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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6화 (6/113)

< 입학식 (2) >

입학식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 나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아침에 세한의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수석과 차석으로 입학하는 학생은 잠시 학장님과 면담이 있을 예정이니 몇 시간 일찍 도착해줬으면 한다는 이야기였다. 시계를 보니 슬슬 일곱 시였다. 평소에는 한참 자고 있을 시간에 바깥을 걸으니 자연스레 입에서 하품이 나왔다.

어차피 축하한단 말이나 좀 해주고 말 텐데 이게 뭐하는 짓인지. 차가운 공기에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입학식 준비 때문인가 이런 시간에도 캠퍼스 안에선 여러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한 명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이내 저쪽도 나를 알아봤는지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이런 시간에 벌써 온 건가?”

걸어온 남자가 피식 웃었다. 쓰레기통 옆의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던 건 입학시험 때의 면접관이었던 한시혁 교수였다. 그때와 달리 교수의 표정은 상당히 누그러져있었다. 나는 다가온 교수에게 꾸벅 인사하고서 대답했다.

“학장님 면담이 있다 해서요.”

“응? 아아, 수석 말고 차석도 부르는거였나. 그거.”

차석. 그 말에 난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을 던졌다.

“근데 저 진짜로 차석이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내가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나는 수석 차석이 문제가 아니라 꼴찌인가 꼴찌가 아닌가를 고민해야 하는 레벨이었다. 그러자 한시혁 교수는 의표를 찔린 얼굴을 하더니, 그럴 만 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왜. 수석이 누군지 신경 쓰이나?”

“아뇨. 그건 아닌데. 수석 차대엽 아니예요?”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인해볼 것도 없었다. 비단 입학시험 뿐만 아니라 1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세한의 수석이란 수석은 전부 차대엽 차지였다. 그놈이야말로 세한 쪽 시나리오의 주인공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교수도 내가 차대엽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에 별로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그만큼 녀석은 이미 슈퍼스타였으니까. 하지만 교수의 다음 말은 내게 의문을 가지게 하기 충분했다.

“그런가. 벌써 시험 때 있었던 일을 전해들었나 보군. 정보를 수집하는 눈과 귀도 이미 갖추고 있다는 건가.”

무슨 정보? 내가 눈썹을 찌푸리자 한시혁이 말했다.

“하긴 네 입장에선 억울할 만도 하겠지. 만신창이가 돼서 겨우 통과한 반푼이가 네 위에 있는 꼴이니까. 사실 나도 실질적인 수석은 너라고 생각한다. 채점기준은 ‘합격서를 집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라 네 쪽이 차석이 되어버렸지만.”

“예?”

“아니. 내 재량으로 어떻게 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 기준 딱딱 안 지키면 민원이 쏟아지거든. 그냥 학부모도 아니고 마왕이나 명가 당주쯤 되는 양반들한테 말이야.”

시험관 짓거리도 참 할 게 못 된단 말이지. 한시혁 교수가 한숨을 쉬었다. 난 아까부터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 같은 놈을 어쩌자고 차석에 앉혀둔 거냐 물어보는데 사실은 네가 수석이었단 말이 왜 나와.

“사죄의 의미라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학장실까진 내가 안내해주마. 처음 왔을 때는 헤매는 학생들이 많으니.”

그건 상당히 고마운 일이었다. 세한의 캠퍼스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배배 꼬인 구조로 악명이 자자했다. 대외적으론 보안을 고려한 배치라고 하지만, 사실은 학장 취향의 디자인을 위해 일부러 복잡하게 만들었단 게 게임의 설정이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닫고 교수의 안내를 받았다. 한시혁 교수는 상당히 인망이 있는 모양인지, 걷고 있으면 지나가는 교원이나 청소부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상당히 놀라웠다. 면접실에서 받은 인상으론 완전히 독불장군 스타일이었는데.

이내 학장실 앞에 도착하자, 복도에 놓인 소파에 한 청년이 바른 자세로 앉아있었다. 나보다 먼저 학장실 앞에 와서 대기하고 있을 만한 녀석이라면 정체는 뻔할 뻔 자였다.

차대엽. 몇 년만 있으면 역대 최연소 검성이 될 괴물 중의 괴물이자, 혈통시대에 몇 없는 ‘주인공 캐릭터’ 중 하나.

“수석이랑 차석이 다 모였군. 그럼 나는 가볼 테니, 이번 기수 유망주들끼리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도록.”

그렇게 말하고 교수는 왔던 길로 뚜벅뚜벅 돌아갔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비어있는 소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슬쩍 옆쪽에 앉아있는 차대엽을 바라보았다.

양옆으로 귀를 덮게 내린 곱슬기 있는 단발과, 같은 흑색의 목폴라 니트. 머리 양쪽엔 커터칼을 연상시키는 금속제의 뿔이 나있다. 표정에선 조용하다기보단 어딘가 달관해있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는 한쪽 손을 들고 인사를 건넸다.

“차석으로 입학한 송한솔입니다. 너는?”

“차대엽이야. 면담이란 건 혼자 받는 건줄 알고 긴장했는데 다행인걸. ···앞으로 3년간 잘 부탁해.”

“그래그래. 잘 부탁해요.”

나는 악수를 건네온 차대엽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차대엽은 무뚝뚝한 표정에 말까지 없어서 오해받기 쉽지만, 까칠한 성격은 아니기에 대화하면 평범하게 친절한 편이었다. 내 생각이 아니라 주인공 소개에 대놓고 쓰여 있는 내용이다.

“참, 너나 나나 아침부터 이게 뭔 고생이냐. 원래 지금쯤이면 한창 잘 시간인데. 할 말 있으면 입학식 끝나고 하든가.”

“딱히 그렇진 않은데. 평소에도 네 시엔 일어나니까.”

“뭐? 아아···.”

나는 알 만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차대엽은 사생활이란 게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검술 단련에만 미쳐있는 인간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훈련하는 건 숨 쉬듯 당연한 일이겠지. 딱히 고행이라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차대엽 뿐만 아니라 세한기전에 입학할 수준의 기사생도라면 누구나 다 그 정도는 하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아직도 일반인 마인드로 지내고 있는 건 나 혼자 뿐이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내가 일반인인 건 그냥 사실인데.

한숨을 쉰 나는 차대엽의 팔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오케이. 그렇다 치고. 그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가리킨 쪽의 팔에는 커다란 깁스가 매여있었다. 적당히 못본 체 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질문에 차대엽은 미숙함이 부끄럽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상처가 안 나아서. 보이는 것만큼 심각한 건 아니고,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엔 풀 수 있을 거야. 그러고 보면 너는 상처가 없는걸. 설마 정공법으로 그걸 돌파한 건가?”

차대엽이 이쪽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눈길을 보냈다.

나는 그거란 게 뭔지 제발 좀 알려달라 빌고 싶었지만, 그때 타이밍 좋게 학장실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온 건 내 또래쯤 되어보이는 자그마한 몸집의 소녀였다.

소녀는 학사모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모자를 쓰고, 어깨에는 어두운 색의 케이프를 걸치고 있었다. 모자 아래선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흐트러져 내려오고, 초승달을 반으로 뚝 잘라낸 듯한 모양의 두 뿔이 앞쪽을 향해 굽어있었다.

방에서 나온 소녀는 조용히 이쪽을 보더니 말했다.

“벌서 와있었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어젯밤부터 철야를 했다만 영 일이 끝날 기미가 보여야 말이지.”

묘하게 어르신 같은 말투였지만, 눈앞의 소녀는 어르신 같기만 한 게 아니라 진짜배기 어르신이었다. 나와 차대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올해 입학하게 된 신입생이 그 학교의 학장을 만났을 때 보여야 할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천년서생(千年書生).

눈앞에 있는 소녀 비스무리한 존재야말로 세한기전의 초대 학장이면서 당대 학장, 반영구적인 생명을 얻어 지난 천 년을 살아왔다는 시해선(尸解仙)이었다. 인플레가 엄청나게 진행되는 시나리오 후반에도 강력함이 바래지 않는 사기 캐릭터.

슬쩍 옆을 바라보니 차대엽 또한 바짝 긴장해있었다. 그야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저 학장은 동화책이나 전설 속에 나오는 영웅이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는 꼴이었다. 처음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면 얼떨떨해하는 게 당연하겠지.

“일단 들어와서 편한 자리에 앉게.”

학장이 학장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방 안의 고급스러운 소파에 조용히 앉아 기다리자, 그녀가 손수 끓인 차를 대접해주었다. 예쁜 찻잔 안에 담긴 건 진한 상아색의 말차였다.

“마시면서 얘기하지. 맛있다네.”

나는 살짝 목례하고 찻잔을 홀짝였다. 솔직히 찻잎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적당히 맛있다는 수준의 감상밖에 없었지만, 다례를 좀 아는 사람에게는 다른 것 같았다. 옆에 앉은 차대엽은 차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네 그냥.’

이런 자리에서도 맛있는 차에만 집중할 수 있다니 좋겠다 참. 내가 작게 한숨을 쉬자, 학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네. 면담이라곤 했지만 그저 우수한 학생들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는 학장 주책일 뿐이니까. 여기 수석이나 차석쯤 되면 다들 특이해서 재미가 있거든.”

잠깐 면담해서 사람이 재밌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아.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이 자리가 마련된 진짜 이유를 눈치챘다. 세한의 학장에게는 한 가지 비밀스러운 능력이 있다.

‘현자의 눈···.’

학장의 능력을 아는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마저 이것을 흔해빠진 탐색 계열 능력으로 오해하지만, 그 본질은 직감에 가깝게 과정을 무시하고 정답만을 도출하는 능력이었다.

한 번 얼굴을 마주하기만 해도 상대방의 성향과 자질, 정신성 등을 모조리 알아낼 수 있다. 천 년의 연륜으로 갈고 닦인 관찰안의 궁극. 조심성 많은 학장은 교수진을 포함해 세한기전의 누구에게도 이 능력의 진가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올바른 판단이야.’

아무튼 능력이란 건 알려지는 순간 어떻게든 대비책이 나오는 법이니. 자고로 싸움이란 심리전이고 뭐고 상대가 모르는 능력으로 뺑소니쳐서 간단하게 이기는 게 최고였다.

어찌 됐든 그 덕분에 게임에서 천년서생을 동료로 영입했을 땐 적의 다음 행동과 약점, 스킬 발동조건을 전부 알 수 있어서 전투 자체가 몇 배는 편해졌다. 아마 이 면담도 현자의 눈으로 합격자를 한 번 검사하기 위한 자리일 것이다.

즉, 이번 기수의 에이스들은 어떤 종류의 자질을 갖고 있나. 혹시나 문제를 일으킬 만한 성격은 아닌가, 잘못된 수행으로 몸을 망치고 있진 않나. 그런 걸 따져보고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학교 측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려는 거겠지.

물론 학장으로선 문제가 없는 행동이었다. 오히려 학생 하나하나를 신경써준다는 점에선 모범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문제는 바로 내 능력치였다.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만일 학장이 나를 꿰뚫어보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일단 깜짝 놀라 이런 약골이 어떻게 차석이 된 걸까 생각하겠지. 그 다음엔 시험 과정에 뭔가 착오가 있었나 확인해볼 테고. 그리고 나는···.

“···그러고 보니 네 형···.”

“···네······아버지 일로······.”

얼굴이 새파래졌다. 두 사람이 옆에서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도 귀에 안 들어왔다. 설마 재시험은 아니겠지? 제발 재시험만은 봐주세요. 차석 박탈 정도는 기쁘게 받아들일 테니 제발. 나는 딱딱히 굳은 채로 학장 쪽에 눈을 굴렸다.

차를 맛있게 마시는 모습이 흐뭇한 건지, 훌륭한 학생이 입학해 기쁜 건지 학장은 차대엽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이내 학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자네 쪽은···.”

그리고, 동그랗게 커진 학장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입학식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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