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학식 (4) >
학장이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자마자 나는 아이처럼 눈을 빛내었다. 이건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천년창고 선택권.’
저 창고에서 원하는 물건을 하나 고르게 해주는 건 세한을 다니면서 딱 두 번밖에 없는 이벤트였다. 한 번은 시나리오의 주요 사건을 막아낸 다음. 한 번은 수석으로 세한을 졸업했을 때. 어느 쪽이든 1학년 때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창고에 있는 물건들의 목록은 이미 대충 알고 있었다. 어떤 캐릭터한테 무슨 아이템을 들려줘야 제일 효율이 잘 나올까 머리 싸매느라 몇날 밤을 새웠던 적도 있으니까.
나는 학장이 펼친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건 반쯤 자랑용, 선물용의 컬렉션들이고, 진짜 비장의 보물들은 두루마리에 써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천년창고다. 하나같이 웃돈을 얹어줘도 구하기 힘든 절품들인 것은 확실했다.
나는 팔꿈치로 옆에 서있는 차대엽을 툭툭 쳤다.
“야. 너는 무조건 이거 받아.”
“···유리해골 반지?”
차대엽이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이름을 읽었다.
유리해골 반지. 마력을 주입하면 사용자에게 걸린 쇠약화나 저주를 자신이 대신 빨아들이는 아이템이었다. 검귀 혼혈은 원래 정공법으로 싸워선 답이 없는 괴물들인데, 저 반지가 있으면 유일한 약점인 저주까지 커버할 수 있게 된다.
차대엽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대로 반지를 받기로 결정한 듯 했다. 어차피 아는 물건도 없으니 찍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겠지만, 오늘 처음 만난 놈이 하는 말에 이렇게 순순히 수긍하다니 참 사람 좋은 녀석이었다.
나는 콧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보면 경쟁자를 키워주는 꼴이지만, 이 녀석은 최대한 빨리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내가 쾌적하게 주인공 버스를 탈 수 있으니까.
“호오.”
내 추천을 들은 학장이 이채를 띤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탁월한 선택이라 평가하는 듯한 미소였다. 사실 게임에서 몇 번이고 조합을 검증해본 결과일 뿐이지만, 학장 입장에선 처음 본 학생이 그 자리에서 묘수를 낸 것처럼 느껴지겠지.
‘솔직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문제는 내가 어떤 물건을 받을지였다. 천년창고의 보물들은 대부분이 사용자의 마력으로 기동하는 마도구였고, 그러니 내 경우엔 사용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선물이라고 주는 건데 비싼 물건 받아서 되파는 건 인간적으로 좀 그렇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손가락으로 이름을 가리켰다.
“전 이거 부탁드립니다.”
내 선택에 학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꼬마 천사의 날개’. 신발에 부착해 사용하는 형태의 마도구였다. 특이한 점은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마력을 조금씩 흡수해 충전한다는 점.
평소에는 몸을 조금 가볍게 해줄 뿐이지만, 충전이 완료됐을 때 날개를 누르면 사용자를 도약시키며 고속기동을 할 수 있게 보조해준다. 척 보기엔 나름 쓸만해 보이는 아이템이지만, 천년창고의 보물들 중에선 확실하게 꽝인 품목이었다.
첫째로 주변에서 조금씩 마력을 모았다가 발동하는 식의 도구는 사용자가 자기 마력을 직접 주입해 발동하는 물건들보다 훨씬 효과가 수수했고, 둘째로 웬만한 혼혈들은 날개의 도약력이나 자기 발로 전력질주하는 거나 그게 그거였다.
‘해봐야 신기하다고 한두 번 쓰다 버릴 장난감이지.’
하지만 난 혼혈이 아니었고, 정정당당한 달리기 경주로는 그놈들을 죽어도 못 이긴다. 긴급시 도망칠 수 있을 만한 속도를 확보할 수단을 반드시 하나쯤은 마련해놔야 했다.
게다가 주변에서 조금씩 마력을 모으는 성질도 나에겐 장점으로 작용했다. 마력이 없는 나라도 물건이 알아서 마력을 충전해주면 그냥 전자제품 다루듯이 사용할 수 있다.
‘나중에 진화시킬 수도 있고.’
사실 이쪽이 핵심이었다. 혈통시대에도 극소수밖에 존재하지 않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형태와 기능이 변화하는 아이템. ‘꼬마 천사의 날개’가 바로 그런 진화형 아이템 중 하나였다. 물론 나는 진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진심인가? 그건···.”
학장이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학생이 스스로 한 선택에 말을 얹는 것은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루마리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손끝에서 마력의 불꽃이 타오르고, 종이 위에 쓰여있던 이름이 지워짐과 함께 펑 하고 공중에서 물건이 나타났다. 투명한 해골이 세공되어있는 반지와, 손바닥 정도 크기의 귀여운 날개 한 쌍.
물건을 받고 목례하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서 짝짝짝 박수가 쏟아졌다. 자리에 앉자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추가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학장을 놀래키다 : 1,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얼굴도장 찍기 : 500 Credit을 획득합니다.>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템에 크레딧까지. 이 정도면 새벽부터 일어나 입학식에 온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대강 연설이 끝나자 입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연락처를 교환하거나 같이 밥 먹으러 가자 떠들고 있었다. 저쪽에 껴서 동기들 면면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나는 한적한 공원으로 혼자 빠져나왔다.
상태창을 열자 내 앞에 반투명한 화면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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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송한솔
[혈통] 없음
[능력치]
근력 : 7 (+4)
민첩 : 11 (+6)
내구 : 6 (+3)
감각 : 12 (+6)
염력 : 20
[혈통능력]
없음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1
- 투시 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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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치는 여전히 비참했다. 잠재치 개방에 크레딧을 탈탈 털어넣어 모든 스탯이 50퍼센트 가까이 뻥튀기되었는데, 이래도 평균적인 혼혈한테 신체능력이 밀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맨 아래 있는 항목이었다.
염동력과 투시. 염력 스탯에 각성한 뒤로 추가된 능력들이었다. 상태창을 옆으로 밀자, 원래의 능력치 창 대신 ‘정신 개발’이라는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빨리 크레딧을 써서 새로운 능력을 얻고 싶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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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2>
- 선행 능력 : 염동력 Lv.1
- 필요 크레딧 : 2,000 Credit
<마인드맵 확장 : 초감각 Lv.1>
- 선행 능력 : 없음
- 필요 크레딧 : 1,000 Credit
<마인드맵 확장 : 사이코메트리 Lv.1>
- 선행 능력 : 투시 Lv.1
- 필요 크레딧 : 1,500 Cr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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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너무 비싸네!”
나는 상태창에 대고 화를 냈다. 아직 시나리오가 제대로 시작도 안 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지금 있는 크레딧으로는 염력을 올리긴커녕 새로운 초능력을 해금하기에도 벅찼다.
게임의 스킬트리처럼 생긴 정신 개발 창에는 맨 처음의 기본적인 초능력들 몇 개만 공개되어있고, 아직 얻지 못한 능력 뒤에 있는 항목들은 전부 물음표로 감추어져있었다. 게임에서 써본 적이 없는 능력이니 투자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전부 열긴 해야겠지만.’
결국 늦느냐 빠르냐의 문제일 뿐이었다. 나는 오늘 얻은 추가 크레딧을 모두 투자해 사이코메트리를 해금했다.
<확장에 1,500 Credit이 필요합니다.>
<마인드맵 확장을 진행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수락하자 내 머릿속에 정보의 집적이 흘러들어왔다. 무언가를 배운다기보다는 정신에 있던 벽을 허물어 공간을 넓힌다는 느낌이었다. 새로 얻은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인지는 설명 따위가 없어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앉아있던 벤치에 손을 대고 눈을 감자 여기 앉았던 사람들의 얼굴, 나누었던 대화 따위가 머릿속에 정보로 흘러들어왔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활용할 여지가 엄청난 능력이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눈앞이 암전되며 내 몸이 고꾸라졌다.
<필요 염력이 부족합니다.>
땅바닥을 구른 난 알림을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
근육을 움직이는 것과 똑같다. 염력은 쓰면 쓸수록 정신을 혹사시키는 것이었다. 페이스 조절을 잘못했다간 몸이 지치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일 수 있었다. 당면한 과제는 몇 번이고 초능력을 사용하면서 염력의 지구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크레딧 벌어서 다른 능력도 팍팍 뚫고.’
다음 주 월요일. 첫 등교날이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 입학식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