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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3화 (3/113)

< 출발선 (2) >

세한기전의 사전 면접이 코앞으로 다가온 아침. 나는 캠퍼스 안의 벤치에 앉아 상태창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이 세계에선 남녀노소 누구나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게 상태창이었기에, 내 얼굴 앞에 반투명한 홀로그램 화면이 둥둥 떠있어도 아무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지금 내 상태창에 적혀있는 내용을 본다면 이게 뭐냐고 눈을 휘동그레 뜰 것이 분명했다.

[사용자 권한 인증에 성공하였습니다.]

[동기화를 완료했습니다. 현재 시스템 접근 권한 레벨은 1, 사용자(User)입니다. 추가 기능을 개방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상태창의 모양이 재구성되었다. 원래 상태창이란 건 자신의 능력치를 보여줄 뿐인 물건일 텐데, 어제 이후로 내 상태창에는 새로운 기능들이 추가되어있었다.

내가 수험표를 손에 들자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아이템 퀘스트 : 세한기사전문학교에 입학하십시오>

<보상 : 세한 시나리오 시작, 500 Credit>

나는 알림창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조금쯤 껄끄러운 기분이었다. 내 이름으로 접수된 수험표가 고이 준비돼있는 것도 그렇고, 누군가가 내게 시나리오를 진행하라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게임 속이니 당연한 흐름인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껄끄러움 따위로 안 하겠다 뻗대기엔 낚싯대에 걸린 미끼가 너무 컸다. 나는 보상 칸을 다시 읽어보았다.

‘500 크레딧.’

크레딧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는 어젯밤 내내 새로운 상태창을 살펴보며 충분히 숙지했다. 잡다한 설명 다 필요 없이, 크레딧에 관해 중요한 내용은 하나만 알면 충분했다.

크레딧을 투자하면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

처음 봤을 땐 눈을 의심했다. 원래 상태창의 능력치란 어디까지나 단련의 결과였다. 누가 하루 종일 운동해서 근육을 키우면 그 결과 근력 수치가 올라가있는 식이었다. 현실이 상태창에 반영되는 것이지, 결코 반대의 경우는 없었다.

그야 체중계 위에 표시된 숫자를 바꾼다고 해서 진짜로 몸무게가 늘었다 줄었다 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크레딧으로 상태창의 능력치를 올리면 실제로 힘을 키울 수 있었다.

이는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아무런 혈통도 없는 나라도 괴물같은 혼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정직한 단련과 달리 상태창을 이용한 성장에는 한계가 없다. 나중에는 그 검귀나 산군 혼혈조차 나를 정면에서 쓰러뜨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라 그런지 마력 스탯은 아예 누락되어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런 결점을 감안해도 상태창의 능력치를 능동적으로 올릴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어드밴티지였다.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크레딧 벌 기회도 늘어나겠지.’

시간은 내 편이다. 실기고사까진 2주 넘게 남아있으니, 그때까지 턱걸이로라도 합격할 수 있게 최대한 몸을 키워놔야 했다. 당연히 오늘 면접에서도 점수를 따놓아야 할 테고.

나는 풍선껌을 입에 넣고 주변의 면면들을 살펴보았다. 혹시 아는 얼굴이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면접으로 한 번 걸러지기도 전이니, 이 근처에 있는 놈들 중 정말로 입학할 녀석은 고작해야 하나나 둘 뿐일 것이다.

면접을 앞둔 녀석들의 모습은 가지각색이었다. 미아가 된 것처럼 끊임없이 똑같은 곳을 돌고 있는 놈도 있고, 벽에다 머리를 박은 채 뭐라 중얼대며 정신 집중 비슷한 걸 하는 녀석도 있었다. 두 쪽 다 별로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녀석은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지금 가면 면접에 늦을 것 같단 얼굴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보는 내가 다 슬퍼지는 광경이었다. 긴장한 건지 아니면 느긋한 건지, 자기 수험표를 땅바닥에 흘리고 다니는 녀석도 있었다.

‘조심 좀 하지 참.’

유감스럽게도 배탈이 난 놈은 내 힘으로 도와줄 수 없지만, 떨어뜨린 걸 주워주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나는 바닥의 수험표를 집어들고 앞에 걸어가고 있는 녀석을 불러세웠다.

“저기.”

“응?”

지나가던 애가 슥 이쪽을 뒤돌아보았다. 깜짝 놀란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나는 반가움과 신기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손에 든 수험표를 그녀에게 내밀어주었다.

“이거.”

눈짓으로 땅바닥을 가리켜 떨어져있었다 전했다. 잠깐 내 얼굴을 쳐다보던 그녀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아. 아아! 고맙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

수험표를 받아든 그녀가 감사를 표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속으로 역시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딱딱한 말투까지 틀림없었다. 내 눈앞에 서있는 여자는 혈통시대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진소란이었다. 반응조차 힘든 속검을 특기로 하는 세한의 차기 선도부장.

확실히 자세히 보니 허리와 어깨에 그녀의 혼혈로서의 특징인 새까만 날개가 가지런히 접혀있었다. 스킬 구성이 재밌어서 맨날 동료로 영입해 쓰던 캐릭터가 눈앞에 서있으니 정말 내가 게임 속에 들어와버린 거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그렇게 빤히 진소란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턱에 손을 붙인 채 눈썹을 찌푸렸다.

“음. 뭔가 보답이라도 해야 할 텐데. 네 이름은···.”

나는 급히 손을 올려 진소란의 말을 제지했다.

“그건 나중에.”

“응?”

“자기소개는 서로 합격하고서 하는 게 깔끔하지?”

지금 이름을 밝혔다가 영영 못 볼 사이가 되면 영 찜찜했다. 내 말에 진소란은 의표를 찔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웃으며 목례한 그녀는 등을 돌리고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진소란의 등을 바라보며, 상태창에 새로 추가된 기능 중 하나인 ‘열람’을 발동했다. 다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태창을 슬쩍 확인해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자 내 눈앞에 진소란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

[이름] 진소란

[혈통] 백익 혼혈 (돌연변이)

[능력치]

근력 18 민첩 31 내구 14

감각 24 마력 19 주력 24

[특성]

······

────────────────

알고는 있었지만 참 대단한 능력치였다. 특히 30을 뚫어버린 민첩은 같은 학년에서 경쟁자를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수치였다. 나랑 비교해선 어떻냐고? 일단 내 능력치엔 5를 넘어가는 게 없다는 사실만 조심스레 밝혀두도록 하자.

딱히 그것에 비굴해질 필요는 없었다.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다 보면 마지막에 웃는 건 내 쪽일 테니까.

그래. 우선은 세한기전에 합격하는 것부터였다. 나는 느긋하게 휘파람을 불며 면접실까지 걸어갔다.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자기 페이스까지 잃고 싶진 않았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얼마 안 있어 내 번호가 호명되었다.

“수험번호 161번부터 165번까지 들어오세요.”

시간이 됐다. 나는 함께 불린 녀석들과 같이 일어나 문을 열고 면접실 안에 들어갔다.

면접실 안은 꽤 넓었다. 가운데 놓인 책상에는 검정색으로 양복을 맞춰입은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적어도 면접관 여러 명이 쉴 새 없이 쪼아대는 방식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이쪽이 다 자리에 착석하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다섯 명 모두 시간에 맞춰 도착했군. 나쁘지 않아.”

나는 그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면접 자리에 시간 맞춰 오는 건 그냥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 걸 가지고 칭찬해주면 오히려 이쪽을 바보로 보는 것 같아 기뻐할 생각이 안 들었다. 과장 조금 보태 초등학생 취급 당한 기분이었다.

너희도 그렇지 않냐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옆쪽을 돌아보자, 같이 들어온 녀석들은 더 칭찬해줘도 된다는 듯 자부심에 감싸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헛웃음을 터뜨렸다.

‘얘네들 왜 이래?’

다른 사람이 보면 무슨 면접실 도착하느라 엄청난 미로라도 뚫고 지나온 놈들인 줄 알겠다. 그리고 이쪽을 관찰하고 있던 남자가 재밌는 놈이라는 듯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래. 지정된 장소에 시간 맞춰 도착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지. 그런 당연한 일로 칭찬을 받아봤자 불쾌할 뿐이라는 학생이 여기 최소한 한 명은 있군. 마음에 들어.”

나는 흠칫 놀라 급히 표정을 고쳤다. 면접관이 대놓고 내 쪽에 눈길을 주고 있었기에, 같이 면접을 보러 들어온 다른 놈들도 자연스레 이쪽을 흘겨보았다. 아이고야 거 참.

짝, 하고 박수를 친 면접관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인사가 늦었군. 이번 너희들의 면접 평가를 담당하게 된 기사육성과 교수 한시혁이다. 이제부터 면접에 들어갈 텐데, 그 전에 나랑 간단한 게임 하나 해보겠나?”

갑자기 게임이라니 무슨 헛소리야? 하는 생각을 표정에 드러내진 않았다. 포커페이스엔 꽤 자신이 있었다. 자신감 있는 미소를 유지하며 손을 번쩍 들어 교수에게 질문했다.

“165번. 뭐지?”

“그 게임이요. 평가에 반영되는 건가요?”

“반영되는 정도가 아니지. 통과만 하면 실기고사고 뭐고 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이다.”

“네?”

면접실 안에 소리 없는 경악이 퍼져나갔다. 솔직히 나도 그 말엔 눈썹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합격이 장난이야 게임으로 시켜주게? 그리고 피식 웃은 교수가 말을 이었다.

“다만,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컨디션에 다소 악영향이 갈 거다. 최악의 경우엔 면접을 망쳐버릴지도 모를 만큼. 뭐, 근성 있는 놈이라면야 정신력으로라도 버틸 테지만.

그러고선 다시 심술궂게 웃었다. 도발하는 듯한 미소였다. 만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교수가 성격에 상당한 결함이 있는 인간이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내 교수는 책상 서랍을 열어 안에 있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게임의 내용은 간단하다.”

그 손에 들린 건 세한기전의 증빙서류였다.

맨 위에 커다랗게 쓰여있는 세 글자. 합 격 증. 모집단위, 기사육성과. 위 사람은 본교의 입학전형에 최종 합격하였음을 통지합니다. 아래 세한기사전문학교 총장 직인 땅땅.

모든 서식이 제대로였다. 다만 수험번호와 성명란에만 아무런 내용도 쓰여있지 않았다. 이쪽 마음대로 써서 내라는 듯이. 백지수표가 아니라 백지 합격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걸려있는 상품은 이 종이 그 자체다.”

교수가 욕심나는 거 다 안다는 듯 상품을 흔들었다. 세한기사전문학교의 합격증서. 종이가 한 번 펄럭일 때마다 앉아있는 녀석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따라 움직였다.

“게임의 규칙은 아주 간단해. 도전하는 건 한 번에 한 명씩. 너희는 여기 서있는 내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자기 이름을 적어내면 된다. 그 순간부터 합격증서엔 효력이 생겨, 통과한 사람은 자랑스러운 세한의 신입생이 되는 거지.”

“다가가면 주먹으로 한 대 패시고요?”

내 질문에 교수가 재밌는 놈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시시한 술래잡기를 하자는 게 아냐. 나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겠다. 반격은 물론 손끝 하나 까딱할 일 없어. 너희는 그냥 여기까지 걸어와서 종이를 가져가면 되는 거야.”

그게 대체 뭐야? 그냥 교수는 제자리에 돌처럼 가만히 서있고, 이쪽는 걸어가서 종이 집은 다음 자기 이름 세 글자 쓰면 합격이라고? 전혀 이해가 안 돼서 역으로 의심이 들었다.

“혹시 뭐 수준 높은 농담 같은 건 아니죠?”

“농담으로 들렸나? 면접관은 시험에 관해 농담하지 않아.”

교수의 얼굴은 아주 진지했다. 평소에도 농담을 할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정말로?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모르겠어서 찜찜하기만 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다른 애들도 불안해하는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먼저 나서서 터져봐줄 놈은··· 없는 것 같네.’

솔직히 경계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즉시 합격이라는 건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는 메리트였다.

실패해도 컨디션 저조해지는 게 다라는데, 뭔가 위험해질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항복하면 되지. 게다가 합격증서는 저것 한 장 뿐일지도 모른다. 결심한 나는 불안해 떨고 있는 녀석들 사이에서 일어나 한쪽 손을 번쩍 들며 선언했다.

“165번 송한솔. 도전해보겠습니다.”

< 출발선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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