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예린 (2) >
“그래. 이기고서 튀는 건 도리가 아니지.”
솔직히 말해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있던 송한솔은 너무나 간단히 금예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금예린은 이미 반쯤 이겼다 생각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자신 있으신가 보네요?”
“너보다야 있지.”
떠본 말에 곧바로 반격이 돌아왔다. 벌써부터 시작된 신경전. 예상대로 저 남자는 승부를 걸면 언제든 받아주는 성격이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절대 지고는 못 사는 인간. 겁 먹었냐고 살짝 도발해주기만 해도 사지에 머리를 들이미는.
“저번이랑 똑같지는 않을 텐데요.”
“이번엔 개평 안 떼준다?”
웃으며 말한 송한솔에게 금예린 또한 마주 웃어주었다. 언뜻 친절해보이는 미소 뒤에서 서로가 서로를 바보 취급하고 있다. 방심한 상대의 뒤통수를 쳐서 완전히 벗겨 먹을 생각 만만이었다. 먼저 호된 꼴을 당해본 것은 금예린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그때는 자신답지 않게 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내기에 발을 걸쳐서 그랬을 뿐, 원래 금예린은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면 하지 않는 주의였다. 저런 기분파하고는 함정을 판 경험의 자릿수가 다르다.
“너는 이거 돌려받고 싶다는 거지?”
송한솔이 교복 안주머니에서 살짝 목걸이를 꺼냈다.
금예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수업 첫날 남자에게 어이없게 빼앗긴 저 보물이야말로, 당주로서 반드시 돌려받아야 할 물건이었다. 대단한 주물이라거나, 엄청나게 귀하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이 금가의 물건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쪽은 뭐 걸 건데?”
송한솔의 말에 금예린이 부채로 입술을 눌렀다. 저울 한쪽에 여우구슬이 매달려있다면, 이쪽도 같은 가치의 물건을 올려놓아야 균형이 맞는다. 아무리 저 남자가 승부에 너그럽다 해도 형평성이 맞지 않으면 내기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거라면 대충 맞겠죠?”
금예린은 자신의 손목에 걸린 홍옥 팔찌를 툭툭 두드렸다. 딱히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여우구슬을 빼앗긴 자기소개 시간에, 송한솔은 이미 이 팔찌에 눈독을 들였었다. 이게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송한솔이 당황한 티를 냈다.
“아니, 진짜로? 그냥 적당한 거 줘도 되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금예린이 부채를 탁 접어 쥐었다. 여우구슬을 건 시점에서 이 정도 물건이 아니면 응해줄 생각도 없었던 주제에. 너무 뺏긴 좀 그렇다며 시치미를 떼는 게 얄미웠다. 하지만 저 오만한 표정이 일그러질 미래를 상상하니 조금 즐겁기도 했다.
“뭐, 그거 걸어주면 나야 땡큐긴 한데.”
송한솔은 어깨를 으쓱이며 앞머리를 만졌다. 그리고 금예린의 손목에 걸려있는 붉은 팔찌를 힐끔 쳐다보았다.
여우구슬과 같은 금가의 가보 중 하나, 홍원령주.
주인에게 오는 어쭙잖은 저주는 자신이 대신 먹어치우고, 성장하면 자신의 배를 불려준 이들에게 가서 농축된 저주를 곱절로 돌려주고 오는 태아의 원령이 깃든 팔찌였다.
진짜 죽은 태아의 귀신이라기보단, 그 저주의 동력으로 만든 유사 의식체를 팔찌에 새겨진 술식으로 고정시켜둔 초 고등 주술과 식령술의 결집체였다. 아무튼 차고 있는 것만으로 웬만한 저주 계통은 죄다 역으로 돌려줄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저주를 다 먹어치운 원령이 저주의 주인에게 돌려주러 갔을 때엔 팔찌 안이 텅 비어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는 것. 하지만 어차피 보조적인 주물이었기에 약점이라 하기에도 뭐했다. 금예린은 한 순간 주저를 느꼈다.
···과연 정말 이것까지 내기에 걸어도 되는 걸까.
금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전부 필요한 과정이다. 큰 판돈을 걸었다고 평상심을 잃는 건 담력의 부족일 뿐이었다. 여우구슬을 돌려받기 포기한다는 건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
그렇다. 이기면 된다. 이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서야 한다 판단한 국면에선 최대한의 것을 걸어서 크게 이득을 봐야 했다. 그것의 금가의 당주로서 해야 마땅한 처세였다.
금예린은 교수가 나누어준 종이에 쓰여있는 내용을 읽어보았다. 다시 읽어보아도 확실하다. 특수 마물 ‘대못 수확자’의 처리 방법에 대해서. 이 사례는 학회 저널을 살펴보며 읽어보았다. 가장 효율적이라 밝혀진 해법 또한 기억하고 있다.
‘분명 검귀 하나에 보조 한 명, 회복계 둘.’
기억하는 그대로 브리핑을 써내면 만점을 받을 것이 확실하다. 혹시 논문에서 본 걸 그대로 적어서 냈다고 교수님이 감점을 주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정보를 수집하고 남의 의견을 듣는 것도 역량.’
차우진 교수가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친구의 답안을 그대로 베껴도 된다고까지 말한 상황이다. 이 케이스에 대해 미리 알았다면 칭찬을 하면 했지 그것에 대해 걸고 넘어질 일은 없다. 금예린은 송한솔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이겨도 재미없게 돌려받기만 하고 끝내지는 않을 테니까. 무승부론 성에 안 차잖아요?”
오만하기까지 한 도발이었다. 금예린은 친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미 내기는 성립됐고, 무승부로 하자고 해도 절대 물러주지 않을 것이다. 송한솔이 고개를 끄덕여 승낙한 시점에서 여우구슬을 돌려받는 건 거의 확정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1승 1패. 금예린이 처음으로 만난 나름대로의 호적수. 저 남자에게는 잠자던 여우의 꼬리를 밟아, 자신을 진심으로 만들어버린 책임이 있다. 경의를 표하며 최대한의 굴욕을 맛보여줘야 성에 찼다.
“그래 그래, 컨닝하지 말고 가서 네 거 써.”
벌써 종이에 뭔가를 적기 시작한 송한솔이 저리 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일단 승부처에 들어가면 상대의 사정이 어찌 되었든 절대 봐주지 않는다는 태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에 무릎 꿇릴 가치가 있다. 금예린 또한 자리에 돌아갔다.
장장 2교시가 소모된 몇 시간의 작업 끝에, 금예린은 겨우 자신의 답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심호흡을 한 그녀가 다시 처음부터 원고를 읽어보았다. 빈틈없이 전개되는 논리에, 다른 조합과의 비교도 짚고 들어가는 회심의 답안지였다.
일어난 금예린이 힐끗 숙적을 쳐다보았다. 송한솔은 한참 전에 자기 답안을 다 쓰고 자리에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저 남자 또한 정보력은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모양이고, 머리 또한 비상해보이니 필시 훌륭한 답안을 써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미리 모범답안 자체를 알고 있었다.
‘컨닝이라서 미안하네요.’
송한솔이 알면 비겁하다고 멱살을 쥘지도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 조용히 자리에 돌아와 앉은 금예린은 다음 시간에 있을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이내 답안지들을 들고 앉은 차우진이 한 명씩 이름을 호명했다. 피드백은 가나다 순서대로 전해주기에 금예린은 거의 맨 앞이라 할 수 있었다. 이내 금예린의 차례가 다가와, 휙휙 넘기며 페이지를 읽던 차우진 교수가 휘파람을 불었다.
“금예린, 백점이다. 미리 대못 수확자에 대해 분석해뒀었나 보지? 이 정도면 실전에서도 지휘를 맡기기 충분해.”
금예린이 꽉 주먹을 쥐며 입가를 부르르 떨었다.
백점. 예상대로의 결과였는데도 짜릿한 흥분이 몰려왔다. 당장 일어나 송한솔한테 그 여우구슬 이리 내라고 다그치고 싶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품위가 떨어지는 짓이었다. 빨리 수업이 끝나야 저 남자를 웃으며 조롱할 수 있을 텐데.
다음으로 넘어간 차우진은 학생들이 써낸 브리핑들을 하나하나 짚어주며 피드백했지만, 한 명도 백점은커녕 90점대도 나오지 않았다. 이내 송한솔이 낸 답안지의 차례가 되었다.
“뭐야 이거.”
선글라스를 벗은 차우진이 눈썹을 찌푸렸다.
* * *
특수 마물이라는 것은 그 격과 별개로 치명적인 변수를 초래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닌 마물을 뜻하는 말이었다.
정확한 대응을 하면 아주 약한 기사들이라도 쉽게 잡을 가능성이 있지만, 엉뚱한 방식으로 공격했다간 일류 기사단이 전멸할 수도 있는 기묘한 특성. 대표적으로 일정 이상의 물리적인 충격을 받으면 자폭하는 맹염구슬 부류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상당히 꺼림칙한 편이라 여겨지는 게 바로 대못 수확자였다. 온 몸이 밀짚으로 이루어진 섬뜩한 형태의 마물. 특징은 마력을 이용한 공격이든 물리적인 타격이든 가리지 않고 극소량의 피해밖에 입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몸이 밀짚으로 되어있기에 그 아주 약한 타격으로도 계속 치다 보면 죽는다. 하지만 때릴 때마다 공격자의 몸 안에서 검은 대못이 피부를 뚫고 솟아오른다는 점이 문제였다. 방어를 완전히 무시하는 주술적인 공격이다.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튀어나온 대못에 피투성이가 되어 공격한 쪽이 만신창이가 된다. 그렇다고 그냥 놔두면 마력을 모아, 모든 적에게 대못을 솟아나게 하는 저주를 완성한다.
이 까다로운 마물을 상대로 어쭙잖게 공격자들로만 이루어진 특공 진형을 짜면 단숨에 전멸하기 십상이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효율적인 공략 방법은, 재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공격수 한 명을 두고 다른 모두가 그를 보조하는 유지력 특화 진형이었다. 어차피 큰 타격을 주는 건 불가능하니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회복에 전념하는 것이다.
확실히 그게 최선이고 모범 답안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학생의 글을 읽으며 차우진은 흥미롭게 턱을 쓰다듬었다.
‘아예 공격 자체를 포기하는 전략?’
책만 읽은 교수들이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일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한기전의 교수진은 모두가 일류의 기사인 동시에 현역이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라고 생각했던 방법에 목숨을 구한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학생은 구체화시킨 수치로 온갖 것들을 비유해 표현하고 있었다. 상당히 참신한 접근 방법이었다. 학생이 낸 답안지의 서론에는 밀짚으로 이루어진 대못 수확자는 결코 무적 같은 게 아니라는 분석이 적혀있었다.
모든 타격이 전부 1씩만 들어가기에 언뜻 무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마법 방어력과 물리 방어력이 모두 1만 즈음인 것일 뿐. 9천의 공격을 열 번 때려박아도 끄떡없지만, 1만을 넘는 타격을 한 번만 때려박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주장.
‘무슨 컴퓨터 게임이라도 하고 온 것 같군.’
하지만 실제로 대못 수확자와 마주해보며 위화감을 느껴온 차우진은, 그 모두가 분명한 사실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1만의 방어를 뚫을 수 있는 일격을 준비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게 포진의 설명이다.
‘주술사 3, 산군 1의 진형.’
산군, 즉 호랑이 혼혈의 혈통능력인 포효는 마력을 담아 고함치는 것으로 상대방의 자세를 흐트러뜨린다. 괴물같이 단련된 산군 혼혈은 포효만으로 철판을 찌그러뜨리기도 했다.
범의 울음은 저주를 쫓는다는 말이 있다.
그 말대로 산군 혼혈의 포효는, 진행되고 있는 주문이나 술식의 구성 따위를 순간적으로 깨뜨려버릴 수 있었다. 그것으로 앞에 선 산군이 저주의 완성 저지만을 목표로 계속해 포효하고, 뒤에서 주술사들은 부패의 주술을 계속 건다.
자기 스스로 저주에 의해 동작하고 있는 밀짚 인형에게 저주에 대한 내성은 당연히 없다. 마법적인 방비를 깎아내는 주술을 계속해서 겹쳐 걸면, 언젠가는 마법 방어력이 0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공격이 통하게 된 밀짚을 일격에 정리한다.
‘아귀에 맞아.’
답안지의 내용은 마치 이미 해봤다는 듯 확신에 차있었다. 그리고 차우진의 직감 또한 아마 이 전략은 통할 거라 느끼고 있었다. 이게 실제로 통용된다면, 그 껄끄럽던 밀짚이 산군 하나를 데려가는 것만으로 허수아비가 되어버린다.
학생 답안 수준이 아니라, 아예 기사학회 저널에 실릴 만한 접근이었다. 알맞은 곳에 판다면 떼돈을 벌 수 있는 정보였다. 차우진은 조심스레 제출자의 이름을 확인해보았다.
“송한솔.”
그렇구만. 다시 선글라스를 쓴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 한시혁이 올해 최고일 거라 단언했던 녀석의 이름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이제야 좀 납득이 갔다. 이름을 불린 송한솔에게 차우진이 손가락으로 휙 삿대질하며 말했다.
“너는··· 너는 이백점이다.”
그리고 맨 앞에 앉아있는 금예린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 금예린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