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발선 (1) >
그때의 난 휴게실에 틀어박혀 게임만 줄창 붙잡고 있었다.
그리 열정적으로 하던 건 아니었다. 그냥 어떻게 해야 시간을 더 창의적으로 쓰레기통에 던져넣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누가 한 번 해보라 해서 집어든 것뿐. 그런데 그런 게임 하나 떄문에 이렇게까지 마음이 흔들릴 줄은 몰랐다.
무슨 일이든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는 낙천적인 성격이야말로 내 장점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인식을 수정할 필요를 느낄 만큼 지금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아련히 흘러나오는 엔딩곡을 듣고 있자니 눈에서 눈물이 다 고일 지경이었다.
게임 만든 놈 멱살을 잡고 패버리고 싶어서 말이다.
“나가 죽어 진짜···.”
게임 패드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별짓 다 하면서 최종보스 잡아놨더니 뭐? 지하에 잠들어있던 마신이 갑자기 깨어나서 세상을 멸망시키고 끝이라고? 지금 당장 손에 쥔 패드를 화면에다 집어던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내 자제력에 박수를 쳐줄 수 있었다.
이 게임 해보라고 나한테 던져준 놈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걸까? 여기다가 대체 무슨 반응을 하라고? 그냥 내가 너무 싫어서 한 번 기분 잡쳐보라고 보내준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엔딩 크레딧이 다 지나갔다. 이내 화면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차피 재밌게 플레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이런 시답잖은 말들이나 적혀있겠지. 나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떠오른 창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혈통시대’의 튜토리얼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이후 회차부터는 새로운 선택지와 다른 엔딩들이 개방됩니다.]
[2회차를 시작하겠습니까?]
“그렇지 이거지 믿고 있었지!”
흥분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만들다 말면 말았지 미친놈이 아닌 이상에야 저딴 걸 정말 엔딩이라고 준비해놓지는 않았겠지. 요컨대 이제까지는 예행연습 같은 것이었고, 2회차부터 볼 수 있는 진짜 엔딩이 따로 있는 것이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제야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수락을 누르니 화면에 또 다른 선택지가 나타났다.
[오리지널 캐릭터로 시작하시겠습니까?]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름만 봐서는 정확히 뭐가 다르단 건지 감이 안 왔다. 도움말을 누르자 설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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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캐릭터에 대해서.]
주인공 캐릭터를 통해 ‘혈통시대’의 세계에 충분히 익숙해졌다면, 당신만의 오리지널 캐릭터로 작중의 무대를 자유롭게 누빌 수 있습니다. 어느 진영에서 어느 주인공과 우호를 맺고 적대할 것인지.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 단, 오리지널 캐릭터의 경우 게임 도중 세이브가 불가능하고, 한 번이라도 사망할 시 그대로 게임 오버가 됩니다. 주인공 캐릭터에게 주어졌던 혜택 또한 사라지기에, 여러 번 회차 플레이를 반복한 숙련자에게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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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유 하고 휘파람이 나왔다. 말하자면 오리지널 캐릭터란 건 고일대로 고인 유저들을 위한 하드코어 컨텐츠였다.
주인공들처럼 대단한 혈통이 있는 것도 아니니 초반에는 상당한 똥캐일 테고, 세이브 자체가 불가능하니 한 번이라도 죽으면 끝. 당연히 기반 세력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원래도 어려웠던 게임이 얼마나 더 거지같아질지 상상도 안 갔다.
제작자도 그걸 알고 있으니 주인공 캐릭터로 몇 회차고 반복해서 혈통시대란 게임에 통달하기 전까진 오리지널 캐릭터는 건드리지도 말라고 경고성 도움말을 달아놓은 거겠지.
세심한 배려에 가슴이 다 뭉클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절대 못 물러나지.”
원래 천성이란 게 이렇다. 나는 씨익 웃으며 오리지널 캐릭터로 시작을 택했다. 그러자 어딘가의 문이 끼이익 열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모든 것이 새까맣게 암전되었다.
여기까지가 일주일 전에 있었던 사건의 전모였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나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자조했다.
눈을 떴을 땐 모르는 방의 침대 위였다. 처음에는 게임하다 어디 뒤통수라도 후려맞고서 납치당한 건가 생각했지만, 요 일주일간 주변을 조사해보니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정말로, 그런 스케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의 커튼을 양옆으로 젖혔다. 창문 밖으로 길가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거리에선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왕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하나같이 머리에 짐승귀나 뿔 같은 게 나있었다. 내 상식과는 다소 동떨어져있는 풍경이었다. 인간의 머리엔 보통 저런 것들이 달려있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지금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해있는 건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요컨대 난 혈통시대의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것이다.
“좀 봐줘라···.”
또다시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이럴 때면 그냥 생각을 그만두고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실컷 자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이미 어제까지 질리도록 해본 일이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지에 대한 확고한 지침이었다.
우선은 지금 내 처지에 대한 검토부터였다.
어이없게도 이곳은 룸서비스로 식사까지 꼬박꼬박 나오는 고급 호텔이었다. 카운터에 문의하니 객실의 대금은 사전에 지불되어있었다. 방 안에 놓여있던 건 개통이 끝난 스마트폰과, 정체 모를 검은색 카드가 꽂혀있는 가죽 지갑 하나.
지갑 안에는 카드 말고도 내 신분증까지 들어있었다. 주민번호도 쓰여있고 신원조회도 가능한 제대로 된 신분증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손에 든 민증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사진 찍은 기억 없는데.”
하지만 분명 민증의 사진 안에서 환하게 웃으며 브이자를 내밀고 있는 건 나 자신의 얼굴이었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고 있는 건지. 아무튼 게임 속 세계에 들어온 것이니 이런 세세한 부분들은 어떻게든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진짜 문제는 마지막 물건이었다. 나는 책상 위에 고이 눕혀져 놓여있던 서류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 안에 들어있던 종이 맨 위에는 이러한 글자가 적혀있었다.
세한기사전문학교 수험표.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세한기전이라면 기사를 육성하는 학교 중에선 최고의 명문이자, 혈통시대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주무대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나 보고 세한기전에 들어가서 시나리오를 진행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안 가면 어떻게 되려나.”
실제로 안 간다는 방법도 있었다. 혈통시대의 주인공은 한 명만이 아니고, 세한기전 말고도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무대는 존재한다. 다른 곳은 전부 지나가는 놈이랑 눈 한 번 잘못 마주쳤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살벌한 곳이라는 게 문제지.
그런 곳들은 논외다. 그렇다고 계속 방 안에 틀어박혀있는다? 나는 휙휙 고개를 저었다. 세계 멸망. 게임으로 보았던 혈통시대의 결말. 주인공들에게 그냥 이야기를 맡겨놓았다간 이 세상은 높은 확률로 그것과 똑같은 꼴이 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게임 속 멸망에 휘말려 죽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시나리오를 따라가며 1회차와 같은 엔딩이 나지 않도록 개입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었다.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다. 결국 지금으로선 세한기전에 입학하는 게 최선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방에 놓여있는 전신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참 잘생긴 얼굴이다. 당연하지만 머리에 짐승귀나 뿔 같은 건 달려있지 않았다.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온몸 구석구석을 죽어라 살펴봐도, 내 몸뚱아리에서 혼혈이 연상되는 부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인간이니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저절로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어서 해탈한 미소였다.
용족이나 검귀 같은 사기적인 혈통은 바라지도 않았다. 딱 평범한 수준의 혼혈이기만 해도 나는 최대한 꿀을 빨 준비가 돼있었다. 하지만 이건 내 상정을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그냥 아무런 특징도 없는 순혈 인간. 뭔데. 이걸로 대체 뭘 어쩌라는 건데? 밑천이 없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이건 스킬 없이 맨몸으로 최종보스를 깨보란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임을 깨고 말고가 아니라 당장 세한기전에 입학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세한은 전국의 혈통빨 재능 덩어리들이 싸그리 다 몰려드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내가 그런 녀석들을 제치고 합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미간을 꾹 압박하던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시스템.”
그러자 스스슥하는 소리와 함께 아무 것도 없었던 공간에서 반투명한 화면과 문자열들이 나타났다.
설정상으론 따로 멋들어진 이름이 있지만, 평소엔 다들 간단히 ‘상태창’이라고 부르는 것. 혈통시대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신이 내려준 축복이었다.
사실 화려한 비주얼치고 그리 대단한 기능은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알기 쉽게 수치화해서 보여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단련 방향을 정하는 데엔 큰 도움이 됐다.
이곳에 떨어진 지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사실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야 척 봐도 비참할 게 뻔한데 굳이 들여다봐서 우울해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슬슬 현실도피의 마감 기한이었다. 행동에 나서기 위해선 내가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답이 없다면 정확히 얼마나 답이 없는지 확실히 알아둬야만 했다.
결심한 나는 상태창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순간 커다란 빛이 터져나오더니, 이내 시스템 전체가 지직거리며 온갖 문자와 숫자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뭐야?”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서서 조심스레 상태를 확인하자, 창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메세지가 떠올라있었다.
[염기서열 분석 완료. 순수 인간종으로 확인.]
[사용자 인증에 성공하였습니다. 시스템 접근 권한 레벨이 0→1, 손님(Guest)에서 사용자(User)로 갱신됩니다. 지혜의 열매와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기능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동기화니 권한이니 해도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겠다 해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없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 나는, 소파에 앉아 그 상태창의 새로운 기능들이란 게 무엇인지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시스템창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는 내 눈동자가 점점 이채로 물들어갔다. 올라간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답이 없다는 말은 취소였다.
“장난 아닌데?”
이거, 어쩌면 할 만할지도 모른다.
< 출발선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