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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22화 (22/113)

< 차대엽 (1) >

머릿속에 형태가 되지 않은 목소리가 울렸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머리가 아팠다. 음성은 말이라기보단 아기의 웅얼거림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텔레파시는 애초에 언어의 벽을 넘기 위한 수단. 머릿속의 음성이 지금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밥 줘>

붉은 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팔찌가 부르르 떨렸다. 염동력을 발동하는 요령으로 염력을 팔찌 쪽에 집어넣자, 나와 연결되어있는 무언가가 게걸스레 염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또다시 머릿속에 울린 음성이 이번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맛 없어 맛 없어>

“이 자식이.”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작은 동물과 교감하고 있는 감각이었다. 이내 아이템 퀘스트에 추가적인 내용이 나타났다.

<당신의 염력은 너무나 무미건조하다. 텔레파시를 이용해 주변 사람의 강한 감정에 감응하면, 당신과 연결된 염령은 먹어치운 그것을 비료로 하여 더욱 성장할 것이다.>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다시 말해 맛없는 사료만 퍼주지 말고 가끔 특식을 좀 먹여줘야 애가 제대로 자란다는 뜻이었다. 배가 불렀지 아주. 팔찌를 벗어다 쓰레기통에 박아놓고 기강을 좀 다져줄까 하다, 나는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귀한 몸이시니.’

사용자가 신경쓸 필요 없이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아이템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내 염력과 연동된다는 점이 또 마음에 들었다. 대부분이 마력 전용 아이템인 혈통시대에 이 퀘스트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 같았다.

나는 옆에 앉은 차대엽을 팔꿈치로 툭툭 쳐보았다.

“왜?”

“잠깐 화 좀 내줄 수 있냐?”

“···갑자기 화를?”

차대엽이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기야 멀쩡히 앉아있던 애한테 화를 내보라고 해봤자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게 당연했다. 억지로 화내는 척만 해봐야 격렬한 감정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테고. 나는 생각에 잠겨 턱을 매만졌다.

그렇다고 차대엽의 역린을 건드리면 진짜로 화나서 나를 쥐어팰 테니 절대 안 된다. 화난 차대엽한테 한 대라도 얻어맞으면 연약한 나는 진짜 죽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아이템이 밥 달라 한다고 친구랑 척을 지는 건 정신병에 가까웠다.

“뭐, 기회가 있겠지.”

나는 쩝 입맛을 다시고 계속 손목의 팔찌에 염력을 넣어줬다. 맛 없다 맛 없다 해도 팔찌 안의 원령은 주는 대로 잘 먹었다. 아이 착해. 이내 누군가가 내 자리 옆에 걸어왔다.

“이야기는 들었다, 한솔.”

“응?”

다가온 것은 머리를 질끈 묶고 있는 진소란이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기뻐보이는 얼굴로 나한테 말을 걸었다.

“저번에 폭력사건을 일으키려 한 녀석들. 네가 저지하고 교무실에 넘긴 거라던데. 다른 친구들은 수업을 땡땡이친다 양아치 같다 뭐라 하지만,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역시 올바른 학생이다. 진소란이 혼자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딱히 숨겨야 하는 일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누구한테 들었는지 출처가 궁금했다. 한시혁이 학생한테 필요 없는 말을 조잘댈 성격도 아니고.

유매의 경우엔 그런 기특한 말을 해주기는커녕 다른 학생한테 자기 쪽에서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 되고. 나는 자연스럽게 내 짝꿍이자 유일한 목격자인 놈을 돌아보았다.

“물어보길래.”

“그래···.”

차대엽은 너무나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도장에서 같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진소란이 혹시 네가 한 일이냐 물어보길래 진짜 공로자는 따로 있다고, 자신의 친구가 사건을 미리 알고 막은 일과 그 정황을 세세하게 알려주었단 것이다.

진소란은 출생과 가정사정의 특수함 탓에 거의 병적으로 질서를 추종하는 성향이었다. 한 마디로 천성이 경찰관이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한 일은 칭찬받아 마땅하게 보이겠지.

“다른 애들한테도 당당히 말하는 게 어떤가. 너를 꽤 무서워하는 눈치던데. 사실 다들 너와 친해지고 싶어할 거다.”

“아니. 자랑할 일 아니야.”

그야 착한 일 하나 하면 더 박수치고 칭찬하라며 호들갑을 떨고 싶은 게 내 성격이긴 한데, 이번 건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건 거래일 뿐이었다. 나는 크레딧을 위해 범인에게 개입했고, 유매는 다치지 않는 대신 복수의 기회를 잃었다.

살짝 불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양쪽 다 납득했고, 그걸로 이 일은 끝이다. 그러자 진소란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렇군. 자신이 올바른 일을 행했다는 확신이 마음속에 있다면, 그걸 굳이 남에게 자랑할 필요는 없지.”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는 진소란을 설득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할 때마다 눈동자가 더욱 빛나는 것이 설득하려 들면 역효과만 날 게 뻔했다. 그리고 그런 세 사람 사이에 한 명이 또각또각 걸어왔다. 기척을 눈치챈 진소란이 휙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와 달리 엄청나게 날카로운 눈빛이 앞에 서있는 금예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확연한 적대였다.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지.”

“당신 보러온 거 아니니 비켜줄래요?”

부채를 펴고 있는 금예린이 눈웃음을 지은 그대로 대답했다. 이쪽도 그에 못지 않게 진소란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야 뭐든지 룰에 따라 하는 것이 원칙인 진소란과, 룰을 따르는 것 자체가 한 발짝 뒤쳐지는 거라 생각하는 금예린은 근본부터 성격이 안 맞았다. 진소란은 오히려 잘 됐다는 듯 한 걸음 걸어 금예린 앞을 똑바로 막아선 채 쏘아붙였다.

“1학년용 결계 조율실을 아무도 못 들어가게 막아놨더군. 다음 달까지 혼자서만 쓰겠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 말에 나는 살짝 놀랐다. 원래 금예린은 단련실 같은 곳에 안 나가는데.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혹시 나한테 보물들 뺏겨서 이제 템빨로 못 이긴다고 부리나케 훈련을 시작한 건가. 그러자 금예린이 비웃듯 부채를 탁 접었다.

“문제가 있을까요? 훌륭한 시설은 실력 있는 인간이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게 이치에 맞죠. 저는 내기를 걸어 승리한 쪽이 결계실을 사용하자고 했고, 이겨서 빼앗았을 뿐.”

“말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면 다른 결계술사 아이들은 이번 달 내내 훈련을 하지 말라는 뜻인가?”

진소란의 항의에 금예린이 차갑게 웃었다.

“그렇게 되겠죠. ‘진 사람이 잘못’이예요. 서로가 합의한 뒤 결과에 승복한다. 이 이상 공정한 게 어디 있나요?”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야기를 들으니 전말은 이러했다. 금예린은 단련실에서 결계를 고치고 있는 애들 앞에 떡하니 찾아와서, 방해되니 나가라고 시비를 걸었다. 금예린은 자신의 결계를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하는 아이들에게 금예린은 특유의 화술로 자존심을 건드리며 도발해 반쯤 억지로 내기를 걸었고, 안에 있던 일곱 사람과 7대 1로 대결해 무릎꿇렸다. 그리고 1학년의 결계술사들은 다같이 한 달간 결계실 출입금지.

즉, 지금 그곳은 금예린 혼자 쓰는 공간이 되었다.

‘좀 악질이긴 하네.’

애초에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결계 자체에 간섭하는 결계인 장화를 지닌 금예린에게 같은 결계술사끼리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 진소란의 입장에선 애초에 학생들끼리의 대결부터가 금지된 일이니 내기는 당연히 무효였고.

“단련실은 학생들이 다같이 이용하기 위한 시설이다. 자기 힘이 세다 해서 사적으로 독점하는 건 용인할 수 없어.”

“지금 결계실은 제 영토예요. 패배한 이들이 그렇게나 불쌍하다면, 당신이 힘으로 불공정하게 뺏어보든지요.”

진소란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금예린을 쳐다보았다. 금예린 또한, 그 살기등등한 눈빛을 철면피에 가까운 웃음으로 받아넘긴 뒤 한 번 더 도발까지 얹어주었다. 진소란의 허리와 어깨춤에 접혀있던 날개가 뻣뻣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못할 것 같나.”

“어머, 해보려고요?”

그에 대응하듯 금예린의 등 뒤에도 붉은 결계가 떠올랐다. 일촉즉발의 상황임에도 차대엽은 옆에 앉아 팔짱 끼고 보고만 있었다. 어느 쪽 주장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으니 끼어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천적이다. 원래대로라면 금예린과 진소란은 서로를 강렬히 의식하지만 학기중 말 한 마디 안 걸 정도로 혐오하는 사이여야 할 텐데, 지금은 말싸움을 하며 부딪힐 만큼은 접점이 생겼으니 긍정적인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흐뭇한 건 학우님들의 관계 진전에 축하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교실에 휘몰아치고 있는 두 개의 적의. 주변 애들이 겁먹은 걸 보니 마력까지 휘몰아치고 있는 듯 하다. 나는 아무도 몰래 그 사이에 빨대를 꽂았다.

<마인드맵 확장 : 텔레파시 Lv.1>

이 이상 없을 강렬한 감정에 텔레파시로 감응하자, 나와 연결되어있는 팔찌가 부르르 떨며 반응을 보였다. 머릿속에 몰아치는 음성인지 뭔지도 모를 작은 의지가 이렇게 말했다.

<맛있다!>

나는 흐뭇하게 팔찌가 빛나는 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살벌하게 계속되던 두 사람의 대치는 아침 조례를 하러 온 한시혁이 한 번씩 꿀밤을 쥐어박는 것으로 끝났다.

당연히 학생들끼리의 내기로 단련실을 독점하는 건 교수가 허락하지 않았고, 다른 결계술사 학생들과도 오후 7시부터 10시 사이는 금예린이 양보하는 것으로 조율이 되었다. 그녀로서도 이 정도면 납득 가능한 선에서의 합의일 것이다.

방과후의 캠퍼스. 나는 차대엽과 둘이 남아 복도에 서있었다. 1학년이 아니라 2학년이 쓰는 건물이었다. 차대엽은 정말로 해도 되냐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차대엽은 아무렇지 않게 잠긴 문을 발로 차 찌그러뜨렸다.

안쪽은 평범한 원예부실이었다. 세한기전의 원예부는 마법적인 조치가 들어간 식물 또한 기르고 있었기에,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 바가 아니다. 나는 천천히 바닥에 손바닥을 짚고 눈을 감아 집중했다. 이제부터 중요한 작업이었다.

<마인드맵 확장 : 사이코메트리 Lv.1>

휘리릭 되감기는 필름. 일어선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맨 구석, 아무 것도 심어져있지 않은 커다란 화분을 들었다. 손가락으로 거칠게 흙을 헤집고 안의 씨앗을 꺼낸다. 씨앗은 씨앗인 채로 꿈틀꿈틀 움직이며 기묘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설마 진짜였다니.”

“진짜라니까?”

반신반의하고 있던 차대엽이 눈썹을 꿈틀댔다.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마물의 씨앗이었다. 취급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따위가 아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마물의 사육이나 재배는 금지된다. 뭘 어떻게 조련하려고 해도, 놈들은 무조건적으로 마물이 아닌 다른 생명을 죽이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 떡하니 마물의 씨앗이 숨겨져있다. 게임에선 2학기가 돼서야 선도부원 견습이 된 진소란과 함께 해결하는 사건이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걸 미룰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슬쩍 옆에 서있는 차대엽을 돌아보았다.

지금 차대엽은 엄청나게 화가 난 얼굴이었다. 솔직히 쫄았다. 이런 녀석이 옆에 있으면 솔직히 두려울 게 없었다.

띠링, 하고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시나리오 퀘스트 : 1. 마물의 씨앗>

<있으면 안 될 물건을 발견했다. 해당 물건을 교내에 반입한 인물과, 관련 조직의 정체를 완전히 밝혀내시오.>

<최종 보상 : 10,000 크레딧, 시스템 접근 권한 Lv.2>

“와우.”

손가락으로 마물의 씨앗을 꽉 쥐어 터뜨린 나는, 휘파람을 불며 앞으로 있을 싸움을 생각했다.

< 차대엽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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