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중매 (4) - 무료 마지막 >
유설의 마력중재가 돌파당했다.
분해된 주문이 새하얀 눈으로 흩날릴 때마다, 그 안에 숨어있던 꽃봉오리가 피어난다. 만개한 꽃은 폭열이 되어 유설을 저 멀리 날려보냈다. 유설에게 패배했던 2학년들은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3학년들도 놀라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만큼 지금 유매가 성공시킨 기술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마력중재를 파훼할 수 있다는 듯 간단히 쏘아내고 있지만, 확실히 말해 교수진들 중에서도 저걸 따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가능한 건 학장 정도일 것이다.
모여 앉은 1학년들에 와서는 방금 유매가 무슨 기술을 쓴 건지 파악한 이들조차 소수였다. 같은 학년임에도 이미 전혀 다른 영역에서 놀고 있는 이질적인 재능. 그것에 누군가는 초조해하고 누군가는 세한에 들어오길 잘 했다며 흥분했다.
“이제 알았어? 당신이 웃는 낯짝 뒤로 무슨 꾀를 써봤자 날 대신하는 건 불가능해. 전부 다 헛된 노력이었다고.”
“···당신이 아니라, 언니야.”
자세를 바로잡은 유설이 유매를 바라보았다.
동생의 기술에 감탄하는 것과는 별개로, 싸움에 임하고 있는 이성은 냉정하게 판단을 계속했다. 마력중재를 통한 카운터는 이제 무의미하다. 다른 전략을 생각해야만 했다. ‘마녀공예’를 꺼낼까? 아니, 유매가 마력독재로 망가뜨릴 것이다.
머리는 이미 자신의 패배가 확정됐다 말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여기서 조용히 항복을 선언하고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유설은 그러지 않았다. 단순하게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야 동생과 이렇게 마법을 펑펑 쓰며 뛰어노는 건 처음이었다.
“···뭘 웃고 있는 거야.”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마력을 끌어올리는 유설의 모습에, 공격하는 유매 쪽이 초조한 듯 입술을 씹었다. 이내 유매가 휙 손을 휘둘렀다. 폭열의 창과 냉기의 대검.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쏘아낸 주문이 시합장 중앙에서 맞부딪혀 터졌다.
파앙! 터져나온 연기가 주변을 가득 덮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상대방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모자를 쓰고 있는 마녀는 시야 따위에 영향받지 않고 마력 그 자체를 포착한다.
이내 펼쳐진 것은 야만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단순한 화력전이었다. 주문의 세세한 완성도는 유설이 우위였지만, 폭발력과 속도는 유매가 앞섰다. 결정적인 순간 마력독재로 방해가 들어오는 탓에 점점 밀리고 있는 건 유설 쪽이었다.
조금씩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대치를 아쉽다 느끼며, 유설은 조용히 웃었다. 전력을 다해도 동생을 이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안심. 자신이 이기면 유매를 상처입히게 되고, 이길 수 있는데도 억지로 져줬다간 그거야말로 절연 감이었다.
유설은 슬쩍 시선을 돌려 유매 쪽 입구에 서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계산대로라는 듯이 눈을 빛내며 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동생의 친구. 그는 반드시 유설이 유매에게 박살나게 해주겠다는 호언장담을 멋지게 지켜주었다.
이번이 몇 번째일지 모를 주문의 격돌. 유설은 원래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싸우며, 끊임없이 거대한 마력량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타입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력은 얼마 안 있어 바닥을 보일 것이다. 유설이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열세에 몰린 유설은 웃고, 오히려 몰아붙이는 쪽인 유매가 초조하게 이를 꽉 깨물고 있다. 마력과 함께 자신이 안에 있던 감정을 발산하듯 유매가 소리쳤다.
“왜 내가 있던 자리를 빼앗았어.”
“미안해.”
터져나가듯 날아간 유매의 창을 유설이 조용하게 받아친다. 그야 동생이 혼자서 우는 것을 엿봤으니까. 울고 잇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동생은, 들켰다는 걸 알면 억지로 화내며 자기 마음을 더 꽁꽁 숨길 거라 알고 있었으니까.
유매의 맹공은 숨쉴 틈도 없이 계속되었다.
“왜 말을 걸어주지 않았어. 왜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았어!”
“···미안해.”
유설의 재능은 훌륭한 편이지만 유매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타고나지 못한 인간이 스스로 바래 유매의 대용품이 되었다. 그 차이를 메꾸기 위해 온갖 시약과 주술로 마력의 흐름을 조정받았고, 몇 년은 거부반응과 발작에 시달렸다.
목이 잠기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다운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런 상태로 말을 걸었다간, 마음씨 착한 동생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겠지. 그것만은 안 됐다. 지금까지 참아온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왜 나를 혼자 두고 갔어!”
그 외침에 유설의 눈동자가 떨렸다.
어떤 때보다 더 강하게 마력을 옭아매는 독재. 미처 속도에 맞추지 못했다. 유설은 유매의 일격을 남은 모든 마력을 쥐어짜내 방어했다. 임시변통으로 만든 보호막 따위 간단히 와장창 깨져버렸다. 넘어진 유설이 땅바닥을 굴렀다.
사실은 그 말대로였다. 세한에 입학하기 위해 마녀골을 떠날 때. 같이 가자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슨 문제가 있다 해도 마녀골에 혼자 놔두는 것보다는 나았을 텐데.
단순히 무서워서 말을 건네지 못했다. 같이 소꿉놀이를 하던 동생은, 비밀 장소가 있다고 속삭이면 무표정이지만 꼬옥 언니의 손을 잡고 따라와주었다. 이제 얼굴을 마주한지 몇 년이 지나버린 동생이, 자신의 손을 뿌리칠까봐 두려웠다.
“왜···!”
“미안해.”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유매에게, 온화하게 웃고 있던 유설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눈썹이 좁혀지고, 꾸욱 하고 목에 힘을 준다. 꼴사나운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푹 숙여버린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안해, 미안해···.”
바닥에 무릎 꿇은 유설에게 더 이상 마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전투불능 판정과 함께 시합 종료가 선언됐다. 관중석의 박수에 아랑곳 않고, 유매는 울고 있는 언니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리고 유설을 내려다보았다.
정면에서 완벽하게 압도해 이겼다. 혼자뿐인 방에서 그렸던 상상화는 지금 현실이 되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언니를 꺾어, 언니는 결코 자신의 대신이 될 수 없다고 깨닫게 한다. 자신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증명한다.
“바보같이···. 나보다 약하면서.”
그리고 자신은 웃으며,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언니 노릇 하겠다고 뭐든 나보다 잘하려 애쓰는 건 솔직히 열 받고 짜증났지만···. 딱히 원망 같은 건 하지 않았어.”
그저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창가에서 노파들을 따라가는 언니를 바라보고 있을 때부터 계속 계속,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았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이 비아냥이나 변명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한 마디가 되려면, 스스로 유설을 꺾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돌아선 유매가 출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사과는 들었다. 하고 싶은 말도 전부 쏟아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시야가 조금 흐릿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바닥이 눈앞에 보였다. 한숨을 쉬던 유매가 이내 천천히 손바닥을 들었다.
짜악, 송한솔과 승리의 하이파이브를 한다. 다시 작은 크기로 줄어든 고깔이 해파리처럼 유매의 옆머리에 내려앉았다.
유매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왜? 조금만 더 버텼으면 질 뻔 했냐?”
송한솔이 힘이 풀린 유매를 부축하며 물었다. 유매가 작게 콧숨을 쉬었다. 다행인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마녀골 바깥에 나와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언니를 따라 이 학교에 온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송한솔을 만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자신은 누군가의 도움 따위 굳이 필요 없지만, 필요 없다고 해서 가지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고마워.”
유매가 처음으로 적의를 담지 않고 웃었다. 지금 지은 표정을 아무도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송한솔의 등에 업힌 채, 유매는 조용히 대련장에서 퇴장했다.
* * *
그 대단했던 마녀의 내전에서도 며칠이 지나갔다.
나는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듯, 젓가락으로 집은 꼬마김밥에 떡볶이 국물을 묻혔다. 그리고 불만 가득한 얼굴로 눈썹을 찌푸리며 맞은편에 앉아있는 유매에게 항의했다.
“이거 섭섭하네. 내 수업료가 이 정돈가?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럴 땐 통 크게 스테이크 정돈 썰어줘야지.”
“주는 대로 처먹어.”
유매가 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비싼 식당에서 제대로 한 끼 쏴달라 그렇게 텔레파시로 이미지를 보냈는데, 유매가 데리고 온 것은 캠퍼스 바로 옆에 있는 분식집이었다. 아마 지나가다 같은 반 놈들이 앉아서 떠드는 걸 몇 번 봤을 것이다.
나는 손을 들고 카운터의 아줌마를 불렀다.
“이모, 여기 순대 1인분 주세요. 간은 빼고.”
“나는 간 좋아하는데.”
“아니다. 간도 주세요!”
차대엽의 말에 나는 급히 주문을 수정했다. 하루 뿐이지만 스파링 담당으로서 고생해준 이 녀석도 뒷풀이 자리에 끼어있었다. 우리는 종이컵에 콜라를 따라 건배했다. 축하연이 진행되는 자리는 바깥 창문에선 보이지 않는 구석 쪽이었다.
굳이 숨어들듯이 구석에 앉은 이유는, 유매가 너무 유명인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기야 데뷔전으로 전교생 앞에서 2학년 차석을 담궈버렸는데 주목을 받지 않는 게 무리였다. 오히려 차대엽보다 유매를 신경쓰는 인간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멀리서 힐끗대는 시선이 많아졌을 뿐 직접적으로 귀찮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짜증으로 가득찬 유매 씨는 말 걸면 죽인다는 오라를 온몸에서 풀풀 풍기고 다녔기 때문이다. 1학년 교실 안에서는, 뭐라고 할까 전국대회에서 금메달 따온 친구를 바라보는 듯한 묘한 거리감이 생겼다.
그런 거리감 따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유매를 언젠가 쓰러뜨릴 경쟁자로 대하는 인간은 얼마 없었다. 그 얼마 없는 놈들 중 한 명이 바로 지금 옆자리에 앉은 자세빈이었다.
“그냥 이리 와서 앉는 게 어때.”
“맞아! 튀김이랑 김말이 나눠줄게.”
“스페셜 세트 C를 시킬 여유도 없는 거냐? 어이가 없군. 돈이 없으면 당장 나한테 내단을 팔아.”
옆 테이블에 앉은 자세빈네 패거리 세 명이 이쪽에 대고 자꾸 말을 걸었다. 저치들은 우리를 따라온 게 아니라 원래부터 이 분식집 단골이었다. 자세빈의 돈씀씀이에 얼굴이 활짝 핀 아줌마는 서비스까지 아주 진수성찬을 차려주었다.
“김말이만 받아올까?”
“먹금해 그냥.”
진지하게 물어보는 차대엽에게 내가 대답했다. 유매는 이미 아까부터 들리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매는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가 식사하는 데에 방해되는지 이것 좀 잠깐 맡고 있어달라며 나한테 내밀었다.
자기들끼리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자세빈 패거리가 분식집에서 나가고, 나는 안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냈다.
유매와 유설 자매는 마주쳤을 때 인사할 만큼은 관계를 회복했다. 처음부터 속으로는 서로를 싫어하지 않았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편지는 둘이 있을 때 역시 부끄러워 건네주지 못했다고, 나 보고 대신 건네달라 부탁한 물건이었다.
“이거, 선배가 전해달라더라.”
나는 그 한 마디만 던지고, 거절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화장실 가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따뜻해지기 시작했지만 바깥공기는 아직 쌀쌀했다. 잠깐동안 가게 앞에 서서 캠퍼스 거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완료 : 유설의 편지를 읽게 하였습니다.>
<보상 : 6,000 Credit>
<퀘스트 완료 : 유매가 대상에게 승리했습니다.>
<보상 : 마인드맵 확장 - 블링크 Lv.1>
<추가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속전속결 : 4,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무대 뒷편 : 5,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마인드맵 확장 - 인비저빌리티 Lv.1을 획득합니다.>
<두 마리 토끼 : 8,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오···.”
두 개를 동시에 여니 띠링띠링 알림이 끊이질 않았다. 새 능력은 물론 왕창 크레딧이 들어왔다. 오랜 시간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분식집 안에서는 유매가 편지를 읽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차대엽이랑 둘만 있으면 아직 어색하니 시간 떼울 겸 열어본 거겠지.
이 정도나 크레딧을 모았으면 하이 에스퍼의 상위 능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제야 보통 혼혈들과 제대로 싸워볼 수 있을 만한 전력이 갖춰지는 것이다. 차대엽이나 유매같은 최상위권의 괴물들 상대로는 아직 한참이나 역부족이었지만.
‘그 힘숨찐도 슬슬 도와줘야 될 테고.’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밖에 나와있는 것도 좋지 않다.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자, 유매가 맡아두라고 했던 목걸이가 잘그락대며 손가락에 사이에 잡혔다.
나는 조용히 목걸이를 꺼내 안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잠깐 놀랐다. 한동안 입을 벌리고 있던 나는, 피식 웃으며 펜던트를 닫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언제 찍었대.”
어린 시절 유설의 모습이 담겨있던 펜던트 안의 사진은, 세한의 교복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으로 바뀌어있었다.
< 설중매 (4) - 무료 마지막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