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과후 (2) >
나는 돌아가기 전에 잠깐 도서관에 들렀다.
최소한의 정보 수집을 위해서였다. 메인 시나리오의 흐름 자체는 내 머릿속에 대강 들어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이 세계에 대해 충분히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딘가 게임 설정과 달라진 점은 없는지 책을 펴고 대조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시나리오에 있어 진짜 중요한 정보는 도서관 같은 데서 찾을 수 없으니, 큰 맥락만 확인한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제목의 책을 몇 권 골랐다. 책들을 품에 안고 책상으로 가자, 이미 열람석은 꽉꽉 들어차 남은 자리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검은색 교복, 즉 기사육성과가 아닌 다른 학부의 학생들이었다. 우리 반 애들이 첫날부터 연습용 둥지에서 진을 뺀 것처럼, 지금 도서관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발제 준비니 과제니 하는 것으로 세한의 지옥을 체험하고 있었다.
대출은 반납 귀찮아서 싫은데. 눈썹을 찌푸리던 나는 신기한 광경을 목도했다. 도서관 맨 구석, 기다란 책상 끝의 몇 자리가 그대로 비어있었다. 보아하니 누가 맡아두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그쪽에 걸어가 의자를 빼냈다.
책들을 책상 위에 툭 내려놓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자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최대한 조용하게 내려둔 거였는데도 그랬다. 날 올려다보는 사람의 얼굴에 나도 놀랐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맑은 하늘색 눈동자와, 한쪽 옆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내린 정갈한 단발. 머리 한쪽에는 자그마한 왕관처럼 생긴 모자가 달려있었다.
‘엥?’
이 사람이 왜 여깄어. 의문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슬쩍 맞은편 여자의 복장을 확인했다.
새하얀 교복은 기사육성과의 상징이었고, 노란색 명찰은 사계절 중 여름, 즉 2학년생인 걸 나타냈다. 명찰에는 그녀의 성과 외자 이름 두 글자가 바느질되어 있었다. 유 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유매의 언니였다. 실력은 유매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세한의 2학년생 중 최강자를 꼽으라면 반드시 후보로 거론되는 괴물이었다. 내가 백 명쯤 있어야 상대가 되겠지.
유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잠깐 눈이 마주친 나는 고개를 꾸벅여 인사했다. 선배의 명찰을 보고서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딱히 내가 지금 당장 저 선배한테 친한 척 말 걸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우연히 만난 건 신기하긴 한데.’
나는 신경쓰지 말자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힐끔.
공부하듯이 자세히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대충 요점만 눈으로 확인하며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확인된 마물들의 생태나 각 혼혈의 특징들을 살펴보니, 내가 알고 있는 혈통시대의 설정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또 확인해야 할 것은···.
다시 힐끔.
“후···.”
나는 싱긋 웃으며 책을 덮었다. 왜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는 건지 답을 듣지 않으면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휙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선배를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돌릴 생각도 없이 이쪽 얼굴을 대놓고 마주보았다.
“1학년생···이시군요?”
“아, 네.”
대답한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도서관 안에선 정숙이 원칙이기에 목소리를 낮춰서 대화해도 조금 눈치가 보였다. 그러자 유설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소리는 새어나가지 않게 해뒀으니.”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소리는 새어나가지 않게 해뒀다니. 너무 당연하게 말해서 뭐라 대꾸할 말도 없었다. 분명 마력으로 뭔가를 한 거겠지. 실제로 다른 자리의 학생들은 이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여기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처럼.
책을 옆으로 치운 유설이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제 막 입학했을 텐데, 벌써 제 환술을 간파한 거군요···. 혹시 당신이 이번 학년 사전합격자 중 한 명인가요?”
환술? 나는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눈치챘다. 이 주변 자리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던 이유나, 선배가 놀라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본 이유. 아마도 여긴 벽이나 다른 뭔가처럼 보이도록 마력에 의한 왜곡이 들어가있는 것이다.
마력의 왜곡같이 대단한 걸 눈으로 볼 능력이 없는 나는 뭣도 모르고 걸어와서 선배의 앞자리에 앉았고, 자신이 만든 요새가 간단하게 침략당한 선배는 놀라서 너 뭐냐고 화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선배에게 말했다.
“아니 뭐, 죄송하네요. 자리가 여기밖에 없어서.”
“아뇨. 감탄했을 뿐이예요. 1학년인데 대단하네요···.”
건성인 사과에 선배가 손사래를 저었다. 그야 도서관은 학생 모두에게 개방된 공공시설이니, 내가 여기 앉았다고 해서 용서를 구할 건 없었다. 선배가 우물쭈물대다 말을 이었다.
“1학년이시라면 혹시··· 유매라는 아이와 친한가요?”
“아뇨, 말도 안 해봤는데요. 아직 첫날이고.”
내 대답에 선배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그 모습에 뭔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는 변명하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지금 우리 학년에 걔 모르는 애 없을 거예요.”
이건 진심이었다. 유매하고는 아직 말 한 번 안 해본 사이지만, 그 폭군께서는 등교 첫날만에 모든 학생들한테 확실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오늘 둥지에서 10등 바깥으로 도착한 녀석들은 전부 다 유매한테 한 번 박살난 뒤 기어온 것이다.
“걔가 오늘 무슨 짓을 했냐면···.”
내가 모니터실의 특등석에서 관람한 유매의 폭거를 하나하나 얘기해주자, 차분한 표정을 고수하던 유설은 눈을 빛내며 내 말을 경청했다. 같은 학년 입장에선 이가 갈리는 짓거리지만, 언니로서는 동생이 첫날부터 활약한 게 뿌듯할 것이다.
“혹시··· 괜찮으시면 다음에 또 그 아이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도와드릴 테니···.”
유설이 이쪽에 연락처를 내밀었다. 학교 보낸 아이 걱정하는 부모님도 아니고, 참 동생 사랑이 지극한 언니였다. 저쪽이 그걸 그리 좋게 여기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쨌든 세한의 실력자 중 한 명과 우호적 관계를 맺을 기회였다.
“그리고 이걸.”
이내 유설이 교복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예쁜 편지봉투에는 복잡하게 세공된 눈꽃 문양이 그려져있었다. 아마 마력으로 보호를 걸어둔 모양이었다. 내 손에 편지를 건네준 유설이 절실함이 깃든 눈동자로 말했다.
“이 편지를··· 그 아이에게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왜 직접 가서 안 주고요? 하고 되물을 만큼 나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애초에 만나주질 않으니까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쓰는 거겠지. 방금 만난 1학년생에게 머리 숙이며 전달을 부탁할 만큼 자매의 관계는 궁지에 몰려있는 것이다.
‘이걸 알겠다고 해야 하나.’
나는 볼을 긁적였다. 유매라는 애는 언니에 대한 복수심 하나로 세한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설이 보낸 편지 따위를 읽어줄 리가 없었다.
일단 승낙하면 인간적으로 가서 건네주는 척은 해야 할 텐데,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거절당하는 건 백 퍼센트고, 아마 유설의 끄냐풀이라고 멱살 잡혀 추궁당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고문당한다. 학교 안이라도 상관없이 당할 것이다.
솔직히 이런 지뢰의 운반책을 맡을 만큼 담력이 있지는 않았다. 나는 거절하려고 마음을 굳히고서 편지를 잡았고.
내 눈앞에 익숙한 모양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아이템 퀘스트 : 유설의 편지>
<대상에게 편지를 전달해 읽도록 유도하시오.>
<보상 : 6,000 Credit>
나는 눈을 휘동그레 떴다. 6천? 이 편지를 읽게 만들면 그것만으로 6천 크레딧이라고? 6천이면 과장 좀 보태서 세상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액수였다. 거절이라는 선택지가 내 머리에서 지워졌다.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노력해보죠.”
그러자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듯 선배가 활짝 웃었다.
< 방과후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