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민우 (3) >
모의전을 진행할 여덟 명의 면면이 앞에 모였다.
“일단 여기서 제비 하나씩 뽑아줄래?”
상자를 품에 들고 온 건 우리 반 반장으로 뽑힌 주하리였다. 목덜미에서 질끈 묶은 주황색 머리에 커다란 사슴 뿔이 나있다. 같은 반 놈들 사이에서 은근한 비웃음이 흘렀다.
‘호구 납셨다는 거지.’
세한에선 누구나 반장을 만만하게 대했다. 자기 강해지기도 급급한데 남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범생이 취급이었다.
한 자리 순위 변동 때문에 피 튀기는 싸움을 하는 이 학교에서 반장 일 따위로 가산점을 줄 리도 없고, 지금처럼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고생하는 순수한 봉사활동이었다. 시간을 단련에 갈아넣기도 바쁜 세한의 학생들은 당연히 기피한다.
결국 남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을 법한 열등생에게 네가 뒤치다꺼리를 하라 강요하는 분위기가 되고, 언제나 온화한 성격인 주하리 또한 반쯤 떠밀려서 반장이 된 경우였다.
솔직히 나로선 같은 반의 툭 건드렸다간 터져버릴 것 같은 위험물들 사이에 주하리처럼 그냥 선량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존재만으로도 참 고마웠다. 나는 반장에게 꾸벅 인사하고 제비를 뽑았다. 뽑은 제비에 쓰여있는 번호는 7번이었다.
“다른 제비를 뽑았으면 대진이 안 맞은 걸 어쩌라고, 하면서 우기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싸울 수밖에 없나.”
뒤에서 내 제비를 슬쩍 본 녀석이 말했다. 나는 휙 고개를 돌아보았다. 창백한 얼굴이 보인다. 눈가의 진한 다크서클과, 곱슬기가 있는 적갈색의 머리. 등에는 작은 박쥐 날개가 달려있다. 자세빈의 소꿉친구 중 하나인 박쥐 혼혈, 담민우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세빈의 패거리를 할로윈 삼총사라 부르고 있다. 그야 흡혈귀에 늑대인간에 악마니까. 호박이랑 미이라만 추가되면 완벽한데. 나는 몸을 돌려 그와 마주보았다.
“뭐야. 네가 8번?”
담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얼굴이나 이름은 알지만 정식으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와 담민우는 대기자용 좌석까지 걸어가 앉아 아래 있는 대련장을 바라보았다.
“우리 왕자 놈이 폐를 많이 끼치네. 입학하기 전만 해도 차대엽 차대엽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는 안중에도 없나봐.”
“한 번 처맞으면 다시 차대엽 차대엽 노래 부를걸?”
“걔 실력 본 적 있어? 많이 붙어다니는 것 같던데.”
“어. 내가 다섯 명쯤 있어도 절대 못 이겨.”
다섯 명 있어도 못 이긴다 하면서 여섯이나 일곱 있으면 이길 수 있다는 듯 허세를 떨긴 했는데, 사실 열 명 있어도 못 이긴다. 싸움 방법 이전에 공격력의 문제였다. 나는 진심을 낸 차대엽에게 상처를 입힐 방법 자체를 모르겠다.
시합을 기다리며 나와 담민우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너희 둘이 요 며칠 여기저기 쏘다니는 동안 같은 반 애들끼리 단합대회를 했었다느니. 단련실에서 어제 누구랑 누구랑 시비가 붙어 다같이 싸움구경을 했다느니 하는 얘기였다.
“왜 나는 안 불렀냐? 섭섭하네.”
“수업 끝나고 반장이 부르려고 했는데 너네가 쏜살같이 나갔다던데. 무슨 경찰 출동이라도 하는 줄 알았대.”
“비슷한 거 하긴 했지.”
나는 뺨을 긁적였다. 생각지 않게 지금 나와 차대엽은 완전히 교실에서 겉도는 아웃사이더 취급이었다. 그쪽 면에서는 유매라는 독보적 1인자가 있으니 좀 안심이 되긴 하는데.
“반장만 고생이네. 그런 모임도 다 주도해야 되고.”
“애들 모으면 개인 단련 시간 뺏는다고 욕 먹고, 안 모으면 반장은 뭐 하냐고 욕 먹고. 답답할 것 같긴 해. 그래도 성격이 좋아서 다른 애들도 적당히 협력해주는 눈치더라.”
그런데 같이 모여서 하루만 놀자고 애들한테 말 걸던 걸 쌩까고 튄 사람이 여기 앉아있었다. 살짝 마음에 찔리네.
“그 반장 저기 나오네.”
담민우가 손가락으로 대련장을 가리켰다. 1번 제비를 뽑은 반장과, 2번 제비를 뽑은 남자 녀석이 대련장 양쪽 입구에서 나오고 있었다. 모의전이라고는 해도, 학기가 시작되고 이곳에서 처음 치뤄지는 대련이라서인지 위에 앉아있는 같은 반 녀석들도 집중하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수업에서 모의전을 치르려 지원한 사람은 여덟 명 뿐이었다. 사실 순위에 반영되지도 않는 모의전에서 자기 실력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야 나도 모르는 버릇이나 약점이 다른 적들에게 분석당할 수 있으니까.
교수들은 그렇게 약점을 찔리는 것 또한 개선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니 모의전에서 팍팍 실력을 내라 하지만, 아무래도 학생들에게 중요한 건 당장 다음 순위전의 승패였다.
그러니 지금 대기자 좌석에 앉아있는 놈들은 당장 실전을 통한 전술 검토가 급한 상황이거나, 남이 분석하든 말든 상관없을 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는 당연히 전자였다. 담민우의 경우엔 아마도 후자 쪽일 테고.
<양측 자리에. 시간 관계상 경기는 5분씩 2라운드.>
스피커에서 한시혁의 목소리가 대련 전의 유의사항과 규칙 등을 안내했다. 삼지창을 들고 있는 반장은 방긋 웃으며 상대방에게 인사했고, 반장과 붙게 된 남자 놈은 이게 웬 떡이냐는 얼굴로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뛰쳐나갈 자세를 잡았다.
주하리는 자기 몸 안의 마력이 아니라 마도구를 이용해 싸우는 스타일이었다. 몸 안에 돌고 있는 마력이 극도로 적은 탓에, 그걸 커버해줄 수 있는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나와도 조금 비슷하지만, 주하리의 경우 온갖 마도구들을 귀신같이 잘 활용한다는 점에서 달랐다. 시작종이 땡, 울리자마자 상대 쪽의 남학생이 포효하며 달려나갔다. 주하리가 지닌 마력이 보잘 것 없다는 점은 이미 파악이 끝나있었다.
“오오···.”
옆에 앉은 담민우가 탄성을 흘렸다. 자신의 몸을 회전시키며, 주하리는 달려오는 남자를 삼지창 하나로 몇 번이고 흘려넘겼다. 마치 투우 쇼를 구경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가 난 남자는 아예 삼지창을 쳐내버리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칼날에 맞닿은 삼지창은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남자가 휘두르는 칼의 움직임에 맞춰 휙휙 움직이더니, 삼지창을 옆으로 휘두른 순간 따라온 검이 남자의 손에서 날아갔다.
“뭐야 저거. 마술이야?”
“마도구 효과인가?”
방금의 묘기를 이해한 인간은 극소수였다. 똑같은 짓을 할 수 있는 건 아마 차대엽 정도겠지. 저건 마도구의 능력 같은 게 아니라 순수한 무술이었다. 힘이 걸리는 방향 자체를 완벽하게 파악해 상대방을 뒤흔들다 단숨에 무기를 빼앗는다.
남자가 무기를 놓치게 만든 뒤에는 일방적인 공세였다. 주하리의 움직임은 결코 빠르지도 강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공격은 한 번도 주하리에게 닿지 않고, 주하리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반드시 무언가 의미 있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그렇게 10분 간의 일방적인 유린이 끝나고, 남은 것은 상처 하나 없는 주하리와 온몸이 잔상처 투성이인 남자였다.
“대단한걸.”
옆에 앉은 담민우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마력량도, 신체능력도 상대 쪽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압도한 것은 주하리였다. 그것을 가능케한 것은 마도구의 보조를 적재적소에 완벽하게 사용하는 수완과, 순수한 무기술의 숙련도다.
몸 안의 마력이 부족한 자가 괴물들을 따라잡기 위해 극한까지 짜낸 전투방식. 그 집착에선 일종의 아름다움까지 느껴졌다. 아마도 우리 반 전원이 마력을 아예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싸운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주하리일 것이다.
“생각 없이 돌진해서 망했네.”
“그러니까. 침착하게 했으면 그냥 이기는 싸움인데.”
그런 수군거림에 뭣도 모른다며 한숨을 쉬는 건 몇 명 정도였을까. 방금 있었던 일련의 싸움은 무식하게 돌진하다 침착한 대처에 제 발을 묶였다, 따위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선택지를 틀어막은 채 유도한 하나의 사냥이었다.
“그래도 저런 방식으론 한계가 있을 텐데.”
턱을 쓰다듬은 담민우가 말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저 무기술은 어떻게 봐도 학생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경이적인 수준이다. 분명 상당히 격차가 나는 상대도 수싸움으로 커버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의 얘기일 뿐이었다.
그냥 상당한 격차가 아니라 완전히 압도적인 격차라면,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일격에 불합리하게 박살난다. 아무튼 이곳은 혈통시대. 폭력적인 마력을 펑펑 터뜨려대며 싸우는 놈이 다른 놈들을 다 짓밟고 군림하는 곳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싸움은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두 번째 모의전은 진소란이 시작하자마자 돌진해 일격에 상대를 쓰러뜨렸고, 세 번째 모의전은 유매였다. 기권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상대에게 우리 모두 경의의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면 우리 차례네.”
“봐주면서 할 거지?”
“봐주지 말란 게 우리 왕자 놈 명령이라.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한 번 보고 싶거든. 꽁꽁 숨기고 있는 차석 님 실력을.”
씨익 웃으며 덧붙인 담민우가 저쪽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척 봐도 할 생각 만만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쁘진 않아.’
솔직히 말해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스스로 자세빈 부하 1 같은 역할을 자칭하고 있지만, 저 놈은 차대엽이나 유매 같은 톱클래스를 제외하면 세한기전의 1학년 중에 제일 강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 힘이 어디까지 통용되느냐.
대련장 앞에 서자, 기분 좋은 긴장이 흘렀다. 역시 혼자서 연습하는 것과 모르는 적이 앞에 서있는 건 전혀 달랐다.
‘아니. 모르는 적은 아닌가.’
몰랐으면 더욱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담민우의 능력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다.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 자신의 피를 마력으로 가공해 전투에 활용하는 조혈술과, 상대방의 신체적인 조건과 혈통능력을 일시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흡혈술.
특히 앞의 조혈술은 근거리, 중거리, 원거리를 다 커버하면서 전후좌우 전방위에서 공격, 그에 더해 방어까지 가능한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다시 말해 이 놈한테서 시간 내내 도망다닐 수 있으면, 다른 1학년생 애들이랑 싸워도 승산이 있다.
<양측 자리에서 준비.>
준비 신호와 함께, 담민우의 몸에 드라큘라를 연상시키는 검붉은 색의 일렁이는 망토가 덮어씌워졌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피의 망토다. 나 또한 언제든지 염동력으로 눈앞의 적을 요격할 수 있도록 정신을 가다듬고 집중했다.
마인드맵을 한 번 개척하고 나서, 염력 이외에도 정신 감응력이 크게 향상된 느낌이 든다. 지금처럼 전투로 긴장하고 있는 상태에선, 굳이 텔레파시를 쓰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의식이 그 자리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땡, 하고 시작종이 울렸고.
<마인드맵 확장 : 초감각 Lv.3>
나는 순간적으로 옆으로 피했다. 바닥에서 튀어나온 건 새빨간 피의 말뚝이었다. 공중에서 날아온 또 하나의 말뚝을, 눈으로 보기도 전에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피했다. 나는 지금 절호조의 컨디션이라는 걸 느끼며, 나도 모르게 웃었다.
“역시 평상시랑 실전이랑은 다르네.”
나는 한 번 더 쏴봐, 하고 손가락을 까닥였고. 역시 이렇게 쉽게는 안 되나···. 하고 머리를 긁적이는 담민우에게.
“맞출 때까지 몇 발이고 쏴줘라!”
관중석에서 벌떡 일어난 자세빈이 소리쳤다.
< 담민우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