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예린 (3) >
차우진은 송한솔의 분석을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는 금예린의 답안지와 같이 놓고 아예 비교 분석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공격수의 강인함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칠판에 송한솔의 도식을 슥슥 그려가며 설명한 차우진이 손바닥으로 칠판을 쾅 쳤다. 선글라스를 쓴 교수는 호들갑을 떤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흥분에 차있는 어조였다.
“이해하겠나? 이런 걸 창조적인 접근이라 하는 거야. 간단한 데다 피해도 적어. 이런 공략법이 하나 발견될 때마다 기사단의 인적 자원 손실은 크게 줄어든다. 어떤 의미론 저 학생이 지금 수십 명의 목숨을 구해준 거나 마찬가지야.”
사실 필기시험을 치고 들어온 분석과라면 모를까, 이제 막 입학한 기사육성과 학생들은 교수가 설명한 내용의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전술의 유효성을 증명하기 위해 1학년 수준에 맞지 않는 전문용어들을 마구 남발해댔기 때문이다.
결국 반 아이들 대부분은 차석은 공부 잘해서 차석인가 보다, 하는 정도의 인상밖에 받지 못했다. 지금 송한솔의 답안이 어떤 영역의 고찰인지 진정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둥지 전략에 대해 고도의 이해를 지니고 있는 몇 명 뿐이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금예린이었다.
‘수준이 달라···.’
부채를 꽉 쥔 손이 조용히 떨렸다. 원래대로라면 억지로라도 무승부를 주장할 생각이었다. 이 시험의 만점은 어디까지나 100점이기에, 교수가 뭐라고 칭찬했든 우리는 똑같은 만점일 뿐이라고. 그 생각이 정면에서 흙발로 짓밟혔다.
아무리 철면피라도 둘이 같은 수준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을 만큼, 저 답안지의 수준은 금예린이 논문을 적당히 베낀 쓰레기를 아득하게 웃돌고 있었다. 여기서 패배에 불복했다간, 당주로서 지닌 최저한의 긍지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원래대로라면 충분한 실전을 겪지 않으면 이런 디테일을 잡아낼 수 없다, 하고 너희들한테 가르쳐줘야 하는 건데. 실전 안 겪은 놈이 떡하니 써내니까 뭐라 말할 수가 없네.”
저 차우진이 첫대면에서 바로 인정하고 있었다. 교수로서 학생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는 훈훈한 시선이 아니었다. 한 명의 기사로서 미래의 동료에게 기대하는 눈이다. 그에 비하면 만점 받고 좋아하던 자신은 얼마나 한심한지.
‘뭐가 당주라는 건가요···.’
언제 어느 때고 품위 있는 존댓말로 자신의 속내까지 교정하며 금가에 걸맞은 당주가 되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억지로 따라하려 드는 가짜가 아닌, 진짜 천재가 앞에 있었다.
그것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이렇게나 눈이 뜨거워진다. 결국 너는 누구나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인 시시한 인간이라 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금예린은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창피한 얼굴이 되는 것을 참아냈다.
금예린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언가가 흘러넘쳐 떨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으니,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뭐하냐?”
고개를 들자, 송한솔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수는 성큼성큼 이쪽에 다가왔다.
“차대엽이. 오랜만이네?”
“···저번 회합 때 보고 처음인가요.”
차우진은 내 옆에 앉아있는 차대엽과 인사를 나눴다. 같은 검귀의 명가 출신으로서 이미 면식이 있는 거겠지. 여기선 친척끼리 이야기하라고 하고 나는 빠져주는 게 맞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차우진이 내 어깨를 잡고 다시 앉혔다.
“어허, 어딜 가려고?”
“화장실 가려는데요.”
“안 돼. 너랑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차우진이 씨익 웃었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답안이 좋으면 그냥 잘 썼다 칭찬해주고 말면 될 것을, 왜 굳이 금예린 답안을 옆에 두고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공개처형 비슷한 짓을 한단 말인가.
슬쩍 옆쪽을 보니 자리에 앉은 금예린은 완전히 멘탈이 나가 엎드려있었다. 이러면 팔찌 받기 좀 찜찜한데. 물론 그렇다고 홍원령주 같은 보물을 안 뺏을 생각은 없었지만.
“근데 이거 정말로 네가 쓴··· 아니, 이건 실례군. 못 들은 걸로 해줘. 아무튼 대체 어떻게 생각한 거야? 그 자리에서 나올 발상이 아닌데. 미리 분석이라도 하고 있었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우진이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확실히 이런 점에선 과묵한 한시혁 교수가 훨씬 나았다.
“저기 교수님. 다음 수업 준비 안 하세요?”
“응? 걱정 붙들어 매, 오늘은 끝이야. 다른 특수 마물 대처법도 분석한 게 있어? 혹시 늪지문어의 공략법도···.”
지금 그쪽이랑 얘기하기 싫다고. 옆에서 썩어가는 내 표정을 보고 있던 차대엽이 일어나 용무가 있다며 차우진을 어딘가로 끌고 갔다. 아주 고마운 도움이었다. 저 눈치 밥 말아먹은 수석 놈도 눈치챈 걸 차우진 교수는 왜 모르는 걸까.
겨우 혼자가 된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 금예린의 자리에 가서,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잠깐 뒤 이쪽을 올려다본 금예린의 얼굴은 다행히 꽤 멀쩡했다.
“아, 이제야 눈치챘네. 일부러 져준 거지?”
나는 시치미 뚝 떼고서 말했다.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는 금예린은 이 남자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진지한 얼굴로 헛소리를 하고 있자니 상당히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의 금예린에게 팔찌 내놔라 독촉하는 건 내 담력으론 도저히 불가능했다. 쓰레기처럼 보이는 것 이전에, 금예린이 나한테 원한이라도 품으면 매일 밤 무서워서 잠도 못 잔다. 그래도 팔찌는 갖고 싶으니 받아내야 한다.
“그때 내가 준 쪽지가 신경 쓰여서, ‘정보료’로 넘겨준 거잖아? 응? 아니었어? 설마 나 혼자 착각한 건가?”
일부러 손짓까지 하며 과장해서 말했다. 그래도 당주라고, 금예린은 단숨에 상황을 파악해 책상 위의 부채를 집어들었다. 허세일 뿐이지만 일단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실 억지로 멱살 쥐고 울상 그만두라 협박한 것에 가까웠다.
“다, 당연하죠. 눈치채셨나 보네요. 그게 아니면 홍원령주 같은 금가의 보물을 홀라당 걸어버릴 리가 없잖아요?”
“아, 역시 그랬나. 나도 이상하다 생각했어.”
“그러면 들려주실까요, 쪽지의 그게 무슨 뜻인지.”
금예린이 애써 강한 척하며 손목에서 팔찌를 빼 나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빵 터지려는 걸 겨우 참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홍원령주를 교복 안주머니에 챙겼다.
* * *
방과후 가게에 두 사람이 모였다. 접선 장소로 채택된 건 캠퍼스 주변 역에서 몇 정거장 옆의 고급 한식집이었다.
급사가 문을 닫자, 금예린이 여러 가지 결계를 추가로 쳤다. 누구도 안의 상황을 도청할 수 없게 하기보단, 도청할 시 반드시 이쪽도 알아챌 수 있게 하는 데 중점을 둔 결계 구성이었다. 두 사람이 커다란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기다리게 해드렸네요. 사실 이런 짓 하지 않아도, 보안 하나는 알아주는 곳이니까 문제 없을 거예요. 원래는 예약하기도 힘든 곳이지만. 사안이 사안이니 이름 좀 썼죠..”
송한솔이 코웃음을 쳤다. 은근슬쩍 자기 가문 대단하다고 과시하는 게 적당히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혹시 하루 종일 죽상이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상태의 회복이 빨랐다. 아니면 가문의 중요한 문제니 억지로라도 회복한 것일지도.
“그래서, 2장로, 3장로, 7장로님이 배신했다는 이야기. 확실한 근거는 있는 거겠죠? 감히 금가 내부를 거론하다니. 분열을 일으키려는 수작이라면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위협하는 목소리는 허세가 아니었다. 만일 시답잖은 농담을 지껄인다면 그것만으로 송한솔은 금가의 적이다.
송한솔은 볼을 긁적였다. 말로는 팔찌 값이라고 하지만, 어차피 금예린에게 알려줘야 할 정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금예린이 대단히 의심 많은 성격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무렇게나 말하면 오히려 이쪽의 뒤를 캐거나 적대할 수도 있었다.
내가 가문 내부 사정을 알고 있는 걸 어떻게 해야 납득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입꼬리를 찡그리던 한솔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그냥 전부 다 까버리기로. 금예린은 신중한 성격이니 미리 뭘 안다고 해서 위험한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별 거 아니야. 그 인간들, 요호를 섬기기로 했거든.”
아홉 꼬리를 흔들며 온갖 재앙을 몰고 다니는 요괴 여우. 적어도 이 시점에선 존재 자체가 드러나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녀에 비하면 둥지의 마물 따윈 아무래도 좋은 잔챙이다.
금가는 더욱 강한 가문이 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모토인 가문이었고, 그 중에서도 금예린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세 장로는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해버렸다.
금가 안의 균열을 눈치챈 요호는 불만을 가진 장로들 앞에 나타나 일이 잘 되면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겠다 유혹했고,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건 다 개뻥이었다. 그것이 진짜 동료로 삼고 싶어하는 건 금예린 하나밖에 없었다.
‘황국관 사건.’
2학년 2학기가 끝나고 금예린이 본가에 돌아가면, 금가의 가솔들이 전부 강시로 변해있다. 온몸에 부적이 둘둘 둘려있는 채 걸어오는 괴물들이 금예린을 덮친다. 그 시점에서 금예린은 반쯤 정신이 나갔지만, 동료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한다.
결국 금예린 혼자 살아남아 금가는 멸망한다.
3학년으로 진학하게 될 때부터 혈통시대의 분위기가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가까스로 생존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금예린에겐 여우구슬도 홍원령주도 없다. 자력으로 그 사건을 헤쳐나가긴 힘들 것이다. 이 정도 케어는 해줘야겠지. 애초에 금가의 몰락을 방치하면 나한테는 손해밖에 없었다.
“요호··· 라고요?”
“그래. 요호 매구. 요호 말고도 몇 놈 있어, 여기저기 세상 개판내려고 숨어있는 녀석들. 마물이 귀엽게 보일 정도지.”
금예린은 이미 송한솔의 이야기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의문은 오히려 부풀어오른 채였다.
요호. 아직은 결코 이야기의 겉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금가 당주에게만 전해내려오는 전승에 언급만 되어있는 전설적 존재. 그것의 이름을 같은 반 친구가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다. 마치 예전부터 그것을 쫓아왔다는 것처럼.
송한솔이 머리 아프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걔네 다 죽여버려야 되는 사정이 있어서.”
금예린은 확신했다.
오늘 보여준 백전연마의 기사 같은 통찰력도 그렇고. 지금 한 이야기도 그렇고. 눈앞의 남자는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힘을 숨기고 있는 진짜배기 괴물이라고.
< 금예린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