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매 (1) >
나는 이른 새벽에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
원할 때 곧바로 숙면하고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는 건 의식을 하면 자연스레 가능했다. 이 또한 정신 능력자의 특권인지도 몰랐다. 2인 1실인 다른 숙소와 달리 수석과 차석은 개인실을 배정해주기에 아주 쾌적한 수면을 할 수 있었다.
아직 점호까진 꽤 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캠퍼스 바깥의 공원으로 나가보았다. 보통 부지런한 녀석들은 단련실에 들어가 온갖 괴상한 기구들로 몸과 마력을 쥐어짜지만, 내 능력을 성장시키는 데에 그런 것들은 당장 별 도움이 안 됐다.
애초에 몸 쪽을 단련해봤자 괴물같은 혼혈 놈들과의 간극은 좁힐 수가 없다. 내가 여기서 더 근육을 붙인다고 빌딩 사이를 막 뛰어다니는 슈퍼맨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염력을 더 효율적으로 쓰는 훈련이었다. 한 번에 낼 수 있는 출력은 크레딧으로 강화해야 하지만, 같은 위력이어도 사용자의 기술에 따라 유지 시간이 확연히 차이났다. 길을 걷던 나는 공중에 한쪽 발을 들어올렸다.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2>
그리고 염력을 모아 만들어진 발판이 내 발밑에 생성되었다. 발판을 딛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순간, 뒤쪽의 발판이 그대로 사라진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휘파람을 불었다. 공중에 나만의 징검다리를 만들어 호수 너머를 건너간다.
이 방식이 염동력으로 내 몸 전체를 들어올려 띄우는 것보다 훨씬 힘의 소모가 적었다. 꽤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기에 지금은 걷는 정도의 속도밖에 맞출 수 없지만, 연습하다 보면 허겁지겁 뛰면서도 자연스레 발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 힘들어···.”
나는 머리가 뻑뻑해지는 감각에 아래로 내려왔다. 근육과 똑같이 염력 또한 쓰면 쓸수록 회복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해졌다. 틈 날 때마다 계속 능력을 써서 정신에 적당한 부하를 주는 게 중요했다. 나는 잠깐 쉬었다 다시 공중을 걸었다.
캠퍼스로 돌아왔을 땐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쳐있었다. 아침 점호를 위해 모인 운동장에선 애들이 수다를 떨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기지개를 펴는 차대엽에게 다가갔다.
“어이 차씨. 좋은 아침.”
“차씨라니···. 뭔가 아저씨 같은데.”
“그럼 차군. 설마 방금도 단련실 갔다 왔냐?”
아닌 게 아니라 차대엽은 어제 둥지에서 마물들과 그렇게 엉겨붙고도 만족을 못했는지 밤까지 단련실에 박혀있다 땀 범벅이 되어서 돌아왔다. 밤에 마실 거 뽑으려고 복도에 나왔다가 차대엽과 마주쳤을 땐 어이가 없어서 눈을 의심했다.
“아니. 아침엔 수업이 있잖아.”
“그렇지···.”
나는 안심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세한기전은 학생을 어떻게 굴려야 잘 굴렸나 소문이 날까만 고민하는 곳인데, 수업만으로도 버거운 게 정상이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이른 아침부터 체력을 빼면 일과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옆에 선 차대엽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몸을 만전의 상태로 조정해야 하니까. 감각을 날카롭게 다듬을 수 있게, 도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왔어.”
나는 외계인을 보는 표정으로 차대엽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얘는 어제 수업 때 둥지 가서 마물이랑 싸우고, 그대로 밤 늦게까지 단련실에서 몸을 고문하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검술 연습을 한바탕 한 다음 지금 여기 서있다는 건가?
정신 나갔냐? 하고 묻는 내 시선에 차대엽이 대답했다.
“이 정도는 해야 1등을 하겠지.”
“어제 3등했다고 꽁해진 건 아니지?”
“부족함을 느낀 건 맞아. 난 싸우는 것밖에 못 하니까.”
차대엽이 담담한 목소리로 인정했다. 금예린은 규칙 자체를 비웃듯 둥지에 들어가지조차 않았고, 나는 싸울 필요가 없는 길로 돌아왔다. 마물과 함정을 모조리 정공법으로 도륙내고 온 차대엽은 결국 우리 둘보다 빨리 도착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기 방식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더욱 강해지면 될 뿐. 그게 차대엽의 고지식함이었다. 이내 점호를 하러 나온 담임 한시혁이 확성기에 대고 말했다.
“매일 아침 가볍게 아침 구보를 뛸 거다. 부지런하게 일어나 달리는 습관 하나하나가 미래의 너희들을 만든다.”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이었다. 처음엔 귀찮아도 일단 습관이 되면 아침에 가볍게 조깅하는 것만큼 기분 좋고 상쾌한 것이 없었다.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다리를 풀었다. 그리고 같은 반 애들이 구호에 맞춰 일렬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쟤네는 가볍게 휙휙 뛰고 있는데 나는 전력질주를 해야 겨우 뒤따라갈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당연히 숨이 찼다. 반 애들 몇몇이 이상하단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침에 염력을 쓰고 와서 멀미까지 났다.
“우웨엑!”
결국 나는 진짜 쓰러져 토악질을 했다.
* * *
교복으로 갈아입은 뒤 조례 전의 교실.
“죽을게.”
나는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중얼거렸다. 부끄러워서 사람을 마주할 수가 없다. 차대엽은 컨디션이 안 좋은 날도 있는 거라며 위로해줬지만 이건 순수하게 내 몸뚱아리 문제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책상에 뭔가를 툭 내던졌다.
“이상한 거 주워먹고 배탈이라도 난 거냐.”
고개를 들어보자 앞에 서있는 건 자세빈이었다. 책상엔 매점에서 팔고 있는 새콤달콤 포도맛 하나가 놓여있었다. 나는 포장을 까서 입에 보라색 캐러멜 하나를 쏙 집어넣었다.
“뭐야 이거. 뇌물?”
아마 내단을 자기한테 팔라는 무언의 압박인 듯 했다. 안 그래도 어차피 제값 쳐서 사줄 구매자도 없고, 내가 먹어봤자 의미도 없고. 자세빈에게 팔기로 반쯤 결정한 상태였다.
“달리다가 쓰러지다니 한심하군. 끼니 거른 놈처럼.”
“아침밥은 원래 안 먹어.”
그냥 우유 한 컵 마시면 됐지 아침부터 든든히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서 싫었다. 그러자 마음에 안 드는지 자세빈이 입가를 이죽였다. 나는 두 개째 캐러멜을 입에 넣었다. 솔직히 아직 좀 멀미가 났는데 씹을 걸 줘서 상당히 고마웠다.
“흥. 당장 내단이나 나한테 넘겨.”
콧숨을 쉰 자세빈이 자리로 돌아갔다. 결국 빨리 내단 좀 팔라고 안달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좀 더 버티면 결국 제발 팔라고 급매가를 제시해 올 것이다. 저쪽에서 자세빈의 소꿉친구들이 신세 지고 있습니다, 인사했고 나도 웃어주었다.
‘지금 중요한 건 내단보다 유매 쪽인데···.’
유매는 교실 창가 자리에서 턱을 괴고 있었다. 주변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이미 우리 반에서 그녀는 공포의 아이콘 같은 거였다. 나는 안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봉투를 만져보았다. 유설 선배가 자기 동생에게 전달해달라 부탁한 편지.
자그마치 6천 크레딧이 걸려있는 지뢰였다. 지금 가서 건네주는 건 상책이 아니다. 백 퍼센트 편지 자체를 뺏겨서 처분당한다. 걸린 게 걸린 것이니 최소한 초면에서 벗어나 이야기가 통하는 사이가 됐을 때 조심스럽게 전달해야 했다.
무슨 수로 유매와 연관점을 만들어야 하나 같은 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선배의 편지 건이 아니었어도 유매에게는 볼 일이 있었다. 오늘 점심시간에 바로 사건이 터질 테니까.
나는 앞에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보았다.
<시나리오 퀘스트 : 불협화음>
<오늘 기사육성과 학생 세 명이 재기불능이 되는 사건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하시오.>
<보상 : 마인드맵 확장 - 텔레파시, 2,500 Credit>
어제까지의 유매는 차라리 순한 맛이었다. 오늘 저 아가씨는 같은 반 애들 세명을 아예 불구 되기 직전까지 피떡을 만드실 예정이었다. 게임에선 도중에 차대엽이 끼어들어 말렸는데도 세 사람 다 유매에 대한 트라우마로 자퇴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폭력을 악용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차대엽과 안하무인적 태도를 고수하는 유매는 서로에게 최악의 첫인상을 가지게 되고, 그 사이는 2학기까지도 회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사전에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머릿속에 계획은 있다. 다만 만에 하나의 경우 옆에서 유매를 말릴 수 있는 인간이 필요했다. 나는 못한다. 아마 몇 놈 빼고 우리 반 대부분이 못할 것이다. 이내 난 고개를 돌려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그 몇 놈 중 하나를 쳐다보았다.
“차군. 오늘 점심시간에 할 일 있어?”
“딱히 예정은 없는데···.”
나는 조용히 대답한 짝꿍을 향해 엄지를 들어올렸다. 그렇게 이번 시나리오 해결의 가닥이 대강 잡혔다.
‘역시 주인공 버스가 최고지.’
지루한 필기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학식에서 빠르게 식사를 끝낸 나는, 차대엽을 데리고 건물 뒤편의 수풀로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곳에는 땅바닥에 쭈그려 앉아 고양이에게 빵조각을 주고 있는 유매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쉿,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고 차대엽에게 핸드폰을 맡겼다. 폰에선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차대엽은 아직 이게 뭐하는 짓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좀 있으면 아니까 거기 있어봐.”
그리고 위쪽의 건물 3층 창문에, 알고 있는 세 명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제 모니터실에서 봤었던 얼굴이다. 유매에게 완전히 박살나서 호루라기를 불게 돼버린 놈들. 녀석들은 서로 뭔가를 시시덕대더니, 창문에 화분 하나를 세워두었다.
뻔한 동기였다. 겨우겨우 세한기전에 입학하자마자 자신들의 커리어를 망쳐버린 유매에게 향하는 음습한 복수심.
차대엽이 그제야 심각한 얼굴로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나는 팔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나가야할 때는 지금이 아니었다. 그리고, 3층 창문에서 갑자기 커다란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떨어져내리는 화분. 무방비한 마녀의 머리에 떨어지면 며칠, 어쩌면 몇 주 병원 신세를 질 만큼 딱 좋은 부상을 입힐 수 있는 흉기였다. 벽 뒤에서 차대엽이 든 핸드폰이 과정을 완벽하게 촬영했다. 나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2>
충분히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정확히 유매의 뒤통수를 향해 떨어지던 화분이 우뚝, 멈추었다. 꿇어 앉아있던 유매가 나를 보고, 자신을 향해 떨어지다 멈춘 화분을 보았다.
딱히 내가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가 느끼는 마력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화분을 떨어뜨린 마력의 잔재는 위쪽 건물의 3층에서 흐를 것이다.
“미친 놈들.”
완전히 정색한 유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유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