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10화 (10/113)

< 자기소개 (2) >

체육복을 갈아입고 모인 학생들이 한시혁의 인솔을 따라 걸어갔다. 중앙동의 지하 계단을 내려가니 지하철 역을 연상시키는 넓은 시설이 나타났다. 한시혁이 교직원 카드를 찍고 문을 열자, 결계 관리 담당자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곳이 세한의 정류장이다.”

한시혁이 자신의 뒤를 따라온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세한기전 측에서 관리하고 있는 둥지나, 캠퍼스 바깥의 부지로 이어지는 결계통로. 양쪽에 결계를 조율해줄 사람이 필요하긴 하지만, 수업공간의 제약을 크게 낮춰주는 시설물이었다.

학생들은 신기하다는 듯 정류장을 바라보았다.

기사단에서도 가끔 크게 급한 일이 있을 때 전이 결계를 펼치고는 하지만 이만한 규모의 시설을 상시 운용하고 있는 건 세한기전 정도밖에 없었다. 시설에 필요한 마력을 충당하는 건 결계 관리자가 아니라 학장실에 있는 학장이었다.

관리자와 뭐라 이야기한 한시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대기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군. 이번에 갈 곳은 맨 왼쪽 통로다. 두 명씩 줄 서서 차례대로 들어오도록.”

2열 종대로 정렬한 학생들이 조심스레 통로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대부분 결계를 지나는 것도 둥지에 가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환한 빛과 함께 눈을 감았다 뜨자, 전혀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력으로 찬 대기와 차가운 흙바닥.

“둥지다.”

“와, 여기가···.”

기사들이 싸워야 할 첫 번째 적. 마물의 거처에 발을 들여놓았단 사실이 학생들에게 묘한 긴장감과 고양감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학교가 관리하는 장소니 야외 수업을 위한 공터쯤으로 생각하는 게 맞겠지만, 그럼에도 둥지는 둥지였다.

웅성거리는 분위기, 짝 하고 손뼉을 친 한시혁이 두리번거리는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기소개, 세한의 첫 신고식은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는다. 박물관 가이드처럼 둥지가 무엇인지 이러쿵저러쿵 설명해주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앞쪽을 봐라.”

그 말에 학생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한시혁이 가리킨 건 거대한 암벽과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있는 동굴이었다. 커다란 문 같은 구멍이 차례대로 서있는 게 아무리 봐도 자연적인 둥지를 수업에 쓰기 위해 추가적으로 공사한 것 같았다.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괜히 자기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애쓸 필요는 없어. 어떤 방식이든 좋으니, 자력으로 이 둥지의 출구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다만 모든 입구가 출구로 연결된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두도록.”

즉 자신이 들어갈 입구를 고르는 것부터가 하나의 테스트였다. 마력을 감지하든 주변의 발자국이나 흔적을 관찰하든, 이곳이 맞다고 스스로 판단해 자신의 경로를 정해야 한다.

저 동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실제로 마물이 존재하는 건지 같은 것에 대해선 일절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아내고 대응하는지가 이 수업의 평가사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초도 안 가르쳐주고 응용부터 시키는 꼴이다.

“실전 스타일이군. 마음에 들어.”

교수의 말을 들은 자세빈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휙 고개를 돌려 뒤쪽에 서있는 송한솔과 차대엽을 노려보았다. 시험 따위로는 드러나지 못했던 진짜 실력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다른 학생들도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갑작스런 실전이 부담된다기보다는, 재미있겠다는 흥분이 서린 표정. 세한기전은 전국 최고의 재능들을 싸그리 긁어모은 복마전이다. 여기 입학한 시점에서 자신의 능력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모지리는 없었다. 한시혁이 말을 이어갔다.

“각 동굴 입구에 호루라기가 비치되어 있다. 그걸 하나씩 가져가도록.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겠거나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 그걸 불면 진행 포기로 간주한다. 안전 또한 즉시 보장되고. 물론 불 경우 내가 받을 첫인상은 최악이겠지.”

한시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학생들을 쏘아보았다. 세한기전의 학생이라는 놈들이 그런 한심한 짓거리를 했다간 용서하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반 아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뭐, 시간 제한은 없다 생각해도 좋으니 느긋이 해라. 평가는 먼저 도착하는 순서대로 매기겠지만 말이야. 안에서 남을 방해하는 것도 자유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말이지.”

괜히 겁주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또 뭔가 말해줄 게 있었나 고민하던 한시혁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3등까지는 상품이 있으니 기대하도록.”

이내 한시혁이 동굴 입구 옆에 있는 결계 위에 서자, 그의 인영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학생들이 어떻게 싸우나 관찰하기 위해 미리 도착점에 준비된 모니터실로 이동한 것이었다.

얼떨결에 자기들끼리만 남겨진 학생들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얼마 안 있어 학생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일단 아무 입구든 골라서 들어가보는 녀석들과, 다른 녀석이 어딜 들어가는지 관찰하거나 주변을 조사해보는 학생들.

일단은 도착 시간 경쟁이기에 서로 협력하려고 드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일류로서 가지는 자부심 탓에 남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송한솔은 으음, 하고 신음을 흘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 눈동자가 바라보는 건 암벽 저편이었다. 동굴 안은 무척이나 넓어 끝까지 투시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바로 길이 막혀있거나 함정이 있는 ‘꽝’은 대충 추려낼 수 있었다.

“좋아, 여기다.”

한 번 쭈욱 기지개를 피며 몸을 풀고. 작은 날개가 부착된 운동화를 신은 송한솔이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 * *

앞 사람 얼굴이 안 보일 만큼 어두운 동굴 안.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상태창을 열었다. 정류장을 통해 둥지에 도착하자마자 상태창에 알림이 나타나있었다.

<시나리오 퀘스트 : 자기 소개>

<첫 수업에서 어떤 식으로든 충분한 인상을 남기시오.>

<보상 : 1,500 Credit>

“오, 이거 받으면 초감각 뚫네.”

나는 보상에 적힌 크레딧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충분한 인상을 남기라는 것. 단순히 빨리 도착하든, 무력을 과시하든, 남을 도와서 파인 플레이를 하든. 과정은 따지지 않을 테니 일단 잘 했다 소리 나오게만 해보라는 이야기였다.

이 둥지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무슨 마물이 배치돼있고 어디에 어떤 함정이 있는지도. 사실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걷다 보면 대충 떠오를 정도는 됐다. 1등할 때까지 게임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깼었으니까.

‘왼쪽 왼쪽이랑 왼쪽에 함정 떡칠, 오른쪽에 끈적이.’

정확히 몇 번째 입구인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양쪽 옆에 뭐가 있었는지는 기억한다. 내가 지금 들어온 이곳이 십수 개의 입구 중 제일 쾌적한 루트로 갈 수 있는 당첨 통로였다.

조금 걷다 보자 통로가 완전히 막혀있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앞에 있는 벽을 발로 차버렸다. 그러자 벽인 척 하고 있던 석판이 무너지며 다시 길이 드러났다. 처음 이걸 찾아냈을 때 이 게임 만든 놈 죽여버리고 싶다고 이를 갈았었다.

나는 무기로 쓸 돌멩이 몇 개를 주워 길을 나아갔다.

여긴 세한의 교수들이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더 짜증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만들어낸 둥지였다. 제일 큰 특징은 한 번 제대로 싸워보자 마력을 끌어올리는 순간, 구석에서 화살이나 흡착형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특히 마력을 강제로 흐트러뜨리는 것들로만.’

결과적으로 큰 기술은 물론 동작의 강화마저 제대로 할 수 없고, 기본적인 신체능력만으로 길을 뚫어내야만 한다.

세한기전에 입학할 수준이면 당연히 자기 실력엔 자신이 있겠지만, 여긴 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 생각하는 곳이었다. 세한에 합격해 콧대가 높아진 학생들에게, 이게 현실이라며 자존심을 뭉개려는 악취미적인 신고식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상관없었다. 물기로 축축한 동굴 바닥에서 손바닥만한 거미 형태의 마물들이 기어왔다. 저 놈들을 보고 놀라서 마력을 끌어올리는 기술을 써버리면, 그걸 감지한 다른 함정들이 연이어 작동해 궁지에 몰리는 설계였다.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1>

바닥에 널려있던 돌멩이들을 휙 던진다. 염동력의 역장이 돌을 감싸 공중에 띄우더니, 그대로 적에게 투척했다. 돌멩이의 탄환이 정확한 조준으로 거미 세 마리의 한쪽 다리들을 짓뭉갰다. 으으. 나는 징그러워서 휙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대놓고 능력을 써도 안 보이는 곳에 널려있을 함정들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마력이 회전하는 낌새를 느끼면 쏘아서 저지하기 위한 것들이었고, 유감스럽게도 난 애초에 몸 안에 한 방울의 마력도 없었다.

아무 함정도 작동하지 않고 투명인간처럼 지나간다. 중간에 여러 갈림길들이 나왔지만, 투시와 사이코메트리 두 능력을 적당히 병용하면 길찾기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래도 1등은 못할 거라는 게 어이없는 일이지.’

이내 너무나 손쉽게 출구 직전의 공간에 도달했다. 오른쪽 끝과 왼쪽 끝. 양쪽 문의 손잡이를 동시에 잡아당겨야 열리는 관문. 혼자 왔으면 여기서 다른 한 명이 올 때까지 줄창 기다리든가, 아니면 포기하고 입구로 돌아가든가 해야 했다.

정말 사람 짜증나게 하는 데에는 도가 튼 구조였다. 나는 염동력으로 반대편 문의 손잡이를 같이 당겼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동굴의 출구와 이어진 모니터실이 나타났다.

가운데의 소파와 테이블엔 커피 자판기와 간식들이 놓여있고, 위에 달린 모니터들은 동굴 안에서 분투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송출하고 있었다. 한시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쪽 데스크에서 열심히 평가지를 적고 있는 중이겠지.

“또 2등이라니, 아깝게 됐네요.”

소파에 앉아있던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둥지를 통과해 모니터실에 도착한 건 나와 그녀 뿐이었다. 1등으로 도착한 사람은 차대엽도 유매도 아니었다. 밝은 황금빛의 머리칼에, 머리 위에서 쫑긋대는 여우귀.

결계와 부적술을 특기로 하는 여우 혼혈.

“···금예린.”

“어머.”

내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별로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렇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어린 나이에 가문 하나를 이끌고 있는 아가씨가 쉽게 당황한 얼굴을 보여줄 리 없었다. 금예린이 미소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참 더 걸릴 것 같은데. 둘이서 수다라도 떨고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있고요.”

그녀가 믹스커피 봉지를 종이컵에 넣어 건네주었다. 그건 결코 화기애애한 친목 도모 따위가 아니라, 이른바 탐색전의 요청이었다. 방금까지 둥지를 지나온 내 행적에 큰 흥미가 있다는 듯.

금예린이 부채 너머로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 자기소개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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