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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11화 (11/113)

< 자기소개 (3) >

한시혁은 모니터실 안의 데스크에서 펜을 움직였다.

담임 따위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맡은 일이라면 완벽하게 처리하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누구보다 ‘눈’이 좋은 그는, 동시에 송출되고 있는 수십 개의 모니터를 쳐다보며 세세한 감점사항을 평가지에 적어나가고 있었다.

모든 것에 깐깐한 그로서도 이 둥지는 잘 만들어져있다 생각했다. 세한에 입학한 학생이라면 모두 한 번씩 거쳐가는 신고식. 선배나 졸업생 누구한테 물어봐도 거기 참 더럽게 짜증난다고 욕을 하는 장소다. 훌륭한 둥지라는 반증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어려운 구조는 아니야.’

적어도 세한기전에 들어올 수 있을 만한 실력이라면 충분히 돌파할 만한 난이도였다. 다만 그것은 냉정하게 대응할 때의 얘기고, 시행착오를 거치기 전엔 고생깨나 할 것이다.

끈질긴 소모전에 억지로 끌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흙탕이 되어가면서. 한껏 조무래기라 얕본 마물한테 호루라기를 불어야 하나 공포까지 느끼면, 이겨도 이긴 기분이 아니겠지.

- 됐어, 그냥 주변 통째로 다 날려버려주지!

한시혁의 눈이 돌아갔다. 화면 한쪽에서 짜증을 참지 못한 자세빈이 커다란 기술을 쓰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슬슬 초조해질 만한 시간이긴 했다. 어떤 함정이나 매복이 있든 간에, 큰 기술로 주변을 쓸어버리면 안전지대는 확보된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행동은 아니었다. 마력을 쓰려고 할 때마다 발동하는 함정과, 매복한 마물이 쏘아내는 마비침. 기술을 사용하는 ‘척’만 하며 주변에 있는 숫자를 대충 세어보고, 한 번까진 버틸 만하다고 판단해 결정한 것이다.

‘나쁘지는 않아.’

리스크를 짊어져서라도 최단경로를 확보하려는 사고방식. 어떤 의미로는 스마트한 싸움법이었다. 하지만 학생은 학생. 판단의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이 둥지엔 더욱 커다란 마력을 끌어낼 때까지 일부러 공격하지 않는 함정 또한 있었다.

- 크악!

자세빈이 이전보다 2배는 많은 화살과 함정에 집중포화를 당하고, 마력이 흐뜨러진 채 무릎을 꿇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예 쓰러질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건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들이 함정을 적당히 막아내준 덕분이었다.

- 그냥 천천히 치우면서 가자니까? 뭐가 문제야.

- 빨리 가서 1등해야 한다 뭐 그런 거겠지. 귀찮게.

- 이 자식들··· 도와주지 말라고 했잖아!

머리에서 늑대귀를 살랑이는 여학생과, 등에 박쥐 날개를 달고 있는 남학생. 혼자 가겠다 우기는 자세빈 뒤를, 따라가는 건 자유라며 졸졸 쫓아온 소꿉친구들이었다. 둘 모두 상당한 실력자였다. 자세빈이 분하다는 얼굴로 화를 냈다.

‘이것도 인망이 있는 거라 해야 할까···.’

한시혁이 펜 뒤쪽으로 이마를 눌렀다. 이 둥지를 가장 무난하게 돌파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세 명 이상이 협력해 진행하는 것이다. 즉 한 명이 마력을 쓰고, 한 명이 함정을 대신 받아주며, 한 명이 앞에서 오는 마물들을 막아낸다.

그 역할 배분을 현장에서 조율해 호흡을 맞출 수 있느냐 또한 이 수업의 중요한 평가 요소였다. 혼자선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다.

결국 여차할 때 믿을 수 있는 건 몸뚱이 하나 뿐. 이 신고식을 거쳐간 학생들은 수수하다 등한시하던 기초 체력 단련을 빼먹지 않게 된다. 특히 이번 차석 송한솔. 그 배짱 있는 녀석은 다 좋은데 몸의 단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이번에 아픈 꼴을 좀 당하면 생각을 고쳐먹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송한솔은 이미 아무렇지 않게 출구의 문을 열어제끼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속도였다. 마치 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정답인 길만 골라 마력을 쓸 필요도 없이 둥지를 통과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직전, 송한솔이 바위 사이에 숨겨진 CCTV 쪽으로 고개를 돌려 화면에 브이사인을 보냈다.

‘정말 만만히 볼 수 없는 녀석이야.’

원래 충분히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도록 설계되어있는 둥지인데, 전혀 보여주지 않고 간단하게 통과해버렸다. 이걸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한숨을 쉬고 고민하던 한시혁은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펜이 호쾌하게 움직였다.

- 도착순위 2등 / 감점사항 없음.

평가 점수는, 불평의 여지 없는 만점이었다.

* * *

나는 금예린이 건네준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커피를 넣기 전 봉지 끝을 꼬집어 설탕을 덜어냈다. 3등이 도착할 때까지 최소한 15분은 남아있었다. 얘기할 시간은 충분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김이 피어오르는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금예린은 생긋 미소짓고만 있었다.

“수다를 떨자니, 같이 쟤들 관전이라도 하자고?”

“그렇죠. 의견 교환은 언제나 옳은 일이니.”

금예린의 은근한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쪽 또한 직접 싸워서 알아내기보단 뒤에서 정보를 모으기를 즐기는 인간. 고지식한 수석보다는 훨씬 이야기가 통할 것 같다고. 그렇지만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난 별론데.”

내 즉답에 맞은편의 금예린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이미 전부 다 아는데 의견 교환을 왜 해?’

금예린이 정보 수집에 얼마나 수고를 들였든 상관이 없었다. 내가 같은 반 녀석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면 얼씨구나 미끼를 물고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나는 이미 칼 쥘 때 하는 버릇까지 다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알고 싶은 게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금예린에게 말했다.

“그보다 같은 반 친구한테 뭔 존댓말이야?”

“금가를 이끌고 있는 당주로서, 공적인 자리에서 학우 분들께 평대를 할 수야 없지요. 가문의 품위와도 연관되니.”

오글거린다고 시비를 걸었지만 돌아온 것은 은은한 미소였다. 철면피도 저 정도면 예술의 경지였다. 속에 엄청난 성깔을 숨기고 있는 주제에 완벽하게 내숭을 떨고 있었다. 녹차를 한 모금 마신 금예린이 손의 부채를 탁 접고 말했다.

“꽤 비싸게 구시는군요. 그럼 저부터 말해볼까요, 이번 입학생들 중 주목해야 할 요주의 인물들에 대해서.”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눈짓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우선은 당연히 차대엽이겠죠. 이 둥지는 아무래도 마력을 쓰기 힘들게 장치해놓은 것 같지만, 저걸 상대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저 남자는 검귀 중에서도 특별하니.”

금예린이 화면 중앙에 있는 차대엽을 가리켰다. 투박한 보급용 무기를 들고 아무렇지 않게 마물들을 학살하고 있다. 태생적으로 운이 나쁜 건지 제일 번거로운 입구에 들어가버렸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실, 차대엽은 마력을 끌어올려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마력을 흐트러뜨리는 화살이 쏘아져온들 그냥 피부로 튕겨내버릴 테니까. 지금 저 녀석이 마력을 개방하지 않는 건 아마 입학시험 때 입었다는 부상 때문일 것이다.

‘저렇게 해도 아마 3등 도착이겠지.’

금예린 또한 남은 학생들 중엔 차대엽을 제일로 꼽았다. 내가 게임에서 차대엽으로 1등을 했을 땐 일단 맨 처음 금예린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켰다. 남을 방해하는 건 자유니까. 내가 손에 턱을 괴고 모니터를 바라보자 해설이 이어졌다.

“그리고 진소란. 백익 혼혈들 중에서 오래간만에 태어난 돌연변이죠. 마력을 회전시키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서, 함정들이 날아오기 전에 두 번째 공격을 끝낼 수 있어요. 저 페이스로 진행하면 아마 4등은 그녀 차지가 아닐까 싶네요.”

금예린의 말에 나는 모니터 한쪽을 가리켰다.

“그럼 쟤. 유매는?”

“···저 분은 아직 정보가 없어요. 2학년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설 씨의 동생이라는 건 어찌 어찌 조사했지만. 그래도 실기시험에서 보여준 실력과, 마녀 혼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경계하기는 충분하고 넘치겠죠. 아마 가진 능력은 마력 통치.”

금예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조사한 정보만을 활용하는 건 2류. 제한적인 정보를 취합해,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일류였다. 유매가 가진 혈통능력이 마력 통치라. 합리적인 추론이기는 했다.

“어때요, 꽤 도움이 됐죠?”

“아니. 다 알고 있었는데. 그리고 그거 아니야.”

나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다 마신 종이컵 끝을 물었다. 마력 통치. 자신 체내는 물론 주변의 마력마저 조작할 수 있는 마녀 혼혈 특유의 제어능력. 유매의 힘은 그런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의 한 단계 위에 있는 능력이었다.

“설마 벌써 조사를 끝냈다고요?”

금예린이 의심하는 듯한 얼굴을 보냈다. 원래 유명했던 차대엽과는 경우가 다르다. 유매는 아예 바깥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다가 실기시험 때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였다. 그런데 벌써 능력에 대한 해명을 끝냈다는 건 믿기 무리가 있었다.

“다 독자적인 정보원이 있다고. 그리고 조사한 건 유매 뿐만이 아니야. 네가 숨기는 능력도 당연히 알고 있지.”

“···거짓말. 정보가 새어나갈 경로는 없어요.”

당연하겠지. 자기 기술은 신경 써서 꽁꽁 감췄을 테니까. 드디어 여우님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셨다. 입으로는 거짓말이라 해도, 내 말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는 걸 간파한 모양이었다. 나는 짓궂은 웃음을 지으면서 금예린을 도발했다.

“그럼 내기 할래? 네가 어떻게 1등으로 여기 도착했는지. 못 맞추면 유매 능력은 물론 서비스로 내 능력도 알려줄게. 대신에 내가 네 비밀을 정확히 맞추면···.”

나는 손가락으로 금예린이 걸고 있는 목걸이를 가리켰다.

“그거, 나한테 넘겨.”

< 자기소개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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