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31화 (31/113)

< 진소란 (3) >

다음 날 방과후. 나는 진소란과 함께 세한의 선도부실에 방문했다. 손에 들린 건 경비원이 직접 써준 소개장이었다. 미리 언질을 해둔 건지, 굳게 닫혀있던 선도부실의 문은 이름을 전하자마자 간단히 열려 우리들을 맞이해주었다.

역시 명문은 명문이란 건지, 선도부실은 거의 강의실 하나 크기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양측에 일렬로 서있는 선도부원들이 열중 쉬어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고, 그 끝에 놓인 사무용 책상엔 한 명의 여자가 다리를 꼰 채 앉아있었다.

가슴팍의 명찰은 붉은색, 즉 3학년생이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세한의 3학년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4학년은 수습 기사로서 여기저기 불려나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학교 안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중에선 가장 높은 학년이었다.

마음이 꺾인 학생들이 스스로 자퇴하거나 다른 학교로 전입해 수가 줄어드는 2학년과 다르게, 3학년으로 진급하는 건 시험 자체가 대단히 어려웠다. 이미 다른 학교의 졸업생 수준으로 완성되어있지 않으면 붉은 명찰을 달 수 없었다.

책상에 앉아있는 여자는 머리에 캡이 달린 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마녀 혼혈들의 모자령 같은 것이 아니라, 세한기전의 선도부를 이끄는 존재를 상징하는 모자였다. 남색 머리를 단발로 뚝 자른 선도부장이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너희가 비이 선생님이 말한 1학년들인가?”

“기사육성과 신입생 진소란입니다.”

“송한솔이예요. 잘 부탁합니다.”

나와 진소란이 인사하자 선도부장이 손을 내밀었다.

“선도부장인 민유리다. 소개장은?”

걸어간 내가 봉투를 넘기자, 민유리는 눈썹을 찌푸리며 소개장을 읽어보았다. 봉투 안의 내용은 나도 슬쩍 읽어봤지만 별 거 없었다. 유망한 인재를 찾아냈으니 선도부에서 활용해보란 말과, 내가 받은 흑패를 승인해줬으면 좋겠다는 부탁.

“우선은 거기. 우리 식구로 추천받은 학생.”

지명받은 진소란이 어깨를 들썩였다. 이내 민유리가 책상 앞의 넓은 공간으로 나와 자기 쪽에 손가락을 까닥였다.

“일단 나한테 한 방 먹여봐라.”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진소란의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저쪽은 온갖 수라장을 헤쳐나온 3학년. 게다가 세한을 대표하는 선도부장이다. 고작 1학년의 공격에 상처를 입을 리가 없었다. 민유리의 말에 진소란은 천천히 검을 빼들었고.

한 순간 자리에서 사라졌다. 채앵! 눈치챘을 때 진소란은 이미 선도부장의 코앞에 도달해있었다. 민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검을 꺼내 진소란의 쾌검을 막아낸 채였다. 한 순간 늦게 몰아친 바람이 선도부장의 모자를 떨어뜨렸다.

“기세와 속도는 좋아. 하지만 전혀 다듬어지지 않았어. 속공이란 건, 이렇게 상대의 호흡을 읽어낸 뒤 하는 거다.”

그리고 민유리의 몸이 흐르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묘한 광경이었다. 선도부장보다 확연하게 빠른 진소란의 동작이 한 순간 느려졌을 때, 선도부장의 기세는 갑자기 격해져 대응할 수 없는 속도와 방향으로 찔러들어왔다.

“커헉!”

칼자루로 명치를 찍힌 진소란이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방금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명확했다. 호흡의 조절이다. 근육이란 건 원래 숨을 들이마실 때 약해지고, 크게 내뱉을 때 강해진다. 선도부장은 그 주기를 의도적으로 엇나가게 해, 자신은 빨라지고 진소란은 느려지는 한 순간을 만들어냈을 뿐.

‘그런 게 저렇게 간단히 되는 건가?’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만 아무나 따라할 수는 없었다. 물론 진소란은 최속의 도약을 위해 언제나 강하게 호흡을 가져가기에, 들이마시고 내쉬는 주기를 간파하기는 쉬웠다. 하지만 단숨에 그 빈틈을 헤집어서 파고드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아마도 몸의 중심을 자유자재로 이동시키는 기술을 몇 년에 걸쳐 연습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본 상대의 박자의 틈을 저렇게 깔끔하게 찌를 수 없다. 그걸 증명하듯 지금도 민유리의 어깨에선 전혀 호흡을 읽어낼 수 없었다.

‘경비원이 단련시킨 거겠지.’

검술이라기보단 명상법에 가깝다. 바닥을 구른 진소란은 곧장 일어나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민유리는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는지 떨어져있는 모자를 주워 쓰고 말했다.

“아무튼 제법이군. 합격으로 쳐도 좋아.”

민유리가 겁을 거두고 다시 책상에 걸어갔다. 진소란은 찜찜해하는 표정이었다.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가 한 대 얻어맞고 굴렀을 뿐인데 합격이라니 스스로 납득이 가지 않겠지.

하지만 옆에서 구경한 나는 충분히 납득했다. 천천히 검을 빼든 진소란이 단숨에 가속해서 달려든 직후, 민유리는 반사적으로 대응하면서도 예상을 넘어선 속도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모자를 떨어뜨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쟤는 잘 끝났는데.’

사실 진소란은 받아들이는 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선도부엔 수습기간이 있으니 잡다한 받고 나서 천천히 평가해도 된다. 중책을 맡길 부원은 언제나 부족하기에 진소란 정도의 인재는 선도부장으로서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내 쪽이었다. 이 흑패 보유자라는 직책은 한 마디로 암행어사 같은 것이었다. 평소엔 일반 학생으로 지내다 유사시엔 자기 재량으로 선도부 권한을 집행할 수 있다. 모르는 신입생에게 선뜻 넘겨주기엔 너무 큰 역할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물어보니 흑패 소유자는 요 몇 년간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저기 앉아계신 선도부장께서도 처음 겪는 경우인 것이다. 갑자기 새파란 1학년이 나타나 흑패인지 뭔지를 툭 던져주고 필요할 때 여기 인원 차출해가겠다 선언하면 선도부를 관리하는 그녀로서는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그러면 다음 안건은 너인가, 흑패.”

다시 책상에 앉은 선도부장이 코웃음을 쳤다.

“이쪽이 수집한 정보들의 자유 열람에, 유사시 선도부원을 임의로 동원할 수 있는 권한? 비이 선생님도 장난이 지나치군. 내가 이따위 농담에 도장을 찍어줄 거라 생각했나?”

예상대로 상식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학생에게 흑패를 넘겨주는 건 경비원의 권한이지만, 그 흑패가 실효를 가지려면 반드시 선도부장의 직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누가 대놓고 자기 직권을 침범하겠단 놈한테 순순히 도장을 꺼내겠는가.

그래서 역대 흑패 소유자들은 승인 과정이 하나같이 특이했다고 한다. 혼자 선도부에 쳐들어가 전부 박살내고 강제로 인정받은 독사나, 흑패를 받기 전부터 이미 선도부장 자리에 부하를 앉혀두고 자기 손 안에서 주무르고 있었던 검귀.

하지만 나한테는 그런 전투력도 수완도 없다. 고작 이런 일에 차대엽한테 도와달라 징징대는 것도 자존심 상하고.

“어떻게 인정해주실 생각은 없고요?”

“그래, 없다. 이런 걸 묵인해줄 멍청이가 있겠나? 너도 선도부 말단부터 시작하고 싶다면야 받아줄 수 있다만, 우리 권한만 쪽쪽 빨아먹는 기생충 따윈 존재할 이유가 없지.”

옆에 서있는 선도부원들도 동감하는 눈치였다. 단순히 그릇 지키기를 위해 견제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조사한 정보 중엔 외부 학생들에게 새어나갈 시 곤란해지는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렇기에 선도부가 폐쇄적인 조직인 것이다.

그러한 반응에 나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내게는 전투력도 수완도 없다. 하지만 난 전임자들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었다. 약간의 허세와, 압도적인 정보. 반대하는 선도부를 무릎꿇릴 힘이 아니라, 오히려 안달을 내며 날 붙잡게 할 당근이. 나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님용 의자에 마음대로 앉아 손깍지를 꼈다.

“당신들은 뭔가를 착각하고 있어.”

“···뭐라고?”

“이 제안의 요점은 내가 선도부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는 게 아니야. 정확히 그 반대지. 당신들한테 내가 가진 정보를 공유해주겠다 말하는 거야. 흑패는 그 최소한의 대가고.”

서있는 선도부원들이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야 나는 지금 선도부 전체보다 나 혼자 조사한 정보의 가치가 높고, 댁들은 싹 다 나보다 무능하다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제 막 입학한 풋내기 1학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선도부장의 경우엔 아예 헛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 반론이 나오기 전에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손바닥을 선도부실의 테이블에 딱 붙이고 눈을 감는다..

<마인드맵 확장 : 사이코메트리 Lv.4>

“애초에 선도부 내부 정보 같은 건 당신들한테 공유받을 이유가 없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으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한 번 까발려볼까. 어제 여기서 애들 모아놓고 3인 1조로 세 그룹, 도박 단속조 조직했지? 잠복 장소는 A동 주변 창문 보이는 곳. 지하 주차장 구석. 공원 다리 아래 판잣집.”

민유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방금 내가 말한 내용은 어제 외부 간섭을 차단하는 결계를 몇 겹이나 친 뒤에 진행한 회의의 결과였다. 밖으로 새어나갈 틈이 있었다면 작전의 의미를 잃게 된다. 하지만 애초에 그 작전에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잠복해봐야 소용없을 거야. 걔넨 지하에 컨테이너 하나를 통째로 박아놓고 문지기 담당이 그때그때 땅굴을 만들었다가 없앴다가 하고 있는 거거든.”

그 하우스의 정확한 위치 또한 당연히 알고 있다. 미행으로 따라붙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부터 주변에 매복해있으면 출입구가 생겨났을 때 현장을 제압해 잡아넣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선도부가 몇 달 동안 수고를 들여도 알아내지 못했던 최고급 정보들이 내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거기 맨 앞에서 두 번째 사람. 어제 찾아낸 단서를 보고해도 될지 고민하고 있지? 그냥 보고해도 돼. 그거 진짜로 암시장 딜러 명함 맞으니까. 겉의 연락처는 속임수지만.”

내 말에 지목당한 선도부 선배가 움찔 하며 놀랐다. 원래 진소란이랑 적당히 돌아다니면서 실적을 올리려 했던 꿀단지들인데, 몇 개쯤은 맛보기로 미리 퍼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잠시 숨을 삼키고 있던 선도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잖은 속임수다.”

민유리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상당히 놀란 눈치긴 했지만,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호흡이 흐뜨러지지 않았다. 이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 민유리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난 날아온 것을 손바닥으로 탁 잡았다.

“그럼 어디 한 번 그게 무엇인지 맞춰봐라. 뭔가 냄새가 나는 정체불명의 물건이다만, 네가 정말 ‘선도부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라면 분명 만족스러운 대답을 해줄 수 있겠지?”

나는 받아든 단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짓뭉개져 박살이 나있는 마물의 씨앗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원예부실에서 회수했다 옥상에서 찌부러뜨린 씨앗의 잔재 같았다. 옆에 슬쩍 다가온 진소란이 내 손바닥 위에 있는 조각난 씨앗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대체···.”

전혀 모르겠다는 진소란의 표정에 선도부장이 콧숨을 내쉬었다. 그야 이렇게 박살난 상태의 씨앗에서 뭔가를 눈치채고 사건성을 감지한 건 과연 선도부장이라고 할 만한데, 이 건은 나랑 차대엽이 진작에 완전히 매듭을 지은 문제였다.

나는 씨앗을 내려다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내가 목줄을 쥐고 있는 배은호 선배와, 사실상 이 건을 묵인하는 데에 동의한 경비원. 이 단서로 만에 하나 나한테 불똥이 튈 가능성 등에 대해서. 이내 고민을 끝낸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장사를 벌이려던 증거들을 정리할 시간은 이미 충분히 줬고, 선배라면 알아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걸로 걸려 정학당하면 결국 그거밖에 안 된다는 거다. 입막음 하나 제대로 못하면 앞으로의 뒤처리를 맡길 수 없다.

‘선배는 할 수 있어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내가 정답을 입에 담았다.

“꼭두각시 나무 씨앗이네요. 먹으면 마력 펌핑되는 거.”

“···뭐라고.”

흠칫한 민유리가 귀신같은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무조건 맞으니까 도장이나 찍어줘요.”

내 확신에 선도부실 안의 모두가 놀라서 웅성거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도 물밑에서 밀매가 진행중일 수도 있고, 특별히 교내 경계에 신경을 써야 할 일이었다. 둥지 전략 때 차우진에게 칭찬받은 걸 알고 있는 진소란만이 한솔 너는 마물 같은 걸 좋아하나 보군, 하고 담담히 감탄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선도부원 십수 명의 감정을 음미했고,

<아이템 퀘스트를 완수하였습니다.>

이내 손목의 염주가 초록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 진소란 (3)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