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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백퍼센트 순혈인간-37화 (37/113)

< 주하리 (2) >

“뭘 쿨쿨 자고 있는 거야.”

옆구리를 쿡 찔리는 감각에 눈을 떴다. 놀라서 휙 고개를 돌아보니, 팔짱을 낀 유매가 어이 없단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유매는 포트에 물을 받아 데우더니, 자리에 앉아 가져온 책의 책장을 조용히 넘기기 시작했다.

이미 유설과의 트러블은 해결되었기에 유매가 이곳에 올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유매는 꼬박꼬박 도서실에 얼굴을 내비쳤다. 여기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교실이나 학식에선 남들이 자기를 보고 수군대는 게 신경쓰일 테고.

“졸려 보이는데. 커피 줘?”

“어. 설탕 없이.”

유매가 비품 수납장을 열자, 그곳엔 여러 종류의 티백이나 커피믹스 따위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옆에는 나무젓가락, 종이컵, 일회용 스푼의 행렬. 전기포트나 전자레인지처럼 있으면 편할 것 같은 물건들도 반씩 돈을 내고 반입해두었다. 교내 시설의 사적 점유라 벌점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점심시간의 차 끓이기 담당은 암묵적으로 유매가 맡고 있었다. 아무리 안하무인인 녀석이라도 매일 도시락을 싸오는 내게 주전자 물까지 받으라 시키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양심이 없는 거지.’

사실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했어도 텔레파시로 사기쳐서 이기긴 했을 것이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나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읽어낼 수 없지만, 가위냐 바위냐 보냐 정도의 간단한 선택지라면 어느 쪽인지 순간적으로 간파할 수 있었다.

이내 유매가 종이컵에 타온 차를 내왔다. 한쪽은 부드럽고 연한 갈색에 한쪽은 아주 새까만 색이라 어느 쪽이 누구 건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종이컵을 받아든 나는 쓴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졸음기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살겠네···.’

나는 피곤한 눈을 부비며 쭈욱 기지개를 폈다.

어제 잠도 못자고 밤늦게까지 날 끌고 다닌 것은 유설 선배였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겨서 협력을 요청했더니, 선배는 내용을 듣기도 전에 승낙해주었다. 저번에 편지를 전달해주었던 건으로 상당히 감사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유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 실책이었다. 내가 매일 유매의 도시락을 싸주고 있다고 하자, 유설은 거의 사람이 바뀐 것처럼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냉정한 목소리로 지금까지 내가 만든 도시락에 대해 질문했다.

사실은 질문이 아니라 심문에 가까웠다.

바로 들킬 거짓말을 해봐야 의미가 없으니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전부 사실대로 고했다. 이내 내 도시락이 남은 반찬과 인스턴트, 냉동식품을 기적적으로 조화시킨 구성임을 알게 된 유설은 아무 말 없이 그런가요, 하고 수긍했다.

난 정말 사람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그렇게 무서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전혀 화내지 않는데도 간이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이내 유설은 자신의 협력에 조건을 붙였다. 그것은 자신에게서 요리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 뒤는 하루 종일 끌려다녔을 뿐이었다. 장을 볼 때 좋은 재료를 고르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영양을 고려하는 식단의 구성법까지. 세한에서 지금까지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강의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옥 같은 실습이 시작되었다.

- 조금만 더 해볼까요?

알려준 레시피대로 반찬을 만들어 가져다줄 때마다, 차분한 목소리로 고쳐야 할 점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상당히 섬뜩했다. 목소리를 떠올리자 등골에 다시 소름이 돋았다.

설정상 유설은 온화하며 양보를 잘 하는 성격이었을 텐데, 양보의 양 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리 동조를 배워놓아서 망정이지, 조리 도구에 능력을 써서 요리에 대한 감을 잡지 못했으면 오늘 아침까지 잡혀있었을지도 몰랐다.

<퀘스트 완료 : 유설이 만족할 수 있는 도시락을 완성하였습니다.>

<보상 : 3,000 Credit>

<추가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급성장 : 2,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그래. 크레딧 벌었으면 됐지.’

나는 해탈한 표정으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적당히 싼 도시락이란 게 눈에 확 띄던 이전과는 달리, 안에선 대단히 공을 들인 반찬 구성이 모습을 보였다. 전날보다 확연하게 높아진 도시락의 퀄리티에 유매도 상당히 놀란 듯 싶었다.

“호화롭잖아.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묻지 마···.”

적어도 식재 값은 유설이 전부 지불하겠다 약속해준 게 위안이었다. 그야 유설 정도 되는 인재에게는 후원이 끊이지가 않을 테니 금전 관련으로 곤란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다. 유설의 방에 딸려있던 주방도 상당히 설비가 훌륭했고.

“그래. 아무튼, 잘 먹겠···.”

“잠깐.”

유매가 식기를 들고 식사를 시작하려 할 때, 나는 급히 손을 들어 유매를 제지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가지런히 정리된 오늘의 도시락 구성을 찰칵 찍었다. 오늘부터 도시락 메뉴를 일기장처럼 매일매일 기록할 생각이었다.

유매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무슨 꼴값이야.”

“이런 기록 하나하나가 나중에 검토하기도 좋고, 도전하고 싶은 레퍼토리를 늘려주는 동기 부여가 되는 거래.”

유매가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하냐며 눈썹을 찌푸렸다. 다름 아닌 그쪽 언니께서 충고해주신 말이었다. 나는 찍힌 사진을 확인한 뒤 곧장 전송했다. 반찬을 하나 집어 입에 넣어보자, 확실히 이전과는 달리 좀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그리고 거의 곧바로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사진을 보낸 상대에게서 돌아온 답장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확인하자 끊임없이 메시지가 도착하고 있었다.

- 어떤 반찬을 제일 좋아하나요?

- 싫어하거나 남기는 건 없나요?

- 교양 과목은 노트 빌려줄 수 있어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같이 들으면 동생한테도 전해주시겠어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분명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식사 중에 핸드폰이 계속 웅웅 울리자 유매도 신경쓰이는지 내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랑 그렇게 수다를 떠는 거냐는 질문에, 나는 솔직하게 그쪽 언니라고 말해주었다.

“너 밥 좀 잘 챙겨먹으래.”

“신경쓸 필요 없는데.”

이전이었다면 그 여자가 뭔데 나한테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정색하고 짜증을 한껏 부렸을 텐데, 지금은 젓가락을 입에 넣은 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당히 사이가 회복된 듯 싶었다. 나는 미트볼을 반으로 갈라내며 말했다.

“네 거는 언니한테 싸달라 하지 그래?”

“···왜. 귀찮아?”

유매가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요리에 슬슬 재미가 붙었기도 하고, 귀찮음보다는 다음엔 어떤 걸 도전해볼까 하는 기분이 더 컸다. 아마 나 혼자만 먹는 도시락에는 흥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트볼을 입에 넣었다.

“그게 아니라. 그 사람이 네 도시락 싸주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라해. 요리도 아마 나보다 열 배는 잘할걸.”

“싫어.”

역시 아직 언니한테 도시락을 싸달라 부탁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거의 원수에 가깝게 지냈는데 며칠 지났다고 붙어 다니면 그게 더 이상하지. 내가 대충 유설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자, 그쪽을 힐끗 바라본 유매가 나한테 따지듯이 물어보았다.

“근데 너 왜 난 핸드폰에 저장 안 해?”

나는 그 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순간적으로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돼서였다. 얘가 드디어 미친 건가? 번호를 알려줘야 저장하든 말든 하지. 나는 지금껏 유매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불러. 하고 핸드폰을 들자, 유매가 어디서 수첩을 꺼내더니 숫자를 하나씩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자, 유매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따르릉 울렸다.

“야, 학교에선 무음 모드로 해놔야지.”

“그게 뭔데.”

진심으로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유매 옆에 앉아 이런저런 기능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 * *

“순위전 예선은 내일부터다. 아마 오늘 중으로 게시판이 대진표에 붙겠지. 조 편성에 따라서 이건 불공평하다 생각하는 사람도 나올지 모르지만, 지레 겁 먹고 기권하진 마라.”

성적에 반영된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한시혁이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학생들을 싫어하는 거였다. 한시혁은 그 외에 순위전의 세부사항이나 주의할 점에 대해 전달했지만, 나는 전부 알고 있기에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넘겼다.

순위전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역시 분위기가 달랐다. 내가 아는 얼굴들은 다들 싸움의 준비를 끝마쳤다는 듯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용히 듣고 있는 금예린. 팔짱을 낀 진소란. 자세빈과 담민우, 창가의 유매. 옆자리에 앉은 차대엽.

그 외에도 주의해야 할 위험인물은 얼마든지 있었다. 솔직히 차라리 지금 2학년들을 상대로 싸우는 게 쉽지, 이 괴물 같은 놈들 사이에서 지금의 내가 정점에 오르는 건 엄청난 운이 따라줘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딱히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1학기 순위전은 힘낼 필요가 없다. 없는데.

<시나리오 퀘스트 : 순위전>

<1학기의 순위전을 4등 이내의 성적으로 마감하시오.>

<보상 : 8,000 Credit>

‘이러면 또 다르지.’

이건 받아야만 했다. 나는 지금 크레딧에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 상태였다. 그야 써야할 곳이 너무 많았으니까. 4등이 아니라 시상대에 설 수 있는 3등 안에 들어간다면 아마 추가 업적이 달성되어 더 많은 크레딧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눈덩이를 굴리기 위해서라도 순위전 본선이 시작되기 전에 다른 곳에서 내 능력을 강화시켜야만 했다. 지금의 나로선 상대할 수 없는 놈들이 여기엔 너무 많다. 거기에 운까지 따라줘야 겨우 상위 입상을 할 가능성이 생겼다.

방과후, 웅성거리는 게시판 앞에 선 나는 꾹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올라가있는 건 순위전의 공지였다. 내 이름이 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주변 조들의 구성원을 확인한다. 알고 있는 이름이 몇 개나 눈에 띄었다.

순위전의 조편성을 확인한 나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 * *

인적이 없는 밤거리. 나는 건물의 벽에 서있었다.

<마인드맵 확장 : 투시 Lv.5>

정확히 말하면 인적이 없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는 한 명의 모습을 쫓아가고 있었다. 벽 뒤에 숨어서도 상대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 확인할 수 있기에 미행은 상당히 용이했다.

‘이쪽으로.’

목덜미에서 묶은 주황색 머리와, 크게 나있는 사슴 같은 모양의 뿔. 한참 멀리서 봐도 주하리라고 알 수 있었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옆에 서있는 협력자에게 방향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인 협력자가 나를 따라왔다.

주하리의 발걸음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겨우 참아내면서 걷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내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주변을 확인한 주하리가 가슴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발밑에서 터져나온 것은 불꽃이었다. 땅을 흔들며 춤추는 불꽃이 뱀 같은 형상으로 길게 꼬리를 이었다. 내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협력자가 놀라서 크게 눈을 떴다. 저만치 강렬한 마력이라면 이름이 알려져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더욱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주하리의 주변에 나타난 마력의 불꽃은, 마치 적을 본 것처럼 마력의 주인인 주하리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괴로운 얼굴을 한 주하리는 필사적으로 검을 들더니, 자신을 덮치는 자신의 마력과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옆에 서있는 선배가 당황한 얼굴로 나한테 물었다.

“특이한 방식의 훈련······일까요?”

옆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될지도 몰랐다. 바깥에 발현시킨 자신의 마력을 제어해 자신을 스스로 공격하는 것으로, 혼자서 이미지 트레이닝 비슷한 것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건 그런 게 아니었다. 실제로 주하리의 어깨는 주하리를 덮친 불꽃에 그을려 화상을 입고 있었다.

저것이야말로 주하리의 특이체질이라고 할까, 후천적으로 떠넘겨진 특성이다. 세한에서 그녀가 마력을 극도로 억제하고 마도구와 무기술만으로 싸우고 있는 이유. 한 마디로 말해, 주하리는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 마력에게 적대당하고 있다.

불꽃 속에서 주하리가 춤을 춘다. 날뛰고 있는 저 마력의 흐름은, 멀리서 봐도 장난이 아니게 위험했다. 나라면 섣불리 다가갈 수조차 없는 격렬한 현장이었다. 하지만 이쪽에는 든든한 협력자가 있었다. 옆에 서있던 유설 선배에게 지시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앞에 나간 유설이 손을 휘저었다.

‘마력중재.’

주하리의 주변에서 불타오르며 스스로를 공격하던 마력은, 작은 손짓만으로 새하얀 빛의 가루가 되어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혼자서 불꽃을 피하며 싸우고 있던 주하리가 놀라서 휙 이쪽을 바라보았다.

“반장 안녕?”

나는 나를 보고 멍하니 입을 벌리는 주하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 주하리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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