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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13화 (13/113)

< 방과후 (1) >

학생들이 교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일과가 다 끝날 무렵이었다. 여기저기 흙먼지와 상처 투성이에 체육복은 다 헤졌다. 등교 첫날이라고는 믿기 힘든 몰골들이었다. 그리고 한시혁은 그런 것에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종례를 진행했다.

칠판에는 이번 수업의 성적 우수자가 쓰여있었다.

- 1등. 금예린. 2등. 송한솔. 3등. 차대엽.

“내일은 자기분석과 함께 둥지의 구조를 보고 정석적인 대응법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오늘 개인영상들은 학급 클라우드에 업로드될 테니 보면서 공부하도록.”

굳이 1등과 2등의 영상을 참고하라,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금예린은 아예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송한솔도 거의 싸우는 일 없이 둥지를 통과했으니. 다른 학생이 얻어낼 만한 건 없을 것이다. 사실 이번 수업은 상당히 의도와 달라졌다.

1등과 2등도 그렇지만, 가장 커다란 변수는 유매였다. 둥지가 어렵고 말고 이전에 저런 게 안에서 작정하고 날뛰면 일반 학생들은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 마물과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박살이 났으니 피드백을 해주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 담임인 한시혁의 성격을 고려하면,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단 신입생들 콧대를 짓눌러놓는다는 목적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달성했으니까.

‘멍청했어.’

그리고 금예린은 그에 따른 교실 내 구도의 변화나, 이를 가는 학생들이 대인전 역량만을 키우게 될 결과의 영향 따위는 아랑곳 않고, 온통 송한솔이라는 정체불명의 급우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야 내기로 잃어버린 게 너무 컸다.

금가에 내려오는 가보들 중의 하나, 여우구슬.

솔직히 그것의 능력은 만일에 대비한 안전장치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어차피 금예린의 온갖 주술로도 대응하지 못하고 여우구슬이 깨질 만한 상황이면, 바로 추격타를 맞아 확인사살을 당한다. 실전에서의 쓸모는 작은 위안 정도였다.

하지만 여우구슬은 그보다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다. 저만한 주물을 아무도 깨뜨리지 않고 대대로 계승해왔다. 여우는 결코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는 신중함의 미덕.

그런 걸 오늘 처음 만난 인간한테 낼름 빼앗기다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반드시 되돌려 받을 것이다. 물론 서로 납득한 조건에서 정당하게 양도한 물건이니 폭력을 동원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내기에는 다음이란 게 있다.

‘저는 질 승부 따위는 하지 않아요.’

금예린이 부채를 펼쳤다. 얼굴을 마주한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벌써부터 감이 왔다. 송한솔은 재대결을 신청하면 절대 물러나지 않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뺏어오는 건 간단했다.

하지만 단순히 여우구슬을 돌려받기만 해서는 성에 안 찬다. 감히 가문의 위신을 등에 진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준 대가. 완전히 탈탈 벗겨먹어줄 생각이었다. 절대적인 정보의 우위로 부당한 조건의 내기를 걸어 확실하게 패배시킨다.

‘욕심 많은 남자니 다른 가보를 걸면 바로 넘어오겠죠.’

그 상상만으로도 유쾌해졌다. 책상에 앉은 금예린은 체육복 소매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보았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혼자 있을 때 펴보라 했던 쪽지였다.

그 자리에서 볼펜으로 슥슥 써서 접어준 종이고, 무슨 술식이 새겨진 흔적은 없는 모양이지만 그 남자는 방심할 수 없다. 금예린 고개를 돌려 맨 뒷자리에서 앉아있는 송한솔을 바라보았다. 종례가 끝나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송한솔이 교실에서 나가는 걸 확인한 금예린은, 그 자리에서 종이쪽지를 슬쩍 펴보았다.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뚜벅뚜벅 구석의 쓰레기통까지 걸어간 그녀가 종이쪽지를 버리는 척하며 여우불로 먼지가 되도록 태워버렸다.

쪽지에 쓰여있는 밀고는 이러했다.

- 금가 장로 2석과 3석, 7석은 배신자니 조심.

‘헛소리.’

그 분들이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그 남자가 다른 집안의 사정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말하는 건가. 그러면서도. 피가 배어나올 만큼 입술을 깨물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 * *

“진짜 거지같은 거 준다.”

나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았다. 맥동하는 듯 따뜻한 촉감이 느껴지는 사과 만한 크기의 열매. 둥지를 3등 안에 돌파한 것으로 담임에게 건네받은 상품이었다. 분명 어떤 마물의 내단을 가공해낸 것이라고 했다.

혼혈들에게 있어선 먹는 것만으로 마력을 소폭 증진시켜주는 영약과 같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마력 자체를 품지 못하는 몸인 나한테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해봐야 사과 모양으로 만든 괴물 내장일 뿐이다. 솔직히 들고 있기도 징그러웠다.

이게 상품인 건 애초에 알고 있었으니 실망은 없지만. 나는 터벅터벅 걸어갔고, 등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느껴졌다. 나름대로 기척을 숨기고 있지만 지금의 내겐 어림도 없었다. 애초에 뒤돌아보면 벽에 숨어도 투시로 다 보였다.

[마인드맵 확장 : 초감각 Lv.1]

미행을 눈치챈 건 새로 얻은 능력 덕분이었다. 위기 시 발동하는 직감 비슷한 것인 제6감과 더불어, 정신을 집중하면 오감을 한계까지 날카롭게 벼려낼 수 있다. 감각을 민감하게 해봤자 딱히 신체능력 자체가 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비어있는 강의실에 들어가 아무 자리에나 털썩 앉았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놈을 불러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녀석은 복도 저편으로 다시 돌아가더니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문 앞에서 슥 고개를 돌려 놀란 척을 하면서 말했다.

“음? 송한솔인가. 이런 데에 혼자 있다니 별일이군.”

“쇼를 한다 진짜.”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자세빈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지나가다 마주쳐서 놀랐다는 얼굴이다. 종례 끝나고 지금껏 내내 뒤를 따라오더니 아직도 들키지 않았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헛소리 말고. 이게 목적이지?”

나는 손에 든 분홍색 사과 비슷한 걸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자세빈의 시선이 내단을 향했다. 이건 기본적으로 세한기전을 제외하면 기사단에서 자기들끼리만 먹어대는 물건이었다. 돈 주고 사려 해도 물량 자체가 없는 비매품이다.

자세빈은 필사적으로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계속 눈이 열매를 힐끔거리는 걸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내단을 노리고 왔다는 걸 인정하고 앞의 의자를 땡겨 앉았다.

“···그래. 들켰나. 값은 섭섭하지 않게 쳐주지.”

상당히 초조해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유는 대강 예상이 됐다. 오늘 둥지에서 유매와 대치하고서, 일 대 일로는 어떻게 해도 불리하다는 걸 느껴버린 것이다. 어쩌면 나름 천재적인 센스로 유매의 능력의 대응법을 알아낸 걸지도 몰랐다.

즉, 몸 안에 있는 마력이 거대하고 구심력이 있을수록 유매의 간섭에 받는 영향도 적어진다는 것. 그리고 단시간에 보유 마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내단 섭취 정도밖에 없었다. 손가락으로 열매를 굴리는 나는 손에 턱을 괴고 말했다.

“유매 걔가 세긴 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넌 아무래도 뭔가 착각하고 있군. 오늘 그 자식은 나한테 꼬리 말고 도망쳤어!”

자세빈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완전히 찔려하고 있다. 이 정도까지 알기 쉽게 반응해주니 오히려 재미있었다.

“3대 1이니까 그렇지.”

“다른 두 녀석은 나서지도 않았어.”

“빈틈이 보이는 순간 역습하려고 견제하고 있었다. 지.”

하긴 3대 1이라고는 해도 마력 하나 끌어내기 힘든 그 둥지 속에서 유매를 후퇴시킨 건 엄청난 전적이긴 했다. 저쪽은 마음대로 마력을 써대니. 둥지 안에서 유매와 만난 녀석들 중 완전히 박살나지 않은 건 자세빈네 3인조가 유일할 것이다.

“근데 왜 1등이랑 3등한테는 안 가보고?”

“놀리는 거냐? 그 둘은 그 자리에서 먹어버렸다.”

“아 그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차대엽은 받자마자 간식처럼 씹어먹는 걸 봤는데 금예린도 먹었을 줄은 몰랐네. 그리고 다시 책상에 앉은 자세빈이 팔짱을 끼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내단에도 혈통에 맞는 상성이란 게 있다. 네가 받은 건 희망 고문자의 내단을 가공한 열매. 내가 몇 년을 찾아 돌아다녀도 구하지 못했던 몽마 혼혈 특화의 내단이다.”

나는 그제야 자세빈의 초조함의 이유를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마왕의 아들인데 내단쯤은 구할 수 있지 않나, 싶었는데 이렇게 자존심 접고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 언제 매물이 풀릴지 알 수 없는 자기에게 딱 맞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흠. 좋아. 일단 가격 좀 알아보고. 귀한 물건인데 네가 시세 속이고서 헐값에 가져갈지 어떻게 알아?”

“뭐라고? 망할 자식, 나는 마왕의 아들이다!”

“아 그러셔. 나는 그냥 송한솔인데.”

나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자세빈을 쳐다보았다. 이제 자기 부모 운운하며 빽 내세울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게임에서도 차대엽한테 아빠 얘기 꺼내다 손목이 박살난 놈이. 자세빈은 꽤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자기 배경에 위축되긴커녕 미동도 없는 놈은 처음 본다 이거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좀 알아보고, 내가 연락할게.”

딱히 정말로 시세를 조사할 생각은 없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자세빈이 이런 데에서 돈을 떼먹을 리 없으니까. 단지 다른 구매자가 있다 간도 좀 치고 기다리게 해야 됐으니까 내놓으라고 가격을 올려서 살 거라 기대했을 뿐.

복도로 나온 나는 아무튼 편하게 돈 벌었단 생각에 휘파람을 불었다.

* * *

불이 꺼진 채 텅 비어있는 강의실. 자세빈은 충격받은 얼굴로 책상에 앉아, 방금 송한솔이 한 말을 되짚어보았다.

마왕의 아들을 상대로도 돈 문제로 속을까봐 의심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마왕이라 철없이 자랑한 말에, 그 녀석이 한 순간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내뱉은 말.

‘저 녀석, 고아인가?’

언제나 오만했던 그 얼굴에 작은 죄책감이 어렸다. 자세빈은 한참을 그렇게 심각하게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 방과후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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