠에 싸여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조용히 모여 있는 터가 그리 멀진 않았다. 그녀는 다시 앞을 보았다.
반딧불이 자그마하게 빛나곤 있었지만 길을 비추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꼭 붙었다.
“길이 하나도 안 보여.”
“난 잘 보여. 나한테 붙어.”
“발밑이 불안한데-”
그가 걷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녀도 얼떨결에 속도를 맞추다가 불현 듯 무언가를 깨닫고는 놀라서 몸에 힘을 줬다.
“-허억!”
“왜?”
“아니, 아-!”
“늘었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서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여태껏 가볍게 끌어안고만 있던 그가 갑자기 힘을 주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명이 크게 퍼지기도 전에 무영이 그녀의 입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당황해서 버둥거리는 그녀를 단단하게 감싸 안으며, 그가 다정하게 웃었다.
“왜 그러는데? 왜?”
“읍-”
“서리나린, 소리를 그리 크게 지르면 사람들이 여길 볼 거 아냐. 다들 폭포나 보게 하자.”
“읍읍-”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발버둥에도 굴하지 않고 간단하게 싸매서는 숲 안쪽으로 깊숙이 걸어갔다. 아니, 더 이상 걷는 속도가 아니었다.
그는 능숙하게 암흑을 뚫고 빠르게 나아갔다. 수풀과 나무줄기들이 그가 나아가는 대로 길을 비켜서더니 두 사람이 지나가자 도로 원래 자리로 뻔뻔하게 돌아갔다.
서리나린은 완전히 겁에 질렸다. 어둠 속을 점점 더 빨리 이끄는 감각, 나아가는 대로 주변 사물들이 길을 터주는 현상, 전에 봐서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발에 힘을 주고 땅에 박아 넣었다. 하지만 발목이 우두둑 접질러지든가 말든가 무영은 계속 끌어당겼다.
그들이 아무리 숲 안쪽으로 나아가도 아련한 반딧불이 가득한 공터로는 한 치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이미 그 풍경은 서리나린의 관심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녀는 그저 자신을 꾀어서 데려가려는 악마에게 어떻게든 저항할 생각밖엔 없었다.
이대로는 안됐다. 그녀는 마음 굳게 먹고 아주 발악을 하고 들었다. 무슨 나무뿌리 같은 게 다리에 스치자 발목이 부러질 각오를 하고 거기에 발을 걸쳤다. 무영은 앞으로 나아가려다 우뚝 걸려서는 잠시 멈췄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그녀는 몸을 틀어 빠져나왔다. 무영의 팔 한쪽이 살짝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뒤돌아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뿌리에 발목이 걸려있어 나아가진 못하고 그대로 땅으로 엎어졌다. 반대로 꺾인 발목에서 엄청난 고통이 올라왔다.
“으악! 아아... 으으아...!!”
그녀는 얼른 발을 제대로 돌리고는 아픈 다리를 싸맸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프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선 안됐다. 그녀는 황급히 상체를 들고 두 팔만 이용해서라도 기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론 얼마 나아가지도 못했다.
땅을 짚은 왼손을, 무영이 거칠게 밟았다. 손등에서 뼛대가 꺾이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아아악!!”
“안 되지~ 얌전히 있어. 여기까지 오면 아무리 소리 질러도 쟤들은 못 들어.”
“이... 이... 무슨...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헤에, 확실히 늘었네. 전에는 암 것도 모르는 영혼이었는데.”
그녀는 손을 밟힌 그대로 눈을 들어서 애타게 전방을 바라보았다. 온통 어둠뿐이라 얼마나 떨어졌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모여 있던 터가 더 이상 보이지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그녀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우성을 쳤다.
“나한테 왜 이러냐고, 너굴민!”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네. 진정해!”
너굴민은 손등을 밟았던 발을 슬며시 들어주었다.
그녀는 아픈 손등을 더듬었다. 얼마나 세게 밟혔는지 울룩불룩한 굴곡이 폭력적으로 남아있었다. 손가락이 안 움직였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흙을 긁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이래... 제발- 살려줘. 나, 난 소멸하기 싫어...”
“자, 일단 서리나린! 진정하자.”
“네가-끅,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그녀는 엎어져서 울먹거렸다. 푸른 숲,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 떠드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오던 평화로운 숲은 어느 새 그들의 말소리 외에는 적막만이 감도는 소름끼치는 암흑 공간이 되어있었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줄을 넘는 순간, 자경단의 힘이 미치는 결계를 넘은 순간에 이미 너굴민의 공간으로 들어 가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있는 터와 실제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고 하더라도 아예 다른 공간인 여기서는 절대 그 곳에 닿을 수 없었다.
서리나린은, 불과 얼마 전 간악한 너구리 악마에 대해 배운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공간 안에서는 모든 게 너굴민 뜻대로 였다. 혼자서 살아 나가려면 그가 자비를 베풀기만을 바라며 엎드려 비는 수밖에 없었다. 너굴민은 즉흥적인 성격의 악마여서 그녀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 순간에 끝장날 지도 몰랐다. 물론 빈다고 해서 그가 풀어줄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가 사람에게 직접 접근해 꾀어가는 일은 굉장히 드물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악마보단 괜찮은 악마로 볼 순 없었다. 그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자기 나타나 한 명씩 데려갔다. 아니, 희생자가 스스로 자길 따라오게 했다.
속임수에 당해 스스로 따라간 이들은 모쪼록 소멸하기 직전까지 유린당했다. 너굴민이 희생자를 직접 잡아먹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살만 하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는 희생자를 철저히 짓밟고 고문했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나면 누구나 미치게 됐다. 그리고 너굴민은 마구 짓이겨져서 더 이상 인간의 형태를 유지할 수도 없게 된 ‘덩어리’를 마을 밖 어딘가에 방치하고 유유히 떠날 뿐이었다.
자경단이 어떻게든 너굴민을 좇아 희생자가 마지막으로 버려진 곳을 찾아낼 때가 되면, 잔혹한 광경 한가운데 희생자의 영혼, 나비 형태로 회귀한 영혼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기만이었다. 나는 이딴 영혼 먹지 않아도 너희들보다 훨씬 강하고, 제멋대로며, 원한다면 언제든지 너희들 중 하나를 이 꼴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기만.
그렇게 나비로 회귀한 영혼들은 대부분 전의 자아를 되찾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환생의 길에 올랐지만, 몹시 드물게 다시 인간 형태를 취하는 수도 있었다. 다만 과거의 모습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정신이 멀쩡한 인간이 되는 것조차 기적의 확률이었다.
허나 많은 경우 자경단이 희생자를 수색해서 찾아간 때엔 이미 터가 깨끗해져 있었다. 흩뿌려진 피와 토막 난 몸뚱이 뭐든 간에 싸그리 사라지고 난.
영혼이 먹히면, 그를 담아두던 몸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너굴민이 대충 놔두고 간 영혼을 거길 지나다니는 다른 악마들이 가만둘 리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