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29화 (29/113)

< 진소란 (1) >

“자넨 녹차가 좋나? 아니면 커피?”

“아, 커피 쪽을···.”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난 학장이 익숙한 몸짓으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학장실 소파에 앉은 한시혁은 손깍지를 꼈다. 저 작은 체구와 그에 어울리지 않게 갈무리된 대해를 연상시키는 마력은 몇 번을 독대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학장이 마실 것을 준비하는 동안, 한시혁은 오늘 대련 수업에서 진행됐던 모의전의 내용을 보고했다. 들어둬야 할 사항은 딱딱한 서류보다 교수의 입으로 생생하게 전달받고 싶다는 게 저 괴짜 학장님이 고수하고 계신 방침이었다.

당연히 단순히 모의전의 결과만을 보고하러 온 것은 아니다. 한시혁도 학장도 고작 그런 걸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학장실에서 독대를 가질 만큼 시간이 넘쳐나진 않았다.

예를 들면 유매가 모의전에 입후보하자 진소란 또한 곧장 손을 들었다는 것. 아마 실기시험 때 압도당한 경험을 씻어내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대진이 엇갈렸을 때 바꿔달라 나설 만큼 적극적이진 않다. 사적인 감정을 우선하지 않는다.

“진소란은 규칙을 중요시하는 성격이니, 제비를 바꿔달라느니 하는 편법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그런가. 좀 더 유연함이 있어야 할 텐데.“

뜨거운 물을 쪼르르 따르는 학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한시혁이 학생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내린 결론들은 멘토의 배정이나 추가적인 지도 등에 영향을 끼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아도, 저 천 년 묵은 학장은 어떤 사소한 사항도 잊지 않고 자기 머릿속에 넣어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송한솔입니다만···.“

그러자 학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금부터는 한 단어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중하고 듣는 것이 이쪽까지 느껴져왔다. 사전합격자 출신 학생들은 언제나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학장이 송한솔에게 가지는 관심은 특별했다.

송한솔과 담민우의 일전은 시종일관 담민우가 압도했다. 딱히 자기 실력을 내지 않던 담민우가 보여준 역량은 지금까지의 평가를 몇 번이고 수정할 만큼 인상적이었지만, 결국 이긴 것은 가까스로 피하며 도망치기만 하던 송한솔이었다.

“아마 흡혈에 대한 대책을 세운 거겠지요.”

“그런 게 있나?”

“자기 피에 뭔가를 섞어 넣는다거나···. 아니, 이건 오히려 제 살 깎아먹기 밖에 안 되겠네요. 저로서는 당장 실전성 있는 방법이 떠오르진 않지만, 워낙 기발한 녀석이니.”

사실 흡혈에 대응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발동할 상황 자체를 주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직접 남의 피부를 찢고 혈액을 착취해야 하는 능력이기에, 검귀 같은 혼혈이 방어에만 치중하면 원거리에서 발동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코앞에서 검을 나누는 와중에 흡혈을 써서 자기 무기를 몸에 거두는 건 자살행위였다. 결국 조금만 신경쓰면 쓸 기회 자체가 없도록 봉인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송한솔은 담민우에게 기어이 그 흡혈을 쓰게 만들었다.

‘회피 일변도 또한 미끼일 뿐이었겠지.’

한시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부터 상대방을 잡기 위한 덫을 준비하고, 싸움의 모든 과정은 거기까지 적을 끌어들이기 위함일 뿐. 자신과 닮아있는 영악함이었다. 이렇게 끝난 뒤에 보면 시합이라기보단 전술 테스트나 마찬가지였다.

“꽤 번거로운 방법으로 싸우는군.”

“능력에 의지하고 싶지 않은 거겠죠. 차대엽이 능력 없이 순수한 검술로 어디까지 싸울 수 있나 시험해보고 있는 것처럼, 송한솔은 순수한 잔머리로 싸우고 있는 겁니다.”

한시혁은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손에 큰 힘이 있다고 그걸 마음껏 휘두르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놓치는 게 생겨버린다. 강한 능력을 쉽게 얻은 기사일수록 싸움의 궁리도 기술의 완성도도 떨어지는 경향이 있단 걸 한시혁은 잘 알고 있었다.

진짜 일류가 되고 싶다면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쥐어짠 뒤, 더 나오는 게 없나 한 번 더 쥐어짜봐야 했다. 이내 학장이 앉아있는 한시혁에게 마실 것을 내왔다. 찻잔 안에 담긴 건 양쪽 모두 진한 색의 녹차였다.

“음. 저는 커피가 좋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한시혁의 말에 학장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자네는 가엾게도 아직 자신의 진짜 취향을 모르는 거지. 이제부터 천천히 차의 맛을 알아가게나.”

이 사람이 정말. 상사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한시혁은 콧숨을 쉬며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집어들었다. 몇 번 홀짝이고 역시 영 취향이 아니라 그냥 놔두려고 했지만, 학장은 더 제대로 음미해보라며 말없이 웃으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경험상 그냥 빠르게 들이키면 성의가 없다고 혼날 것이다. 한숨을 쉰 한시혁은 학장이 만족하도록 제대로 자세를 잡고 천천히 찻잔을 비웠다. 결국 한시혁이 마지막 한 모금까지 음미하고 나서야 학장이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주었다.

“그래서 자네는 그 아이의 능력이 뭐라고 생각하지?”

“아마 ‘숨기는 특성’일 겁니다.”

송한솔은 최대한 감추려는 생각이었겠지만, 한시혁은 장님이 아니었다. 담민우의 말뚝을 쳐낼 때 그가 발한 능력은 어떤 마력의 전조도 자취도 남지 않는 무형무색의 공격이었다.

단순히 마력을 잘 갈무리한다 해서 해낼 수 있는 묘기가 아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특수한 체질을 타고나지 않는 이상 말이 안 되는 영역이었다. 아마 혈통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송한솔의 외형도 지닌 능력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학장 또한 한시혁이 낸 결론에 납득했다. 그 가설이라면 송한솔이 현자의 눈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었던 것도 아귀가 맞는다. 생각대로 예외적인 능력의 보유자인 것이다.

“옆에서 보면서도 미리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말뚝들이 튕겨나간 뒤에야 공격을 했다는 걸 알았어요. 아무래도 출력 자체는 대단하지 않은 모양이지만···그 녀석처럼 영리한 데다 똥배짱까지 있는 놈이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젭니다.”

한시력은 송한솔의 능력에 ‘완전투명’이란 가칭을 붙여두었다. 공격하기 직전까지 누구도 알 수 없고, 마력의 흔적 또한 남지 않는다. 그 무엇보다 암살에 특화되어있는 능력이다. 송한솔이라면 악용할 방법쯤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겠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우리가 언제는 감당할 수 있어서 가르쳤나?”

한시혁의 말에 천년서생이 피식 웃었다. 애초에 졸업할 때엔 웬만한 교수들보다 강해진 괴물을 몇 명이고 배출해낸 곳이 이곳 세한기전이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이 학교가 세워진 이유라고 말해도 좋았다. 학장이 한시혁을 격려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 아이는 자네 걱정처럼 나쁜 길로 빠져들 만큼 멍청하지도, 비겁하지도 않은 모양이니.”

그렇게 말하는 학장은 손가락 끝으로 식물의 씨앗이 찌부러진 듯한 유해물을 들고 있었다. 흥미롭다는 얼굴로 씨앗을 돌려보던 학장은 한시혁에게 이만 나가봐도 좋다고 지시했다. 쿵, 문이 닫히자 학장이 아무도 없는 곳에 대고 말했다.

“‘숨기는 특성’이라. 자네와 비슷한 능력인가 보군.”

그러자 학장실의 벽에서 색채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한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경찰관과 비슷한 모자를 쓰고, 검은 색 제복을 입고 있는 녹색 머리의 여자. 그녀야말로 천년서생의 눈이자, 세한기전을 뒤에서 지켜보는 경비원이었다.

석척, 즉 도마뱀 혼혈인 그녀는 환경과 거의 완벽하게 동화해 자신의 존재감을 지울 수 있었다. 사실은 아까 전부터 학장실 안에 있었지만, 경계하고 있지 않으면 저 한시혁조차 완전히 몸을 숨긴 그녀의 기척을 감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학장의 명령으로 학교 안에서 송한솔의 행적을 조심스레 뒤쫓고 있었다. 처음엔 단지 명령이기에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스스로의 의지로 송한솔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팬이 되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 교수의 걱정은 기우입니다. 그는 이 짧은 시간에 선도부 전체보다 더 많은 실적을 보였어요. 2학년의 문제아였던 배은호도 지금은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다니고 있죠.”

“오랜만인걸. 자네가 그렇게까지 남을 고평가하는 건.”

“그는 그만한 일을 해냈을 뿐입니다. 특히 마물의 씨앗 건은, 저조차 아직 눈치채지 못한 사안이었어요.”

언뜻 냉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엔 보물을 찾아낸 어린아이같은 흥분이 담겨있었다. 평소엔 거의 무감정에 가까운 그녀가 이렇게까지 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면 계속 지켜봐주게. 자네에게 말해봤자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이겠지만, 들키는 일은 없도록 하고.”

경비원인 그녀의 존재는 일반 학생들에게 비밀에 부쳐졌다. 모습을 드러내는 건 선도부원 앞에서 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챙이 달린 모자를 고쳐 쓰고, 다시금 주변과 동화해 사라졌다. 평소와는 달리 상당히 의욕적인 태도였다.

“···마음 같아선 역할을 바꾸고 싶군.”

쭉 기지개를 편 학장은 밀린 서류더미를 향해 걸어갔다.

* * *

나는 알림창을 띄워 퀘스트 보상을 받았다.

<퀘스트 완료 : 첫 대련을 완수하였습니다.>

<추가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노 미스 플레이 : 1,500 Credit을 획득합니다.>

<손 안 대고 코 풀기 : 1,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사소한 걸로는 별로 안 주네.’

나는 실망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욕심에 눈이 멀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제 와서 이 정도 크레딧으론 능력 하나 레벨 올리기도 벅찰 수준이었다. 결국 수업 같은 자잘한 게 아니라 사건을 딱 해결해서 시나리오를 땡겨오는 게 최고였다.

모의전을 통해 확실히 깨달은 건 지금 내 능력은 같은 학년의 상위권에게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리저리 도망치는 건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지금의 나로선 담민우 수준의 상대와 정면으로 맞붙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차대엽 같은 놈을 앞에 세워두고 나는 슬쩍 빠져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2학년이 되고서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지같은 사건들에 개입하려면 최대한 빨리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사실 방법은 이미 몇 개 생각해두긴 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유력한 것이 진소란을 선도부로 만드는 작전이었다. 원래 마물의 씨앗 사건으로 자연스레 선도부와 엮였어야 하는데, 내가 선수를 쳐서 사건이 아예 일어나지 않게 됐으니 최소한의 애프터 케어를 해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아는 선도부원 한 명이 있으면 나도 편했다. 이번 마물의 씨앗 반입은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전에 내가 몰래 해결해버린 거지만, 기본적으로 세한기전에서 선도부가 맡기로 한 안건에는 일반 학생이 개입할 수 없었다.

중대한 사안의 경우 선도부원들에게 현장 자체가 통제되어 안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될 때도 있었다. 사실 그럴 때 어거지로 밀어붙이기 위해 배은호 선배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부하들 깽판 치라 하고 난 몰래 들어가면 되니.’

하지만 그런 방법보다 그냥 아는 선도부원이 하나 있는 게 훨씬 편했다. 진소란을 선도부로 올려놓은 뒤, 선도부 관할 사건을 맡게 하고 협력자로 나를 지명하게 한다. 그러면 난 선도부에 소속되지 않고도 온갖 사건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들어가는 조건이 좀 까다롭긴 했지만 그건 내가 도와주면 되는 거고. 진소란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와 함께 사건들을 쭉쭉 해결해서 실적을 올리면 원래보다 훨씬 더 빨리 선도부 안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방과후 진소란의 책상 앞에 걸어갔다.

“한솔. 무슨 일이지?”

“너 선도부 활동 할 생각 있어?”

당연히 그렇다 대답하겠지. 진소란은 방과후 시간을 조금 더 보람차게, 학교 안의 질서에 기여하기 위해 쓰고 싶어할 테니. 혼자 단련할 때마다 이렇게 단련한 힘을 활용할 곳이 없는 자신에 대해 초조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군.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응?”

진소란이 노려보는 건 금발을 늘어뜨린 여학생의 뒤통수였다. 쫑긋대는 여우귀가 시선을 느꼈는지 눈웃음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부채를 편 금예린은 진소란을 보고 말했다.

“어머. 또 지고 싶어서요? 어제처럼.”

“네 술수는 모두 파악했다. 아무 것도 대응하지 못할 건 없어. 오늘이야말로 잘못했다고 빌게 해주지.”

“오늘도 단련실 앞에서 내내 무릎 꿇고 손 들고 있으려면 부끄러울 텐데. 그것도 목에 저는 패배자입니다 하는 팻말까지 걸고···. 푸흡, 세한기전 명물이라도 될 생각이예요?”

“명물이 되는 건 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진소란이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소리쳤다. 그러자 같은 반 애들이 수군대며 서로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차대엽도 내게 단련실 정문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건···치욕적인 모습이었다.

“저기···선도부.”

“이따가 말해라, 한솔!”

성큼성큼 걸어간 진소란이 금예린과 함께 교실을 나갔다. 나는 제지할 명분이 없어 멍하니 멀어져가는 둘을 쳐다보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뒷자리의 차대엽에게 말했다.

“너 혹시 선도부 관심 있냐?”

“아니.”

차대엽이 즉답했다. 나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 진소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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