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17화 (17/113)

< 유매 (3) >

“최악이군. 오늘 학식 메뉴보다 더 최악인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나쁜 의미로 내 예상을 깨뜨려주는구나.”

핸드폰의 영상을 본 한시혁이 한숨을 쉬었다. 송한솔이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교무실까지 끌고 온 녀석은, 자기가 저지른 일을 담임 앞에서 낱낱이 고백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순순한 태도였다. 옆에 선 한솔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네요.”

“하아···.”

그와 반대로 한시혁의 얼굴은 싸늘한 걸 넘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한시혁이 머리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학생들끼리 싸우는 데엔 관대한 편이다. 나도 여기 학생이었을 땐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댔고, 교수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재밌으니까.”

대련 시간 외에 싸우는 건 금지라고 일단 말은 해뒀지만, 사소하게 시비가 걸려 누가 더 센가 치고 박는 걸 엄격히 잡고 있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기대까지 하고 있다.

그야 전국에서 손꼽히는 재능 덩어리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지내게 하면 자기들끼리 으르렁대는 게 당연했다. 한시혁은 그런 맹수 같은 투쟁심이야말로 기사에게 어느 정도 필요한 덕목이자, 서로를 성장시켜주는 동력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정학을 먹이거나 징계를 주기보단, 당사자들을 불러 힘들어 죽을 때까지 기합을 넣어주고 마는 편이었다. 싸운 두 놈을 불러서 단련실에서 훈련을 시키면 그걸로 또 경쟁이 붙어 싸우고 있는 진풍경을 볼 수도 있었다.

‘너무 심각한 사안이면 학장이 개입하겠지만.’

하지만 이번 건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란 게 문제였다. 악의적인 괴롭힘이라 하기에도 심하게 한심하며 저열했다. 학장에게 보고하는 것 자체가 꺼려질 정도로 구제불능이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저지른 동기가 악질이야. 수업에서 패배한 복수를 이딴 식으로 하다니. 둘째 날에 이 지경이면 학기 끝날 때는 연쇄살인이라도 벌일 생각이었나?”

농담하는 어조가 아니었다. 사안이 없어도 숨 막히는 위압이 느껴질 만큼, 그 눈은 분노로 가득 차있었다.

사실 이번 일은 중징계를 받을 사안이긴 해도, 곧바로 자수한 걸 감안한다면 퇴학을 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범인은 당장 다른 학교로 전입을 준비하는 게 낫겠다 확신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손수 너희를 제적시켜주겠다고, 한시혁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더한 것을 당할지도 몰랐다. 아무튼 흉사라느니 검은 뱀이라느니 하는 살벌한 별명으로 불리는 저 기사는 잔혹한 손속으로 유명했으니까.

“며칠 내에 위원회가 열릴 테니 돌아가 봐라.”

싸늘한 목소리가 그만 꺼지란 말을 알렸다. 남학생은 십수 분 사이에 몇 년은 늙은 듯한 얼굴이었다. 인사한 남학생이 면담실 밖으로 조용히 나가자, 한솔은 녀석이 그대로 조퇴해 두 번 다시 수업에 얼굴을 비추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유매가 무서울 테니.’

한솔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이 지금 넋이 나간 듯한 상태가 된 것은 자신의 허세에 잔뜩 쫄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놈이 자수하겠단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시점에서, 퀘스트가 완료되어 한솔에게 보상이 지급되었다.

<마인드맵 확장 : 텔레파시 Lv.1>

새로 얻은 능력은 특이한 힘이었다.

텔레파시. 앞에 대면한 상대의 사고를 순간적으로 읽어내거나, 상대방의 정신에 자신의 이미지를 보내주는 능력이었다. 정신에 침입해 남의 사고를 훔쳐내는 건 현재 자신의 염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후자는 이미 가능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유매가 그 애들을 피떡으로 쥐어팬 미래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보내주니, 범인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자수하고 도망친 것이다. 아무래도 당사자니 꾸며낸 것이 아니란 실감이 들었겠지. 웃는 한솔에게 한시혁이 물었다.

“기분 좋게 웃는군. 표창장이라도 기대하는 건가?”

“아니. 교수님도 참. 같은 반 친구가 다칠 뻔한 걸 운 좋게 도와줄 수 있었으니 당연히 기쁘죠.”

“흥, 운이라. 너란 놈은 정말···.”

아무튼 가 봐라. 한시혁이 훠이훠이 손을 내저었다.

* * *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은 벌써 거의 다 지나있었다. 나는 웃는 얼굴로 교무실의 문을 열어 복도로 나왔다.

<퀘스트 완료 : 불협화음을 해결하였습니다.>

<추가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평화주의자 : 1,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광속 해결 : 1,500 Credit을 획득합니다.>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알림창이었다. 복도에 나와 문득 고개를 내려다보니, 교무실 앞에 내가 아는 두 사람이 무릎 꿇은 채 손 들고 있었다. 아마 내가 범인을 붙잡고 면담실에서 자백을 시키는 동안 같이 여기 끌려온 것 같았다.

하긴, 아무리 한적한 건물 뒤편이라 해도 사람들 다니는 곳에서 마력을 펑펑 터뜨리며 싸우고 있으면 이런 결과가 되는 게 당연했다. 나는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유매와 가만히 손 들고 있는 차대엽에게 승리의 브이사인을 내밀었다.

“작전 성공. 대원의 희생은 잊지 않겠소.”

“···지금 깨달았는데, 넌 성격이 좀 얄미운 편인가?”

“그런 경향이 있긴 해. 쟤넨 아마 자퇴할 듯?”

내가 차대엽과 수다를 떨자, 유매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너. 누구 마음대로 참견하는 거야.”

“내가 참견 안 했으면 너 지금 피투성이 됐거든?”

나는 곧바로 반박했다. 유매는 욱한 얼굴로 뭐라 쏘아붙이려 했지만, 내 말은 사실이었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자기 구해준 사람한테 누가 도와달라 부탁이나 했어? 하고 배은망덕한 소리를 하진 못하는 것이다.

대신에 유매는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야. 기억해두겠어.”

“송한솔이야. 넌 유매지? 알고 있어. 이미 통성명한 기념으로 악수라도 하고 싶은데 손 들고 있어서 못하겠네.”

편 손바닥을 휙휙 흔들어주자, 유매는 짜증나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벌 서고 있고 뭐고 일어나서 저걸 확 죽여? 하는 눈빛이 따가웠다. 하지만 아무리 유매라도 교무실 앞에서 마력으로 공격하는 미친 짓은 못 했다. 이내 차대엽이 말했다.

“난 차대엽이다.”

“그렇댄다.”

“알아.”

유매는 심호흡을 하며 성질을 죽였다. 반대로 나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 문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한 발 먼저 교실에 돌아갔다.

* * *

그 뒤로 유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일은 없었다.

딱히 말을 걸지도 않았고, 그냥 평범하게 지냈다. 다만 몇 가지 변화는 있었다. 어떻게 안 건지 화분을 맞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몇몇 애들이 유매에게 가서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짐 싸고 퇴소한 범인에 대한 욕은 덤이었다.

유매는 그런 걱정들을 무뚝뚝하게 상관없잖아. 라는 한 마디로 잘라냈지만, 최소한 대화가 성립되는 화제가 있기 때문인지 같은 반 애들은 이전보다 유매를 훨씬 덜 무서워했다. 차대엽 또한 한 번 더 대련해보고 싶다며 관심을 표했다.

단련실 기구보다 순발력 훈련하기 좋아. 그게 차대엽이 유매랑 몇 분 투닥거린 뒤 내린 총평이었다.

“잘 됐네 잘 됐어.”

나는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땡땡이치고 복도를 걸었다.

이번 교시에 있는 수업은 자그마치 ‘마력 조작 기초’였다. 뭐 무술 강의 같은 건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니 듣는 척이라도 하겠는데, 내가 마력 조작하는 요령을 배워서 어디다 쓰겠는가. 거기 앉아있는 건 완전한 시간 낭비였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복도 구석의 문 손잡이를 잡았다.

<마인드맵 확장 : 투시 Lv.1>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2>

눈이 녹색으로 빛난다. 잠겨있는 문의 열쇠구멍을 노려보며 정신을 집중한다. 다른 놈들이 교실에서 마력 조작 훈련을 하는 동안, 나는 염력을 섬세하게 다루는 훈련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손잡이 안에서 철컥이는 소리가 들렸다.

“자, 자물쇠 따기 마술.”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단한 보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상용 문고리라면 최소한도로 짜낸 염동력을 열쇠구멍 안에 흘려보내 회전판을 돌리면 간단하게 열린다.

안에 들어간 나는 끄응 기지개를 폈다. 이곳은 캠퍼스 가운데에 떡하니 세워진 중앙도서관과 달리, 기사육성과 학과 건물 2층에 딸려있는 자그마한 도서실이었다.

기사육성과 학생들은 머리보다는 몸을 쓰는, 이른바 예체능 계열이었기에 이곳은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책장의 책들은 제대로 정리되어있지 않고 낡고 헤진 것들 투성이였다.

도서실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꽂힌 책들 또한 대대로 세한의 학생들이 자기 책을 기증한답시고 필요 없는 것들을 아무렇게나 버려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이곳엔 아무도 관심이 없고 들어오지도 않기에 비밀기지로 쓰기 딱이었다. 그것도 2학년이 되기 전까지지만.

등을 돌려 다시 도서실 문을 닫아 잠그려하자, 누군가의 구두가 문지방 위를 밟고 끼어들었다. 고개를 드니 앞에 서있는 건 같은 반 학생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유매였다. 나를 미행한 건가? 나는 얼떨떨해하며 뒤로 물러났다.

유매가 수업을 땡땡이 친 것에 대해 놀라진 않았다.

‘평소라면 옥상 죽순이인데.’

원래 유매는 마력 조작 수업을 전부 제끼는 편이었다. 이유는 나와 정반대였다. 조작할 마력 자체가 없는 나와 달리, 유매는 교수보다 마력 조작을 더 잘했다. 당연히 자기보다 못한 하수의 수업을 앉아서 듣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도서실에 들어온 유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좋은 곳을 독점하고 있었네.”

“뭐야. 여긴 왜 따라왔어.”

나는 일단 도서실 문을 닫아 잠궜다. 일단은 무단으로 쓰고 있는 상황이기에 남에게 들키면 곤란했다. 사실 들킨다고 해도 처음부터 열려 있었다 얼버무리면 될 뿐이지만.

“부탁이 있어서.”

“부탁?”

나는 깜짝 놀라서 질문했다. 얘가 남한테, 그것도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부탁이란 걸 하다니. 듣는 내 귀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나는 한 번 말해보라 눈짓했다. 그러자 마음대로 제일 좋은 소파에 앉은 유매가 입을 열었다.

“내 위에 떨어지던 화분을 받아줬을 때. 내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조용히 마력을 움직였었지. 평범한 방법으론 그렇게 안 돼. 그거,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줄 수 있어?”

아~ 나는 입을 벌리며 납득했다. 아무래도 내 염동력의 인상이 꽤 깊게 박힌 모양이었다. 그 비결을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나도 참 가르쳐줄 수만 있으면 그러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남한테 가르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못 알려줘.”

“요령만 몇 마디 말해줘도 돼. 난 천재니까.”

“아니, 못 알려주는 건 못 알려주는···.”

“받아봐.”

내가 거절하려고 하자, 유매가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벗어 내 손에 건넸다. 펜던트를 열어보자, 안에는 누군가의 사진이 꽂혀있었다.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새하얀 머리의 여자. 다름 아닌 유설이었다. 유매가 앞에서 이를 갈았다.

“꼭 박살내고 싶은 인간이 있어.”

그리고 눈앞에 알림창이 띠링, 떠올랐다.

<아이템 퀘스트 : 유매의 펜던트>

<유매가 사진 속 대상에게 승리하게 만드시오.>

<보상 : 마인드맵 확장 – 블링크>

‘새로운 초능력?’

당장 일어나서 환호하고 싶은 건수였다. 하지만.

나는 품 안의 편지봉투를 만졌다. 유설의 편지.

유설의 편지는 화해 유도, 유매의 펜던트는 완전한 적대. 서로 모순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 퀘스트였다. 게임의 선택지처럼 어느 한 쪽만을 고를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나에겐 능력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언제든 벌 수 있는 크레딧이랑 비교하면 초능력 개방 쪽이 더욱 가치 있는 보상이었다.

2학기의 마지막 행사인 학년 대항전. 강하긴 하지만 아직 미숙한 부분이 있던 유매는 유설에게 패배당하고, 자매 사이의 관계는 더욱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그것에 초조해하던 유설은 결국 동생에게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기게 된다.

‘씁쓸한 일이야.’

하지만 내가 도와줘서 유매가 이번 학기에 유설을 쓰러뜨릴 수 있게 성장시킨다면? 응어리가 좀 풀릴지도 몰랐다. 가르쳐주는 조건으로 유설을 이긴 뒤 편지를 읽어달라 할 수도 있었다. 시나리오 뚫을 때 유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초능력도 얻고 크레딧도 벌고 버스도 타고 일석 삼조다.

‘역시 천재.’

고민을 끝낸 나는 유매를 바라보고 말했다.

“네가 이 사람 이길 수만 있으면 되는 거지?”

“뭐? ······그래. 확실히 이길 수만 있으면 돼.”

눈썹을 찌푸리던 유매가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유설에게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유매가 더 강한데 약점을 찔려서 패배했던 것일 뿐이니까. 나는 도서실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도와줄게. 내일부터 점심이랑 이 수업 때마다 여기로 와.”

그렇게, 예정에도 없던 유매와의 과외가 시작되었다.

< 유매 (3)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