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21화 (21/113)

< 금예린 (4) >

<요호를 쫓고 있는 청년이라···.>

“짚이는 점이 있으신 건가요?”

방과후의 회합 뒤. 금예린은 자신의 방에서 1장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몸의 혈연으로 따지면 금예린의 할아버지 되는 자이자, 당주가 부재할 때 금가를 통솔하는 지위에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있다면야 있지요. 이런 큰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그 치들은 평소부터 예린님에게 불만이 많았으니.>

장로의 말에 금예린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정말 미움받고 있었다는 확언을 들으니 마음 한구석이 잘려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배신한 세 장로들이 정말 요호라는 전설적인 존재와 내통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금가 내부의 분란을 넘어 멸문이라는 가능성까지 생각해봐야 할 사안이었다. 금예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 당장 돌아가는 건 악수겠지요?”

<예. 아직은 조심스러운 검증이 필요할 때니까요. 만일 확신을 얻었다고 해도, 이쪽이 알아차렸다는 단서를 주고 싶지는 않군요. 멀리 계신 예린님은 초조하실 수도 있겠지만···.>

장로의 대답에 금예린은 양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 사람과도 더 이야기를 하고 싶고요.”

<하기야 그렇겠습니다. 이 늙은이 정도나 돼야 겨우 꼬리 끝을 본 적이 있는 그 재앙을 퇴치하려 하다니···. 아마도 어린 나이에 상상할 수 없는 수라장을 건너왔겠지요.>

금예린도 같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강하기만 한 장기말들은 여기저기 얼마든지 널려있다. 하지만 그녀가 송한솔을 마주하며 느낀 건 끝을 모르겠는 견식이었다.

금가의 비보인 여우구슬과 홍원령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물론, 1장로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해야 할 자신의 네 번째 결계까지 곧바로 꿰뚫어보았다. 게다가 바로 오늘 수업에서 보여준 대(對) 마물전의 익숙함과 경악스러운 판단력.

“···부족함을 느껴요. 아주 많이.”

<그건 경사군요. 기뻐하십시오, 예린님.>

금예린이 짜낸 약한 말에 장로가 껄껄 웃어제꼈다.

<자신이 부진하다 느끼지 못하면 제대로 수학하는 게 아니지요. 요호의 건도 그렇고, 그 청년 분은 금가의 은인으로 대접하기에 부족함이 없군요. 이번 일이 다 정리되면 날을 잡아 본가의 귀빈을 모실 자리를 만들어야겠습니다.>

“하지만 대가가 너무 컸어요.”

<그 또한 경험의 하나입니다, 예린님.>

자책하는 목소리에 장로가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대로 내려온 가보 따위가 어쨌다는 말인가. 그 덕에 금가의 곪아있는 환부가 밝혀졌고, 그만한 역량을 지닌 젊은이와 연을 맺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린 당주는 더 성장할 것이다.

“경험이라뇨. 그런 말로 넘어갈 게 아니예요. 3대 기보가 두 가지나 남의 손에 들어갔다고요? 아무도 그런 건 허락하지 않았는데! 당주 실격이예요. 아니, 저는 애초에 금가의─”

<예린님은 무언가 착각하고 계시군요.>

전화기 너머의 장로가 금예린의 말을 끊었다. 방금까지의 온화한 목소리와 달리, 자식을 훈계하듯 엄하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잠깐동안 침묵하던 장로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예린님이 저희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이 당주다운 것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예린님은 태어났을 때부터 당주니까요. 금가는 당신의 일개 도구이고, 예린님이 하는 모든 행동이 당주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금예린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있었다. 조금 우쭐해있기까지 했었다.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당주를 연기하며. 금가 모두의 기대쯤이야 즐겁게 짊어져 보이겠다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결국 자신이 당주가 되어서 다행이었다 웃을 수 있게 만들어주겠다 생각했다. 꿈은 일주일도 안 되어 깨졌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으로 나가자 옆에 있는 건 괴물들 투성이였고, 괜히 자존심을 부리다 가문의 보물까지 잃어버렸다. 자신은 해봐야 천재를 흉내내는 모범생일 뿐이었다.

그런 금예린의 실책을, 장로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3대 기보라고요? 금가의 보물창고 전부를 길에다 던져버려도 저희는 기꺼이 박수를 칠 겁니다. 예린님이 태어날 때, 금가의 모두는 그런 선택에 동의한거예요.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예린님이 예린님답게 있는 것뿐입니다.>

“저답게···.”

그것은 따끔하게 혼이 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금예린의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그렇다. 이건 계약이다. 금가의 사람들이 금예린이라는 당주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면, 자신은 적어도 언제나 금예린으로서, 금예린답게 있어야만 한다.

온갖 것들이 저무는 가을, 몇 겹이고 쌓인 꽃들의 시체 위에서도 활짝 웃으며 피어나는 국화와도 같이. 자신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잠시 눈을 감은 금예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래요. 그러면 맡기겠어요, 1장로. 당주의 명입니다. 제가 돌아가기 전에 ‘청소’는 확실하게 끝내놓으세요.”

<노구가 당주의 명을 받듭니다.>

전화를 끊은 건 서로 동시였다. 금예린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마음속의 안개는 걷혔다. 금예린은 문을 열고 단련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표면상의 1등 따위에는 의미가 없다고. 남에게 자신의 수를 밝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금가의 당주로서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걸 방금 깨달았다. 속내에서도 존대를 하며, 자기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는 버릇 또한 그만두었다.

‘1등을 하겠어.’

이기고 싶으니까 이긴다. 지고 싶지 않으니까 전력을 다한다. 가슴 속에 남아있는 패배감을 씻어내고 나면, 자신은 분명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한꺼풀 벗어던진 주인의 성장에, 금예린의 주변을 돌고 있는 결계가 맥동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뒤에서 한 발 빠져, 결코 전력을 다하지 않는 성격. 금예린의 성장을 멈추고 있던 브레이크가 방금 부서졌다.

* * *

나는 찬바람을 맞으며 운동장을 뛰었다. 이제 슬슬 아침 구보에서도 적당히 열외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염동력이 보조해주는 덕분이긴 한데.’

그 말대로 나는 최대한 몸을 가볍게 움직이기 위해 온몸의 움직임과 연동해 염동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뒤에서 누가 내 등을 떠밀어주고 있는 것이다. 염동력의 활용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이자 중요한 사용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꼼수를 써도 겨우 열외되지 않게 맨 뒤에서 따라붙는 게 고작이었다. 순수한 체력 문제였던 전과 달리, 쓰면 쓸수록 염동력을 더 잘 활용할 수 있게 되니 아침 구보를 뛰는 보람은 있었지만. 그리고 누군가 옆에 다가왔다.

“역시 연기였군요.”

“헉, 하으, 뭐?”

고개를 돌리니 금예린이 일부러 뒤로 빠져 내 옆을 가볍게 뛰고 있었다. 금예린 쪽은 아직 숨이 차는 기색도 없었다.

“어제는 반도 안 와서 토하는 척을 하더니. 하루만에 사람 체력이 이렇게 달라질 리가 없잖아요? 아무래도 당신은 남을 속이는 데엔 그다지 재능이 없는 것 같네요.”

체육복을 입은 금예린이 연기 쪽에 있어선 자신이 위라는 듯 후후 웃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옆에서 같이 뛰어주니 동기 부여도 되고 참 좋았다. 숨을 헐떡이는 내게 가증스럽단 눈길을 보내며 금예린이 말했다.

“요호의 목을 치고 싶다고 했죠?”

“······.”

“당신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금가는 전적으로 협력해드리겠어요. 다른 이들의 의향 같은 건 물을 필요 없어요. 제가 바로 금가의 총의를 대표하는 자이니.”

옆에서 뛰는 금예린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아주 든든한 동맹 선언이었다. 든든한 건 든든한 건데, 그런 걸 왜 하필 지금 말하는 걸까. 적어도 뛰느라 헥헥대는 사람 앞에서 말할 내용은 아니었다. 내게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은혜를 갚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예요. 저희 사이에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거래였으니까. 그게 무엇이든 금가를 넘보려 했다면 우리들에게도 적. 서로가 서로에게 얻을 건 얻으며, 동등한 협력 관계에서 앞으로도 잘 해나가보죠.”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살짝 물어뜯은 그녀가, 옆에서 내 손목을 잡고 엄지에서 새어나온 피를 적원령주에 살짝 묻혔다. 그러자 팔찌에서 은은한 빛이 나며 탁한 색이었던 표면이 맑은 선홍색으로 변했다. 내가 멀뚱히 금예린을 쳐다봤다.

“홍원령주는 위험한 물건이라 나름대로 안전장치가 있거든요. 원령에 대한 제 소유권을 포기했어요. 원래 넘겨주기 전에 해드려야 할 절차였는데, 경황이 없어 못 했었네요.”

그러고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웃더니 다시 앞으로 달려간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금예린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저건 분명히 잠금 해제는 별도라며 한 번 더 내기하자고 하려던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 포기한 걸까.

교복으로 갈아입고 교실에 돌아오니, 어제는 없었던 알림창이 나타났다. 나는 실눈을 뜨고 내용을 읽어보았다.

<아이템 퀘스트 : 원령 감화>

<해당 아이템에는 사념이 겹쳐져 만들어진 유사 정신체가 깃들어있다. 부의 정신 에너지 대신, 순수한 염력을 계속해서 주입하여 당신의 정신과 감응할 수 있게 만드시오.>

<보상 : 녹염령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그도 그럴 게 보상에 있는 저것은, 바로 그 희귀하다는 진화 아이템이었다. 혈통시대를 하면서 저런 이름은 구경해본 적도 없었다. 금가의 가보가 설마 진화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니.

나는 눈을 감고 팔찌에 손을 댄 채 집중했다.

<마인드맵 확장 : 텔레파시 Lv.1>

<유사 정신체와 교감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머릿속에 어떠한 목소리가 울렸다.

< 금예린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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