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소란 (2) >
나는 단련실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진소란을 내려다보았다. 목에 걸고 있는 팻말엔 ‘저는 패배자입니다. PHOTO FREE’라고 큰 글자로 적혀있었다. 이를 악문 얼굴이 새빨갰다.
“또 졌냐?”
나는 핸드폰을 들어 브이자를 내밀고, 옆에 진소란이 나오도록 찰칵 사진을 찍었다. 진소란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벌칙이니 성실히 이행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사진을 확인했다.
“사이 좋네.”
“뭐가 좋다는 거냐! 원수지간이다!”
곧바로 큰 소리로 반박이 들어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소란은 실제로도 금예린과 대단히 사이가 나쁘다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럴 게 두 사람은 태생적인 부분에서 맞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학기 내내 말 한 마디안 하고 죽일 듯이 노려보기만 하던 원래의 관계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엄청 친해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뭐라뭐라 계속 반박하는 진소란을 보며 나는 팔찌에 감정을 먹여줬다.
‘슬슬 진화할 때 됐는데.’
마물의 씨앗을 보고 화를 내던 차대엽부터, 덜덜 떨며 엎드려있던 배은호 선배까지. 요 며칠간 나는 온갖 격렬한 감정들에 접했고 그것이 다 팔찌의 양분이 되었다. 염력도 팍팍 먹여줬는데 아직 홍원령주는 변화하지 않는 채였다.
“으으, 왜 이기지 못하는 거지···.”
손을 들고 있는 진소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속도도 파괴력도 이쪽이 우위인데 어째서 지는 건지 모르겠단 것이었다.
실제로 진소란의 스펙 자체는 세한기전의 1학년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했다. 정면에서 진소란을 압도할 수 있는 건 극상성인 유매 정도고, 차대엽도 금예린도 ‘비장의 수’를 꺼내지 않는 한 진소란의 속도에 주도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정직하니까.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상대방 외의 모든 것을 시야에서 지워버리고, 최단거리로 달려가 베어내는 것에만 집중한다. 좋게 말하면 잡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서야 상대가 뭘 꾸미고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보며 눈치챌 기회가 없다.
속전속결을 미학으로 삼는 진소란으로서는 준비시간 동안 마력의 갈무리를 끝내고, 개시 신호와 동시에 총알처럼 튀어나가 일격으로 끝내는 게 자기 강점을 살리는 방식이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타이밍을 재기가 너무나 쉽다. 금예린처럼 남을 속이고 뒤통수치는 데에 도가 튼 주술사가 아니라, 나같이 불쌍하고 순진한 약자도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모의전에서 통한 건 그냥 상대가 멍청이라 그런 거다.
이대로라면 백 번을 싸워도 백 번 질 것이다.
‘그냥 말해줄까?’
하지만 속도만을 추구하는 버릇을 교정하는 것엔 조심스러워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집착이 있기 때문에 진소란은 지금같이 압도적인 기동력을 손에 넣은 것이니. 약점을 고치겠다고 강점이 옅어지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었다.
나는 그냥 응급처치 식 대응법을 알려주었다. 어차피 대련에서 세 번째 결계 이상을 쓸 만큼 금예린이 바보도 아닐 테고, 평소의 금예린을 이기는 것에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네가 먼저 공격하지 마.”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진소란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그녀의 최대 강점은 눈에 비치지도 않을 정도의 순간 속도였다. 끊임없이 선공을 차지해, 상대가 대응할 수도 없는 맹공을 찔러넣는 게 진소란이 지니고 있는 승리 플랜이다.
그런 진소란에게 멈춰서 후공을 기다리라는 건 스스로 자기 무기를 포기하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금예린을 상대로 할 때는 그게 정답이었다. 심리전으로는 절대 그 여우를 이길 수 없으니, 아예 바보가 되는 것이다.
“공격은 저쪽에서 알아서 하라 냅두고, 너는 배 째라 기다리면서 죽어라 카운터만 노리라고.”
금예린의 본체가 부적을 직접 쏘아냈을 때. 그때 움직여도 충분하다. 상대보다 한 박자 늦게 공격해도 진소란의 칼은 제시간에 닿는다. 그만큼 진소란의 속도는 말이 안 됐다. 이것만 지켜도 진소란은 금예린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금예린이 세 번째 결계를 발동한다면 다르겠지만, 실전도 아닌데 그런 걸 쓸 만큼 금예린이 바보도 아니고.
“반격이라···. 참고하겠다.”
다행히 진소란은 적어도 한 번 시험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준 것 같았다. 슬슬 아홉 시가 다 되어, 무릎 꿇고 앉아있던 진소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목에 걸고 있던 팻말을 벗었다. 벌써 늦은 시간이라 휴게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와 진소란은 컵라면을 하나씩 가져와 뜨거운 물을 부었다. 면이 익는 동안 우린 잡다한 이야기를 했다. 사실 이야기를 하는 건 진소란 뿐이었고, 난 그냥 악담을 들어주었다.
“···바로 그때. 분명히 직선으로만 날아오는 걸 알고 있어서 확실히 이겼다 생각하고 달렸는데, 갑자기 휘어져 날아오는 게 아닌가! 아니 그럼 지금까지는 사람을 속이려고 일부러 똑바로만 쏘고 있었던 건가?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금예린이 할 만한 짓이네.”
진소란이 몇 분 동안 쏟아낸 건 매일매일 다른 방식으로 참신하게 뒤통수를 맞고 패배한 대련의 기록들이었다. 나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컵라면을 호로록 들이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사실 그렇게 주의깊게 듣고 있지는 않았다.
따로 신경쓰이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하이 에스퍼가 된 뒤로, 딱히 텔레파시를 발동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의식이 그곳에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방과후부터 쭉 나를 따라오고 있는 누군가의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인드맵 확장 : 텔레파시 Lv.3>
엄청 멀리서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뒤쪽 자리에 앉아서 나를 대놓고 관찰하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대충 견적이 나왔다. 진소란의 이야기에 잠깐씩 피식 웃으며 정신의 표면이 흔들리는 것까지 느껴졌다. 나는 슥 뒤돌아서 뒷자리를 보았다.
눈썹을 찌푸리면서 자세히 들여다본다. 거기 있다는 걸 알고서 봐도 내 눈엔 아무 것도 안 보였다. 그야 마력으로 속이는 환각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몸의 성질을 바꿔버리는 체질이었으므로, 내가 간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시 봐도 눈으로는 전혀 안 보인다. 나는 정신을 감지할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제 적어도 갑자기 등 뒤에서 칼에 찔릴 일은 없을 것이다. 갑자기 돌아서 뒷자리를 살펴보는 나를 보며 진소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지?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나?”
“너 진짜 선도부 들어갈 생각 없냐?”
“선도부?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야 있다만···.”
“그럼 괜찮겠네.”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4>
나는 누군가의 정신이 느껴지고 있는 지점에 염동력을 발동했다. 목을 쥐는 감각이 분명히 있었다. 그대로 휙 떨쳐내자, 아무 것도 없었던 공간에서 한 사람이 넘어지며 갑자기 나타났다. 경비원 모자와 제복을 입고 있는 여성이었다.
“무슨···!”
놀란 진소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보다 더욱 경악에 빠져있는 건 은신을 들킨 세한의 경비원 씨였다.
자격 있는 자 앞에서 일부러 모습을 드러낸 적은 있어도, 작정하고 숨어있는 경비원을 학생이 찾아낸 적은 없겠지. 그런 건 혈통시대의 시나리오에서도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느껴지는 미행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수고하십니다.”
나는 쓰러진 경비원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었다. 그녀는 실눈을 뜬 채로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겁니까?”
“당연히 처음부터죠.”
“처음이라니. 설마 ‘그때’ 눈치챈 건가요?”
“그렇죠. ‘그때’ 바로 알았죠.”
나는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허세를 부렸다.
녹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경비원이 눈을 끔뻑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돌발적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내 손을 잡고 일어서자, 경비원은 나와 비슷하거나 더 큰 장신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경비원이 고개를 숙였다.
“···소개가 늦었군요. 세한기사전문학교의 경비원이자, 선도부 외부 고문인 밤비라고 합니다. 학교의 기대와 개인적인 흥미로 당신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밤비가 경비원 모자를 벗어 가슴에 누르며 인사했다.
“친애를 담아 비이라 불러주시면 기쁠 겁니다.”
“네, 비이 씨. 지금까지 얘기도 다 듣고 있었죠? 선도부에 딱 맞는 인재라서 추천하고 싶은데. 이 친구 어때요.”
나는 옆에 앉은 진소란을 가리켰다. 선도부의 입단 조건은 크게 세 가지였다. 선도부장이 주관하는 공개 모집에서 합격하거나, 다른 부원 두 명의 추천을 받은 뒤 심사를 보거나, 세한기전의 경비원과 만나서 직통으로 들어오거나.
세 번째는 이른바 스카우트란 것으로, 이 경로로 가입한 선도부원들은 알게 모르게 엘리트 취급을 받았다. 지금은 좀 예외적인 상황이지만 세 번째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진소란의 가장 큰 결점은 몸을 숨기거나 속임수를 쓰는 상대에게 대처하기 어려워하는 점이었다. 그 부류의 전문가인 이 사람이라면 아마 나보다 훨씬 잘 가르쳐줄 수 있겠지. 원래 진소란을 차기 선도부장으로 키워준 사람은 그녀니까.
그리고 경비원이 곤란해하는 얼굴로 말을 흐렸다.
“저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입학하고서 한 일들은 전부 지켜봤으니까요. 당신 본인이 선도부에 들어오겠다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만, 실력도 증명되지 않은···.”
“진소란.”
나는 테이블 위 다 마신 콜라캔을 찌그러뜨려, 염동력으로 저 멀리까지 쳐날렸다. 사전에 신호를 주진 않았지만, 진소란은 날아간 원반을 본 개처럼 자리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쏜살같이 날아가던 깡통의 몸통에 푹 칼날이 박혔다.
“쓰레기를 던지다니. 뭐 하는 짓이지?”
그대로 내리쳐진 칼이 푹 찍은 깡통을 바닥에 눕힌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진소란은, 눈 깜빡할 사이 저 먼 곳에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달려나가있었다. 준비하고 있지 않아도 진소란은 반사적으로 이러한 가속이 가능했다.
“오~”
나는 박수를 짝짝짝 치며 진소란을 칭찬했다.
고개를 돌아보면, 실눈이었던 경비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소란을 보고 있었다.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있는 이형의 눈이 진소란의 모습을 훑는다. 방금의 움직임 하나로 진소란이 얼마나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한 거겠지.
어떤 문제가 일어나든 대응할 여지를 주지 않고 제압이 가능한 초신속. 세한의 경비원인 밤비는 배은호를 유린한 저 가속에 매료되어 진소란을 차기 선도부장으로 키우기 시작한다. 그러한 감상은 아마 지금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크게 뜬 눈을 다시 감은 경비원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정말, 곁에 있는 면면들도 특별하군요.”
“탐나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저 정도의 인재는 흔치 않으니. 그녀에게 가입할 의사가 있다면 제 쪽에서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제일 탐나는 건 당신입니다만.”
“어디 가입해서 활동하기엔 좀 바빠서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선도부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살짝 끌리기도 하지만, 그런 데에 묶여있다간 일정이 꼬일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런 데 들어가면 책임질 게 많아진다. 그러자 실눈을 뜬 경비원이 내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경비원이 내 쪽에 내민 것은, 교복 안주머니에 쏙 들어갈 크기의 새까만 명패였다. 아직 이름이 쓰여있지 않은 앞쪽에는 하얀 색으로 사람 모양의 그림 두 개가 그려져있었다.
“이게 무슨···.”
<마인드맵 확장 : 사이코메트리 Lv.4>
위험한 물건인가 싶어 슬쩍 능력을 발동하니, 머릿속에 과거 이것을 들고 있던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빗속에서 십수 명의 학생을 피투성이로 만든 채 앉아있는 남자와, 선도부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남자.
둘 모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젊은 시절의 한시혁과··· 차대엽의 형인 차대운. 몰입을 그만두고 휙 고개를 들자, 앞에 알림창이 떠올라있었다.
<아이템 퀘스트 : 흑패 승인>
<선도부의 상징인 백패와 달리 외부 고문 직속을 뜻하는 흑패. 일반 학생의 신분으로 유사시 대기중인 선도부원을 동원할 수 있다. (현재 2명, 실적에 따라 상승) 정식 등록을 위해 선도부실에 가서 선도부장의 직인을 받으시오.>
<보상 : 3,000 크레딧, 동기화 Lv.1>
“오···.”
나는 탄성을 흘리며 손 안의 명패를 내려다보았다.
< 진소란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