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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5화 (5/113)

< 입학식 (1) >

기사의 자질이란 건 백퍼센트 혈통빨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선천적으로 짙은 피를 타고나, 몸이 엄청나 게 튼튼하거나 혈통능력에 눈을 뜬 자들을 두고 기사의 자질이 있다고 평했다. 이른바 성골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나한테 그런 자질은 요만큼도 없었다. 성골은커녕 지나다니는 일반 혼혈과 비교해봐도 허약해빠진 몸이었다.

심지어 신체능력만 문제인 것도 아니었다. 진지하게 기사를 지망한다면 일단 주먹으로 돌덩이를 깨부수는 정도는 해야 했다. 단순히 몸만 써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체내의 마력을 회전시켜 동작의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게 핵심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그런 거 못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인간이면 원래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래서 처음 여기 떨어졌을 땐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잤었다. 뭐 노력할 건덕지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답이라는 게 아예 안 보였다.

“이젠 좀 보이네.”

나는 땅바닥에서 주운 돌멩이를 머리 위로 휙 던져올렸다. 이내 녹색의 역장이 그 주변을 감싸더니, 공중에 올라간 돌은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둥실 떠오르며 멈추었다.

시답잖은 속임수가 아니었다. 지금 내 옆의 돌멩이를 공중에 띄워놓고 있는 건 진짜배기 초능력이었다. 혼혈들의 몸에 흐르는 마력과 달리, 순수하게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힘.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1]

녀석들이 마력이라면 나는 염력이었다. 아무런 혈통도 없는 순혈 인간인 내가, 괴물같은 혼혈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하나뿐인 수단. 이 칼날을 충분히 날카롭게 벼려내야만 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주변의 나무를 가리켰다.

이내 보이지 않는 역장에 감싸인 돌멩이가 나의 의지에 응해 발사됐다. 출력 자체는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지만, 힘의 세세한 가감은 처음부터 내 손발처럼 할 수 있었다. 날아가 빠각 부딪힌 돌멩이가 나무껍질을 찢어내며 반쯤 박혔다.

“이 정돈가.”

괜찮긴 하지만 인상깊은 수준은 아니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세한기전의 에이스들은 이 정도 파괴력의 공격 따위 맨몸으로 맞아도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좋았다. 나는 이미 혈통시대의 엔딩을 한 번 보았다. 시나리오가 진행될수록 내가 알고 있는 사건들이 쏟아질 것이고, 그건 즉 크레딧을 대놓고 쓸어담을 기회였다. 해볼 만한 게임이 된 이상 불안은 전혀 없었다.

세한을 졸업할 때쯤엔 어디 가서 꿀릴 일 없을 것이다. 흐뭇한 상상을 하고 있자니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해보자 세한기전 쪽에서 보낸 문자였다.

내용은 별 거 없었다. 토요일에 입학식이 있을 예정이니 합격생 여러분들은 꼭 참석을 부탁드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전통적으로 입학식이란 건 안 가고 집에서 뒹굴다가 지금쯤 다른 놈들은 언제 끝나나 손가락만 빨고 있겠지? 상상하는 게 제일 즐거운 법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불참을 결심했을 때, 아래의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입학식 중 학장님의 수여식이 있을 예정이니, 아래에 적힌 학우 분들께서는 반드시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기사육성과 : 수석 차대엽 / 차석 송한솔]

“뭐야 이거?”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몇 번을 봐도 차석 옆에 쓰여 있는 세 글자는 내 이름이 맞았다. 교수한테서 종이 한 장 뺏어다 자기 이름 쓰는 장난같은 테스트 하나 통과했다고 덜컹 합격시켜주더니 이제는 나 보고 기사과 차석이라고?

모르겠다. 완전히 내 이해범위를 벗어났다. 당장 입학처에 전화해서 당신들 단체로 정신 나갔냐고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렇게 따져봐야 바뀌는 것은 없겠지만.

‘뭐가 됐든 순위가 높으면 좋은 거고.’

장학금이라도 줬으면 좋겠는데. 확실한 건 이제 나는 꼼짝없이 입학식에 끌려갈 처지가 되어버렸단 것이었다.

* *

“휘유. 이렇게 보니까 장관이구만.”

남자가 살짝 커튼을 올려 바깥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세한의 입학식이 치러지는 대강당. 강당의 좌석엔 이번에 합격한 신입생들 말고도, 같이 온 학부형들이나 전도유망한 학생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어놓으려는 외부인사들이 모여있었다.

명문이란 이름에 무색하지 않게 세한의 입학식은 언제나 삐까번쩍한 얼굴들이 우글대는 자리였다. 허나 그걸 감안해도 이번 입학식은 대단했다. 해봐야 한 기수에 한두 명 있을 빅네임들이 서로 짜기라도 한 듯 한꺼번에 입학한 것이다.

“와. 저기 뒤엔 마왕님까지 앉아있잖아. 자식 사랑이 각별하신가봐? 호위도 안 붙어있는 것 같은데 위험한 거 아냐?”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았지만 말하는 것 자체는 일리가 있었다. 여러 명문가의 면면들이 모이는 세한의 입학식은 온갖 테러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하물며 마왕쯤 되는 거물이 있다면야.

하지만 선글라스 남자의 말을 들은 다른 교수들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어개를 으쓱이거나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무슨 상태가 일어나든 대응하는 게 우리 몫이잖아.”

“애초에 누가 해치고 싶다고 해서 해칠 수는 있나, 저런 괴물 아저씨를. 최소한 기사단 하나는 데려와야 할걸.”

동료 교수들의 냉정한 반응에 선글라스 남자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벽에 기대고 서있던 한시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자리에 나오는 건 그다지 성격에 안 맞았지만, 이것 또한 교수 업무 중의 하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참 마왕님 아들도 안 됐어. 원래대로면 전체 1위도 노려볼만 했을 텐데, 하필이면 이번 학년에 입학하다니. 왕자 이름이 바랠만한 다크호스 놈들 천지잖아.”

“올해가 올스타전이긴 하지.”

다른 교수도 남자의 말에 수긍했다. 한 번씩 이럴 때가 있다. 마왕의 아들부터 해서 수십 년만에 태어난 흑익에, 벌써부터 가문 하나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어린 당주님까지. 이번 1학년들은 이상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두각을 보이는 것은 역시 수석인 차대엽이었다.

“이번 수석 걔지? 검성 가문 둘째. 역대 최강의 검성이 될 재목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만. 1등은 그놈 확정이지 뭐.”

“같은 검귀라고 편들기는.”

“뭐? 아니, 어이없네. 난 객관적인 평가로···.”

분홍 머리 교수의 평가에 선글라스가 억울한 듯 항변했다. 이내 그녀는 뭘 모른다는 듯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너 실기시험 때 없었지? 이번에 입학한 설이 동생, 완전 괴물이야. 우리 설이가 뭐만 하면 동생 칭찬만 하길래 팔불출이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더라. 아마 웬만한 2학년을 데려다놔도 그 애랑은 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 될걸?”

그 말에 선글라스를 쓴 교수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동료 교수인 이 여자는 절대 허투루 저런 말을 꺼낼 성격이 아니었다. 어떤 능력이든 파고들 틈이 있고, 얼마나 강한 상대든 연구와 단련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런 헛소리를 진지하게 떠들며 자신이 실제로 체현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저 정신병 수준의 노력 예찬론자가 승부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말을 꺼냈다. 그 아이 또한 이질적인 수준의 재능을 지닌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여자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아까부터 입 다물고 계신 한시혁 씨는, 어느 쪽이 제일 기대되는 거야?”

여론은 대충 둘 중 하나로 좁혀져있었지만, 그 와의 학생들에 대한 평가도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 그만큼 이번 신입생들은 스타들의 행진이었다. 눈썰미가 좋은 걸로 소문이 난 한시혁이라면 다른 무언가를 발견해냈을지도 모른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도 상당히 흥미가 있는지 한시혁을 쳐다보았다. 한시혁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송한솔.”

그 말에 두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 학년에 입학하는 요주의 학생들의 정보는 전부 머릿속에 넣어두었지만, 한시혁의 입에서 나온 건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잠깐 뒤.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선글라스가 말했다.

“아, 차석. 걔도 사전 테스트 통과했다고 했었지 아마? 시간 기록 보니까 겨우겨우 해낸 거나 마찬가지던데. 걔보단 당연히 훨씬 빠르게 끝낸 차대엽 쪽이 대단하지 않나?”

사전 테스트의 내용은 다른 교수들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사안의 위압을 뚫어내고 움직여 한시혁의 손에서 합격증서를 빼앗고 이름을 쓰는 것. 학생 수준에선 가혹한 시련이었다. 정상적인 1학년이 통과할 수 있는 테스트가 아니었다.

“확실히 차대엽은 10초도 안 걸렸지.”

“10초도 안 걸렸다고? 어떻게?”

듣고 있던 여자 교수가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십 초도 안 걸렸다는 건 한시혁이 대놓고 봐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사안의 위압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마력을 끌어내야 할 텐데, 그 마력을 움직이지 못하게 굳혀버리는 게 사안이었다.

“반쯤 억지로 몸 안에서 마력을 터뜨리더군. 그렇게 위압을 풀고 피투성이가 돼서 걸어오는데 상당히 무서웠지.”

누가 못 움직이게 발목을 붙잡는다고 자폭을 해서 떨쳐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검귀 특유의 맷집이 없으면 그런 짓을 한 시점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탈락했을 것이다.

“와. 난 놈은 난 놈이다 진짜.”

“근데 왜 그 송한솔인가 하는 놈한테 꽂힌 거냐고. 그 시간이면 엄청 천천히 근성으로 버티면서 기어온 거잖아?”

어느 의미로는 정공법이라 할 수 있었다. 사안의 위압에 옴싹달싹 못하게 된다고 해도 저항력이 있다면 끙끙대면서나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1분이 넘는 시간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한시혁 앞까지 도착해 합격증서를 빼앗은 것이다.

“넌 그런 거 미련하다고 싫어하는 스타일 아니었나?”

···그렇게 유쾌한 착각들을 하고 있다. 선글라스 교수의 질문에 한시혁은 저도 모르게 비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기 힘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바닥을 기어와? 그 녀석이?

송한솔이 1분 넘게 시간을 지체해 수석이 아닌 차석이 된 이유는, 빨리 더 세게 걸어보라고 교수랑 눈싸움을 하느라 그런 거였다. 그걸 밝히면 이 녀석들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너도 농담을 할 줄 아는구나, 하고 깔깔 웃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저쪽에서 자그마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세한의 학장이 걸어오고 있는 소리였다. 교수들은 즉시 수다를 그만두고 얼굴을 굳히며 착석했다. 강당의 커튼이 걷히고,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 또한 웅성거림을 멈추었다.

세한기전의 입학식이 시작되었다.

< 입학식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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