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9장. 피를 좇는 고니(2)
생명의 등불이 서산 너머로 저물고 그녀의 눈길에 기죽어 있던 다른 미천한 조명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드는 시각, 헤뢴은 터덜터덜 자기 의원을 향해 걷고 있었다. 평소보다도 더욱 꼴이 엉망인 그를, 지나가는 이들은 혐오감에 가득한 눈으로 흘깃 쳐다보곤 했다.
다만 이제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헤뢴이었다. 그는 자길 째려보는 이들을, 어쩔 거냐는 눈으로 되레 하나하나 노려보면서 길을 걸었다. 많은 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를 지나쳐갔다.
그는 아무도 없을 썰렁한 금빛섬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금빛섬 의원은 단연코 섬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헤뢴은 긴 돌담을 따라 멍하니 걸었다. 그 바람에 대문 앞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흙색 무언가를 오래도록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대문 가까이에 다가서자 작은 사슴이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도 아시를 알아보고는 움찔 멈춰 섰다. 아시도 낯익은 사내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쫑긋이 흔들었다.
“뭐야, 너 여기 왜 있는 거야?”
적잖이 충격을 받은 헤뢴이 중얼거렸다. 거진 하루 온 종일을 대문 앞에서 기다리기만 한 아시가 순진하게 몸을 일으키곤 그에게 총총 걸음을 옮겼다. 헤뢴은 아시의 목에 달린 통까지 발견하고는 도망이라도 가려는 듯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야.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허나 주인을 쏙 빼닮아 뻔뻔한 아시는 깡총거리며 뛰어서 헤뢴에게 다가가, 그의 정강이에 친근하게 머리를 비볐다. 헤뢴은 질색을 하며 아시를 다리에서 슬쩍 밀어냈다.
“아시, 네가 모르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네 주인하고 왕래 안 한지 꽤 됐다고. 이제 와서 들러붙지 마라, 이 멍청한 놈아.”
그러나 아시는 계속 그의 다리 주변을 맴돌며 작은 머리를 비벼댔다. 헤뢴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고는 아시를 넘어 문에 걸린 자물쇠를 거칠게 흔들었다. 자기 목에 달린 대나무 통을 못 본 걸로만 안 아시가 끈질기게 통을 흔들며 주변을 맴돌았다.
헤뢴이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시도 그를 따라 문간을 넘었다.
“그냥 돌아가! 이 뻔뻔한 사슴 놈아, 가서 그 놈이 하는 말은 뭐든 궁금하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다고 전해!”
까칠한 헤뢴에 태도에 아시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에웅 거리는 울음을 냈다.
“애초에 그건 뭐야? 설마 편지야? 아- 돌아버리겠네, 진짜! 그 새끼는 왜 하지 말란 것만 골라서 하는 거냐?”
아시는 계속해서 에우웅 울음소리를 내며 그에게 아련하게 따라붙었다.
헤뢴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소식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기만 했을 아기 사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는, 목에 달린 대통을 열어서 안에 든 종이를 거칠게 꾸기며 꺼냈다.
“기어코 글을 쓴 거냐? 너는 네 주인 방에 있는 종이는 다 먹어버리지 않고 뭘 한 거야?”
헤뢴의 투덜거림에도 아시는 그저 임무를 완수했단 만족감에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헤뢴은 얇은 종이를 펼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종이에 쓰인 건,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 베베 꼬인 글자였다. 혹자는 이를 보고 그냥 마구잡이로 낙서를 해놓은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겠지만, 적어도 헤뢴에게는 아니었다. 능숙하게 글을 읽어 나가는 그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갔다.
“나보고 어쩌라고?”
헤뢴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지만 아시는 반려술로 이어진 제 주인과만 소통이 가능하지, 헤뢴 앞에선 평범한 동물이었다.
“아시. 아니, 소낙. 잘 들어-”
그는 허리를 숙여 아시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 건은 나랑 한 치도 관련이 없어. 나는 천공의 제도가 망하든, 멀쩡히 잘 돌아가든 상관없다고. 알아듣겠냐? 너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다가 몇 명씩 소멸해 나가도 알바야? 내가 소멸하는 거 아니면 관심 밖이야. 어차피 사람 몇 없어지더라도 이 마을의 존멸에는 별 영향 못 미친다니까.
그래, 이 김에 너도 그냥 휘말려서 콱 뒤져버려. 네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든 간에 말이야, 도움 줄 생각 없으니까. 모두 대의를 위한 거라는 그 알량한 꾐에 속을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어, 이 위선적인 이상주의자야!”
그는 말을 전한 후에 매몰차게 몸을 일으켰다. 아시가 순진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큰 눈을 깜박였다.
“네 주인한테 가. 따로 써줄 답장 없다. 소낙이 네 기억을 되짚어 보면 내 답변을 듣겠지.”
그는 아시를 대문 밖으로 쫓아내려고 다리로 슬슬 밀어냈다. 아시는 밀려나지 않으려고 우뚝 버티고 섰다. 그러면서도 꼬리는 계속 살랑거리고 움직였다.
“이 건방진 꼬맹이가... 너 정도는 그냥 들어서 던지면 그만이야.”
헤뢴은 버럭 화를 내고는 안 밀려나려고 버티는 사슴을 번쩍 들어서는 옆구리에 꼈다. 그러자 아시가 버둥거리며 발악을 했다.
“왜? 왜 그러는데? 편지 전해줬으면 네 임무는 끝이잖아? 네가 보는 앞에서 읽기까지 했는데 왜 난리야? 돌아가라니까??”
그는 퉁명스럽게 나무 대문을 밀어열고는 사슴을 밖에다 세게 던져버릴 기세로 양손으로 들어서는 의외로 살포시 내려놓았다. 허나 아시는 에웅거리는 울음을 내며 헤뢴에게 붙어선 발을 동동 굴렀다. 그제야 헤뢴은 대충 읽었던 편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글이 빽빽이 적혀있는 앞면, 문득 종이를 뒤집어보니 거기도 글이 빼곡히 써져 있었다. 헤뢴이 편지 뒷부분을 읽는 걸 확인한 아시는 즉각 어쩔 줄 몰라 하던 걸 멈추고 얌전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허나 얌전해진 아시와 달리 헤뢴은 글을 한 줄씩 읽어나가며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 사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왜 이 놈들은 하나같이 나보고... 아니-”
헤뢴은 편지 뒷부분도 완전히 읽고는 종이를 팔랑이며 아시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당장 네 주인 있는 데로 가자! 이 같잖은 놈은 날 안 본지 몇 년이 넘었으면서 무슨 깡으로 나를 이렇게 넘겨짚는 거야?!”
헤뢴이 편지를 다 읽은 걸 확인한 아시가 꼬리를 흔들어 보이고는 깡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헤뢴은 열었던 문을 도로 걸어 잠그고는 작은 사슴을 따라 움직였다.
금빛섬 실개천 옆으로 난 길 위로 걸으며 그는, 글이 잔뜩 쓰인 종이를 마구 구겨서는 대충 품속에 넣었다. 그러고서도 분노를 다 가라앉히지 못해 씩씩 거리며 순진한 사슴을 따라 범내섬 의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가시는 겨우 한 숨 돌리며 3층 복도 한 켠에 팔짱을 끼고 섰다. 1층과 다르게 이 층은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지나가는 사람도 감히 딱딱한 표정의 가시에게 자처해서 말을 걸진 않았다. 그들은 그저 눈치만 슬슬 보며 자기들 업무에나 바삐 신경을 쏟았다.
그런 가시에게로 지팡이를 짚은 맹인 의사가 계단을 타고 올라 천천히 다가갔다. 가시가 오라비를 알아보고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찾았어? 미안. 이것저것 바빠서 이제 보네.”
“내 동생은 꼭 지가 날카로운 상태라는 걸 티를 낸다니까.”
마샤카가 그녀에게로 다가서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가시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이 곤두서서... 뭐 잘못 되가는 건 없는지 계속 확인하고 싶어져.”
“쉴 땐 좀 쉬라고. 그러는 모습이 더 어색해. 뭐, 너는 평소에도 깐깐하긴 하지만.”
“꼭 진행해야겠어?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인 것 같은데. 평소에 맡기던 거랑 전혀 다른 양상의 명령이라 제대로 못 따른 것 같아. 그냥... 그만 두자.”
가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샤카는 가시 옆에 나란히 서서 벽에 등을 기댔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유곰을 혼내는 건 또 별개의 일이고... 어찌 보면 오히려 일이 더 쉬워졌을 수도 있어. 무영 군도 유곰 못지않게 유순하잖아.”
“쉿! 여기도 사람들 다니는 덴데 겁도 없어.”
그녀가 발작적으로 쉿 소리를 내며 오빠를 나무랐다.
“뭐 어때? 내가 봤을 때는 네가 과민반응하고 있는 거야. 예민하게 굴 거 하나도 없다고.”
“오빠가 천하태평 한 거야! 일 났을 때도 그런 표정으로 있기만 해봐.”
“내가 무슨 표정을 짓는다고.”
“당황했거나 화난 표정 같은 거 좀 연습해 봐.”
“너도 하루 종일 눈 감고 살아봐. 표정이란 게 지어질 것 같니?”
“그 평온한 태도 때문에 의료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 오빠부터 비난하는 거야. 그 다음엔 나, 다음엔 여기서 일하는 분들. 이게 무슨 추태야? 오빤 창피하거나 억울하지도 않아?”
“오늘 왜 이렇게 까칠해?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
“‘아직’이라고? 이것 봐, 당장 오빠부터 여기서 무슨 사단이 나는 게 무슨 일상인 것 마냥 말하고 있으니... 정해진 사안처럼 굴지 마! 기분 나빠.”
“가시, 너 지금 진짜 예민해. 이상해.”
“...”
그녀는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 그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여린 조소를 지어보였다.
“네 생각 좀 물으려고 왔어. 무영 군-”
“쉿-!”
가시가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아, 알겠어. 그럼- 숙주? 숙주하고 대화를 해보는 게 어떨까?”
“무슨 대화?”
“협조를 구하는 거지. 무- 아니, 숙주는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야. 그 옛날 반려술 연구에 자진해서 참여한 것만 봐도 그렇잖아. 영혼 실험이나 연구에 협조적인 사람 흔치 않아.”
“...그래도 만약 싫다고 하면? 그 때랑 지금은 상황이 또 다르잖아.”
“그럼 두 번째 작전으로 가는 거지.”
“두 번째 작전이 있다고?”
“세 번째, 네 번째도 있어~”
“...경계할 텐데.”
“제깟 인간이 경계해봤자...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환자 신분으로 여기 온 이상 나한테 반항할 수는 없어. 이 의원은 내 본진이라고.”
“오빠, 제발, 그런 수상한 말투로 얘기하지 마. 오빠 진짜 도움 하나도 안 돼. 그냥 꺼져. 소멸해, 그냥. 소멸해!”
“가시는 피붙이한테 너무 까칠하다니까. 유곰이랑 합친 다음 반으로 나누면 딱 좋을 텐데.”
“오빠가 정신 똑바로 안 차리고 있으니까 하는 말-”
“아, 그만해! 잔소리할거면 됐어. 그래서 한 번 얘기해봐? 말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리가 아주 사악한 목적을 가진 것도 아니고, 다 모두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오빠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 당도한 그 순간의 협조를 구하긴 쉽겠지. 앞으로의 관리는 어떻게 할 건데? 눈독 들이고 있는 인간이 몇 명일지 몰라. 또 분명히 말해두지만 난 소낙을 속이긴 싫어.”
그녀가 딱 잘라 말했다. 그가 작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오빠보다 남편 편을 들겠다 이거지? 가시, 그 순진한 사랑꾼에 홀려서 우리가 무얼 추구하는지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소낙은 이용해먹기 좋은 순진한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정신 차려.”
“내 남자를 함부로 말하지 마. 소낙의 처분에 대해선 이미 얘기 다 끝난 걸로 아는데?”
그녀가 나지막이 으르렁댔다. 그도 뭐라고 더 쏘아붙이진 않고 그저 짜증스런 한숨만 내쉬었다.
“좀 더 오빠를 위하는 동생이었다면 좋았을 걸. 널 위해 치룬 대가가 너무 커서 속상하다, 진짜.”
“됐고, 그래서 숙주를 어떻게 할 건데?”
“...제일 쉬운 방법부터 시도할 거야. 숙주가 얼마나 협조적이냐에 따라 대응이 달라지겠지. 최악의 경우엔 강제로 집행해야 할 수도 있어. 솔직히 그 매만 없었어도 그랬을 거야. 처음부터 유곰 몸에 받아왔으면 얼마나 편했게.”
“미쳤어? 반려술사야. 영혼에 직접적으로 손대려는 짓은 집어치워. 아무리 감쪽같이 기워놓아도 소낙 눈을 피할 순 없어. 그 애를 속이는 게 조건이라면 난 결사반대야. 너굴민을 연구할 기회는 앞으로도 더 있을 거지만 소낙과의 신뢰는 한 번 무너지면 다시 못 쌓아.”
그녀가 조용히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