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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9화 (9/113)

< 자기소개 (1) >

자. 오늘부터 두근두근 학교생활 시작이다.

나는 지급받은 교복의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한겨울의 추위, 세한의 이미지에서 따왔다곤 하지만 교복 마이가 하얀색인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실용적인 의미에서도 이런 색이면 조그마한 얼룩도 눈에 확 띄어서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항의를 해봤자 세한의 학생은 언제나 몸가짐에 주의하는 자세를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매크로 답변이나 돌아오겠지. 진짜 이유는 학장이 하얀색을 좋아해서 하나 뿐인 주제에. 나는 양손으로 뺨을 짝 때려 기합을 넣었다.

“좋아.”

기운차게 교실문을 열자, 안에 있던 녀석들의 시선이 내게 몰려들었다. 놈들은 잠깐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뭐 스캔이라도 하는 건가? 어깨를 으쓱이고 교실 안의 모습을 확인하자, 나는 상당히 놀라움을 느꼈다.

일단 15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벌써 반 애들 대부분이 와서 앉아있었고, 더 깜짝 놀란 건 뒤쪽 구석 자리가 아직도 비어있었단 점이다. 이 좋은 곳을 아무도 안 먹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갔지만 명당을 양보해주면 나야 땡큐였다.

그리고 내 옆으로 다가온 한 인영이 있었다.

“어이.”

날카로운 눈매를 한 녀석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보라색 머리카락과 양처럼 꼬여있는 굵은 뿔. 몽마 혼혈의 특징이었다. 자그마치 이번 대 마왕의 아드님이기도 했다. 얘가 왜 갑자기 내 자리에 와서 이러는 건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비 걸러 오셨네.”

“뭐라고?”

내가 눈길도 주지 않고 한숨을 쉬자, 선수를 뺏긴 놈이 당황했다. 자세빈. 몽마의 왕자. 이 놈은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 자기 위에 누가 있다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원래는 차대엽한테 시비를 걸다 선을 넘어서 손목이 부러졌다.

‘차대엽한테 아빠 얘길 꺼내면 그렇게 되지.’

교실을 보아하니 아직 차대엽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고, 꿩 대신 닭이라고 차석인 나한테 한 소리 하러 온 거겠지. 운 좋게 차석이 됐다고 착각하지 말라거나, 그 콧대를 짓밟아주겠다거나. 뻔한 레퍼토리를 상상하니 하품까지 나왔다.

팔짱을 낀 녀석이 눈썹을 찌푸린 채 나한테 말했다.

“너.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나?”

“왜 몰라? 자세빈.”

“···알고 있군. 그러는 넌 송한솔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놈이 잠깐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차석으로 들어왔지.”

“맞아.”

“하지만 학기가 끝날 때는 다를 거다. 내가 1등이 되면 다른 놈들 석차는 모두 한 계단씩 떨어질 테니. 너도 말이야.”

“그래. 열심히 해.”

나는 툭툭 자세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진심 어린 격려였다. 어차피 내 차석 자리는 무언가 착오가 있어서 받게 된 이른바 거품이었다. 진짜 실력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순위는 자연스럽게 팍팍 떨어지겠지. 꼴찌나 면하면 다행이었다.

그러자 자세빈이 진지한 얼굴로 내게 악수를 건넸다.

“흥. 실없는 놈. 아니면 일부러 그런 연기를 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서로 전력을 다해보지, 송한솔.”

“응? 그래. 같은 반 친구로서 선의의 경쟁을···.”

“반 친구 같은 게 아냐.”

내 손을 꽉 잡은 자세빈이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라이벌이다.”

너를 인정하겠다, 그런 말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내 주머니에 손을 넣은 놈이 자기 패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책상에 걸터앉은 자세빈의 소꿉친구들은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고 눈인사를 했다. 나는 얼떨떨하게 웃어주었다.

‘뭐지?’

이번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뭐야 쟤. 왜 시비 안 걸고 그냥 가? 방금 있었던 대화를 곱씹어본 나는, 게임 속에서의 사건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생각해보았다. 해봐야 차대엽과는 달리 나는 자세빈의 얼굴과 이름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

‘아니 잠깐만. 설마.’

나는 한 가지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상당히 어이없는 가정이었지만 생각할수록 신빙성이 있었다. 설마 저 녀석, 자기는 계속 신경쓰고 있었는데 차대엽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어서 혼자 욱해가지고 달려들었던 건가?

나는 말 꺼내기도 전에 알아봐줘서 만족한 거고? 참으로 귀찮은 성격이었다. 또 화나서 급발진하다 손목 꺾이지 않게, 이따 차대엽이 오면 쟤 이름이 자세빈이라고 슬쩍 말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이내 맑은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합격할 건 알았지만, 차석을 따낼 줄은 몰랐는걸.”

그 말에 난 휙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자세빈이 떠난 자리에 서있는 건, 새까만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였다. 이미 입학시험 때 수험표를 주워주며 만나보았던 구면이다. 얼굴을 알아본 내가 오, 하고 손을 흔들자 진소란이 살며시 미소지었다.

“자기소개는 서로 합격하고 나서라고 했던가.”

“어떻게 둘 다 합격했네.”

“그렇군. 진소란이다, 그 날에는 고마웠어.”

“송한솔이야.”

서로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단 통성명을 했다.

“그러고 보니 실기시험 때 네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혹시 면접날에 사전 테스트를 통과한 건가?”

“아, 이름 쓰는 거? 통과했지.”

내 대답에 진소란이 감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부담스러운 반응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그것보다는 실기시험이 훨씬 더 어려웠을 거라는 사실에 내 전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잠깐 생각하던 진소란이 입을 열었다.

“그때의 답례라고는 말하지만 정보를 가르쳐주지. 너는 실기시험에 안 왔다고 하니. 이것만은 알아두는 게 좋아.”

진소란이 얼굴을 가까이 대보라 손짓했다. 묘하게 목소리를 낮추는 게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조금 의자를 끌어 앉자, 진소란이 손가락으로 교실 한쪽을 가리켰다. 손끝으로 지목한 건 창가에 엎드려있는 여학생이었다.

매화를 연상시키는 붉은 빛 단발에, 머리 한쪽에는 미니햇처럼 자그마한 고깔을 쓰고 있다. 아아,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저 아이는 조심해.”

예상대로 진소란은 한껏 낮춘 목소리로 경고했다.

“저 애의 능력은 이상해. 이건 내 사견이지만, 저 애는 사전 테스트를 못 통과한 게 아니야. 일부러 안 통과한 거지.”

“무슨 이득이 있다고?”

“···다른 입학생들한테 힘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진소란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 또한 충분히 세한기전의 에이스를 차지할 만한 재능을 지닌 실력자일 텐데, 저 여자애한텐 이길 수 없다며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다. 아마 실기시험에서 직접 만나 호된 꼴을 당해본 거겠지.

‘하긴 진소란이랑은 상성이 극단적이니.’

나는 창가 저만치에 엎드려있는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마녀 혼혈, 유매. 모든 혼혈을 통틀어서도 마력을 다루는 데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녀의 혈통은, 자신의 마력을 넘어 주변의 마력에도 간섭하기 시작한다. 진소란처럼 마력을 극도로 섬세하게 다루는 타입에겐 최악의 적이었다.

애초에 스타트 라인부터 다르다. 학생 수준에서는 규격 외. 유매는 태어날 때부터 마녀골의 모든 마녀가 달려들어 온갖 비의를 다 쑤셔넣은 비밀병기 같은 존재였으니. 막말로 지금 당장 기사로 실전 투입해도 딱히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세한의 수준이 높다고 해도 평범한 학생은 상대가 안 되는 게 당연했다. 진심으로 싸워 유매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건 올해 입학생을 통틀어도 해봐야 두 명.

그리고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며 남자가 들어왔다.

‘이 놈이 그 둘 중 한 명이시고.’

나는 의자에 등을 걸친 채 목을 뒤로 꺾었다. 교실문을 열고 들어온 건 차분한 표정의 차대엽이었다. 마력이고 뭐고 그냥 몸 하나로 밀어붙여서 다 쥐어팰 수 있는 녀석. 내가 손을 흔들자 차대엽도 조용히 한쪽 손을 들고 흔들었다.

“네가 꼴찐데? 수석이 첫날부터 지각할 뻔하고.”

“깁스 좀 풀고 오느라.”

차대엽이 맨 뒷자리 구석인 내 옆에 앉았다. 그 말대로 깁스를 하고 있던 차대엽의 왼팔은 이미 말끔히 나아있었다.

- 차대엽이다.

- 차대엽··.

학년 톱의 등장에 교실이 웅성거렸다. 옆의 진소란이나 저 멀리서 팔짱을 낀 자세빈은 물론, 창가 자리에 엎드려있던 유매 또한 슬쩍 고개를 들어 차대엽을 바라봤다. 그만큼 차대엽은 입학 전부터 요주의 인물이었던 진짜배기 다크호스였다.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조금쯤 더 계속됐다. 조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진소란 또한 자리로 돌아가고, 이미 아는 놈들끼린 아는 대로, 모르는 녀석들은 조금 어색하게 통성명을 하며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다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켰고.

앞문이 열리자마자 웅성거림이 즉시 멈추었다.

검은 양복의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와 교탁 앞에 섰다. 면접에 왔던 녀석들은 하나같이 하필이면 저 사람이 담임으로 걸리냐고 저주하는 얼굴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선생이 피식 콧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담임인 한시혁이다. 우선은 자기소개부터 해야겠지.”

그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공중에서 비닐로 싸인 옷들이 투두두둑 떨어졌다. 마력을 이용한 물품의 전이였다. 한시혁은 차가운 눈으로 교실에 있는 아이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세한기전의 자기소개 시간은 둥지에서 치러지는 게 전통이다. 너희들이 어떻게 싸울 수 있는지 나한테 보여보도록. 바로 연습용 둥지로 갈 테니, 모두 체육복으로 갈아입어라.”

같은 반 녀석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첫날이니 좀 편하게 가나 싶었는데, 이 빌어먹을 학교.

다짜고짜 1교시부터 실전 시작이었다.

< 자기소개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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