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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36화 (36/113)

< 주하리 (1) - 유료 시작 >

“이놈의 크레딧은 벌어도 벌어도 부족하냐.”

나는 한숨을 쉬며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퀘스트 두 갤 동시에 깬 덕에 추가 업적이 펑펑 터져서 부자가 되었다 싶었는데, 조금만 투자하니 다시 알거지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향상된 능력들을 보니 고생한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마인드맵 확장 – 염동력 Lv.5>

<마인드맵 확장 – 사이코메트리 Lv.5>

<마인드맵 확장 – 초감각 Lv.5>

나의 근본이자 밥줄. 초능력자로서 가장 기초가 되는 능력 세 가지를 전부 한계까지 강화시켰다. 단지 상태창의 숫자만 올라간 게 아니었다. 염력 그 자체를 다루는 내 기술과 역량도 세한기전에 입학한 직후보다 훨씬 나아져있었다.

책상에 앉은 나는 두 손을 그릇처럼 만들어 모았다. 손바닥 위에서 공중에 떠오른 색종이가 이리저리 접히기 시작했다. 이내 염동력으로 접은 학 한 마리가 완성됐다. 깔끔했다. 이 정도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에 충분하다 싶었다.

‘스승이 없으니 불편하긴 해.’

혈통시대에 혼혈이 아닌 인간 따위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염력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마 세상에 나 혼자 뿐일 것이다. 그러니 참고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나 견본이 없었다.

무엇에 치중하고 무엇을 버릴지. 효율적인 연습 방식엔 무엇이 있고, 어느 정도로 숙련됐을 때 다음으로 넘어가야 할지. 전부 스스로 찾아내서 결정해야 했다. 어차피 남의 말은 죽어라 안 듣는 성격이니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옆의 상태창을 눌러 마인드맵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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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맵 개척 : 염동 세공 Lv.1>

- 선행 능력 : 염동력 Lv.5

- 필요 크레딧 : 5,000 Credit

<마인드맵 개척 : 동조 Lv.1>

- 선행 능력 : 사이코메트리 Lv.1, 동기화 Lv.1

- 필요 크레딧 : 5,000 Credit

<마인드맵 개척 : 의식 제어 Lv.1>

- 선행 능력 : 초감각 Lv.1, 텔레파시 Lv.1

- 필요 크레딧 : 4,000 Cr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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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뭐 이렇게 비싸?”

나는 상태창이 요구하는 크레딧의 액수에 어이가 없어 혀를 내둘렀다. 하이 에스퍼로 마인드맵을 개척한 뒤 열린 항목들은 흰색 글자로 쓰여있던 이전의 능력들과 달리 푸른색으로 빛나는 글자였다. 이른바 고급 응용 기술이란 것이다.

비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 크레딧을 투자하는 게 아깝지는 않지만, 이것들 말고 퀘스트로 얻은 추가 능력들의 레벨도 틈틈이 하나씩 올려줘야 했다. 하기야 더 이상 강해질 방법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한 고민이긴 했다.

다 쓰고 남은 크레딧으론 고작 해야 하나밖에 배울 수 없었다. 초능력은 익히자마자 어떻게 쓰는 것인지 느낌이 왔지만, 역으로 배우기 전에는 이름으로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 난 가장 마음이 동하는 것 하나를 정해 크레딧을 지불했다.

손바닥을 쥐었다가 폈다가 해본 나는, 방에 있는 물건을 아무 거나 하나 집어들었다. 물건과 내가 염력의 역장에 감싸이고, 나는 새로 배운 능력에 대해 감을 잡기 시작했다.

“오···.”

이건 상당히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 * *

아침 조례시간. 교탁에 선 한시혁이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이제 곧 순위전이 시작된다.”

그 말에 교실의 분위기가 팽팽히 당겨졌다.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공지가 나오진 않았지만 이미 대진이나 일정 같은 세부사항은 조율이 끝났을 것이다.

순위전은 세한기전이 평가하는 온갖 항목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되는 부분이었다. 외부 참관이 허용되기에 기사단에서 나온 사람들이 인재를 눈여겨보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결과로 암묵적인 학년 내 서열이 매겨진다.

아이들 사이에서 긴장이 퍼져나갔다. 주변 친구들의 높은 수준에 벌써부터 주눅이 든 놈들,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다며 고양된 놈들. 그에 반해 나는 별 생각 없이 하품했다. 옆에 앉아계신 수석님처럼 자신감으로 넘쳐서 그런 건 아니었다.

‘1학기 순위전은 별 거 없으니.’

정말로 중요한 것은 2학기 순위전이고, 입학하자마자 치르는 1학기 순위전은 그냥 지금 자기 자리가 어디쯤인지 확인해보는 과정에 불과했다. 게임할 때는 성적 향상 보너스를 땡겨받으려고 1학기 땐 일부러 기권해 꼴등을 할 정도였다.

교탁에 선 한시혁이 아이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너희들에겐 처음 있는 순위전이겠지. 담임으로서 한 마디 하자면, 이기는 것만 생각해라. 가끔 가다 대전 상대 약점을 찔러서 이기면 평소 실력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지 않냐고 헛소리하는 놈들이 있는데, 그런 건 찔리는 쪽이 나쁜 거야.”

한시혁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사실 너무 상성이 안 좋은 대진은 학교 측에서 미리 잘라내는 편이고, 패했다 하더라도 영리하게 분투했다면 참작이 들어간다. 하지만 세한기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약점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싸움에서 뭘 배운다 얻는다 하는 건 다 끝난 다음 복기하는 걸로 충분하다. 패배하는 것도 하나의 경험이라 생각하지 말고, 끝날 때까진 상대를 어떻게 이길지만 고민해라.”

한시혁다운 말이었다. 그 말에 술렁이던 교실 아이들의 시선이 어느 한쪽에 몰렸다. 그런 말을 들어도 어떻게 이길지 모르겠다, 하며 절망적인 경쟁상대를 쳐다보는 것이다. 힐끔대는 시선들 끝에 앉아있는 건 창밖을 바라보는 유매였다.

지금 유매는 차대엽보다도 더욱 요주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수업 시간에 다른 애들을 박살내고 다니는 짓은 오히려 그만두었지만, 유설과의 싸움을 견학해 그녀의 진짜 실력을 알게 된 아이들은 그때 이상으로 유매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매는 유설에게 승리했다. 세세한 상성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해 사실상 2학년 거의 전부가 유매를 못 이긴다는 뜻이었다.

조례를 끝마친 한시혁이 나가고, 소란스러운 교실에서 나는 누군가의 책상에 발을 옮겼다. 응? 하고 고개를 든 것은 반장인 주하리였다. 목덜미에서 묶은 주황색 머리에 사슴 같은 뿔이 두 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빡였다.

“대련? 나랑?”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기에, 주하리가 당황한 얼굴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얻은 능력을 시험해보는 데엔 반장이 적임이었다. 옆에 앉아 얘기하고 있던 반장의 친구가 이쪽을 차갑게 흘겨보았다.

주하리는 남의 부탁을 거절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반장이라서 그런가 성격이 대단히 좋았다. 나는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 자리에 돌아왔다.

* * *

방과후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나와 주하리는 각자 목검을 들고 자리에 섰다. 사실 대련이라 할 만큼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서로 마력도 혈통능력도 쓰지 말자 약속한 가벼운 스파링이다. 그러니 옆에서 감독해줄 사람도 부를 필요 없었다.

‘나는 쓰고 싶어도 못 쓰는 거긴 한데.’

조용히 자세를 잡고, 앞에 서있는 반장을 바라보았다. 오늘 반장을 부른 건 온갖 무기에 능통한 그녀와 비교했을 때 내 움직임이 얼마나 부족한지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나는 검술 따위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문외한이었지만.

목검을 쥐고 있는 내 손바닥의 접촉면에서 염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이코메트리를 사용할 때의 감각과 비슷하다. 글러브를 낀 선수가 자연스레 투구 동작을 준비하듯이. 내 어깨와 시선, 두 발 사이의 간격이 적당하게 조정되었다.

<마인드맵 개척 : 동조 Lv.1>

그러자 주하리가 살짝 눈을 빛냈다. 그냥 초짜인 줄 알았는데, 자세를 보고 기본적인 소양은 있는 것 같다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내게 딱히 검도 따위의 지식은 없었다. 가장 자연스럽다 생각되는 자세로 바꿨을 뿐이다.

이것이 동조의 효과였다. 총을 잡으면 총 쏘는 법을, 스키를 신으면 스키 타는 법을 왠지 모르게 알 수 있다. 지금의 나라면 아마 핸들만 잡아도 차를 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게 어느 정도까지 통용될지였다. 차대엽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 녀석도 검술에 있어선 주하리 못지 않게 대단했지만, 차대엽의 검술은 모든 움직임이 마력 운용을 전제로 한다. 내가 비교하거나 참고할 수 없었다.

“무도에 흥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방긋 웃는 주하리가 말했다. 무술이 아니라 무도. 적을 효과적으로 살상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정신 수양이나 취미, 스포츠에 가까운 것. 마력을 쓰지 않는 순수한 기술의 겨루기는, 혈통시대에서 그런 전력외 취급을 받고 있었다.

물론 조금 익혀둬서 손해볼 것은 없지만, 차라리 그 시간에 마력을 운용하는 전술을 파고 드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그 정도의 인식이었다. 주하리는 무도를 겨룰 수 있는 상대와 만난 게 기쁜 건지 웃고 있었다. 그런데도 빈틈이 없다.

“먼저 가도 되냐?”

“언제든지.”

슬쩍 거리를 재다가 주하리를 향해서 달려들어갔다. 검술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연스레 이렇게 될 것이다 하는 게 머릿속에 박혀들어왔다. 그리고 주하리가 몸을 살짝 틀자마자, 다음 순간 내가 쓰러질 거라 알았다.

등을 맞고 넘어진 나는 바닥을 몇 바퀴 굴렀다. 충격을 줄여야 한다 생각하니 몸은 적당한 낙법을 취하고 있었다.

“아야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다시 주하리를 향해 돌아섰다. 어디까지나 스파링이기에, 그녀는 추격타를 하러 따라오지 않았다. 내 몸은 검을 처음 휘두르는데도 대단히 자연스럽게 칼끝에 힘을 실어냈지만, 그 정도로 주하리를 이길 순 없었다.

‘까마득하군.’

틈이 보일 때마다 달려가 검을 휘둘렀지만, 한 번도 주하리에게 정타 한 번 맞히지 못했다. 그것은 거의 예술 수준이었다. 내가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 순간, 그 상황에 가능한 최선수가 당연한 듯이 돌아온다. 말도 안 되는 판단력이었다.

‘얼마나 단련을 하면 이게 되는 거야.’

확신을 가지고 다시 말하는데, 세한기전의 모두가 마력을 전혀 쓰지 않고 싸운다면 이기는 것은 주하리였다. 한참 동안 주하리와 검을 주고 받던 나는 숨을 헐떡이며 이해했다.

염력을 사용해 물건과 동조하면, 감으로 대충 때려맞출 수 있는 수준까지는 어떻게 쓰는 것인지 느낌이 온다.

하지만 지금 주하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영리하게 상대의 다음 수를 예상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기술로써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시 말해 감각은 있어도 지식이 없는 것이다. 이걸 메우려면 하염없는 반복 연습과 경험이 필요했다.

“기초는 잘 잡혀있네. 자세가 좋아.”

우리는 시간이 지날 때마다 다른 연습용 무기를 꺼내들어 싸워보았다. 검 뿐만이 아니라 창, 단검, 몽둥이, 기다란 봉까지. 주하리가 아무렇지 않게 무기를 휘둘러, 몇 번째인지 모를 승리를 따냈다. 나는 땀범벅이 되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역시, 몸 쓰는 건, 나랑, 안 맞아···.”

“그래? 내가 보기엔 재능 있는데.”

입으론 불평했지만 사실 이 정도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편법으로 배운 무기술로 주하리와 맞설 수 있을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중요한 것은 물건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해당 기능을 야매로나마 익힐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동조한다고 해서 F-1 레이서가 되지는 못해도, 어떻게든 자동차를 끌고 운전할 수 있다. 요령 비슷한 게 생기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능력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내게 주하리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었다.

날 상대하는 게 너무 쉬웠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혼혈이라 그런 건지 주하리는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채였다. 살짝 자존심이 상했지만 나는 웃으며 반장에게 인사했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 오늘 빚은 꼭 갚을게.”

“응?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재밌었고.”

“친구까지 기다리게 했잖아.”

나는 저편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애를 슬쩍 바라보았다. 은세연. 언제나 주하리의 옆을 따라다니는 녀석이었다.

어떤 색도 섞이지 않은 새하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추위를 잘 타는 것인지 보랏빛의 겉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 얼핏 보면 날카로운 디자인의 어깨장식처럼 보이는 외골격은, 마력을 실로 짜내는 것이 특기인 거미 혼혈의 특징이었다.

세한기전에서 은세연은 딱히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실 형태로 짜낸 마력은 그것 자체로 구속이나 절단 등 여러 면에서 활용할 수 있지만, 거미 혼혈의 진가는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할 때였다. 하지만 은세연은 결코 학교 안에서 꼭두각시 인형을 꺼내지 않았다.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유해 무기.’

마물 중에서도 극소수. 이름이 붙을 만큼 강한 마물을 쓰러뜨리면 가끔 내단이 아닌 ‘정수’를 취할 수 있다. 그것을 장인이 가공해 기사의 무기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유해 무기이며, 하나같이 혈통시대에서 엄청나게 강력한 아이템이었다.

천년서생의 창고에도 몇 개 없는 지고의 절품이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유해 무기는 사용할 주인을 가린다는 것. 검귀들이 몸에서 발현하는 신검이 유해 무기의 하위호환 같은 것이라 여겨지는 걸 감안하면 그 위력을 짐작할 만했다.

그리고 은세연은, 수백 년 동안 아무도 일으키지 못했던 가보이자 유해 무기인 인형을 아무렇지 않게 기동시켰다.

‘장비빨의 정점이지.’

1학년의 모두가 마력을 쓰지 않고 맨몸으로 대결했을 때 이기는 것은 아마 주하리겠지만, 반대로 무엇을 쓰든 전부 허용한다면 은세연이 차대엽이고 유매고 쓰러뜨릴 것이다.

그건 이미 혈통시대에서 확인된 사실이었다. 꼭두각시 인형을 꺼내서 폭주한 은세연이야말로 세한기전 1학년 시나리오의 최종 보스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차대엽도 유매도 인형의 힘 하나로 압도하던 은세연은, 친구였던 주하리의 손에 세한기전에서 최초로 사망하는 등장인물이 된다.

···주하리는 자퇴. 그리고 이야기는 2학년으로 넘어간다.

“···아니, 꼭 갚을게. 도와줄 일이 있을 거야.”

나는 갸웃거리는 반장의 손을 잡고 악수해 흔들었다.

< 주하리 (1) - 유료 시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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