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하리 (4) >
방과후 나는 2학년 건물의 옥상을 향해 올라갔다.
오늘은 예선전을 구경하러 가지 않았다. 이미 견적이 다 나온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상상도 못할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본선 진출자의 리스트가 변할 일은 없었다. 문을 열고 옥상에 발을 들이자, 누군가의 정신의 기척이 느껴졌다.
<마인드맵 확장 : 투시 Lv.5>
초능력이 발현된 시야가 벽 너머를 꿰뚫어봤다. 확인하자 물탱크 뒤쪽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건 배은호였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오랜만에 만난 선배에게 나오라고 말했다.
“왜 그런 데서 폼 잡고 서있어요.”
“······.”
놀래킬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지, 걸어나온 선배가 입술을 삐죽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옥상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배은호는 씨앗 파편을 조사하는 선도부의 추적을 멋지게 따돌려내는 데에 성공했다.
선도부 일지를 슬쩍 엿보니, 후속 수사로 이어지지 않도록 버림패로 쓸 가짜 사건과 경로를 만들기까지 했다. 기대 이상으로 깔끔하고 세심한 일처리였다. 팔짱 끼고 내 앞에 선 배은호 선배가 내 모습을 한 번 스윽 훑어보더니 말했다.
“너, 선도부의 도우미 비슷한 게 됐다던데.”
“오, 귀가 좋으신가.”
나는 솔직히 감탄했다. 내가 흑패 소유자가 된 것은 교직원을 제외하면 승인 현장에 있었던 선도부들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당연히 외부 누설은 금지였고. 선도부 내부에 끄나풀을 심어놓은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굴욕적인 모습 때문에 이미지가 많이 망가졌지만, 역시 기본적으로 방심할 수 없는 선배였다. 내 반응에 우쭐한 건지 어이가 없는 건지 배은호가 작게 콧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 파이프도 없는데 천하의 세한에서 장사를 하려 들지는 않지. 결국 너 때문에 물거품이 돼버렸지만···.”
“그건 나쁜 짓 하려던 사람이 나쁜 거고.”
“탓하려는 건 아니야. 오히려 계획에 문제가 있었던 거면 최대한 빨리 터지는 게 낫지. 그래야 수습하기 편하니까.”
탓하고 싶어 죽겠단 눈빛으로 그런 말을 해봐야 설득력이 없었다. 사실 씨앗을 반입해온 장사 건은 그렇다 쳐도, 호랑이굴의 아지트까지 반쯤 괴멸시켜 조직을 사실상 활동 중지 상태로 만든 건 배은호의 원망을 사기 충분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날 따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배은호는 정말로 욕심쟁이기 때문이다. 나와의 연결고리가 생긴 걸 이용해, 위축된 조직을 자연스럽게 꿀꺽하려는 심산인 것이다.
‘호가호위라 해야 하나.’
생각해보면 촌극이 따로 없었다. 나는 차대운의 위세를 빌려 조직을 제압했고, 배은호는 그런 내 위세를 빌려 영향력을 키우려 한다. 그 허세로 일단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거품이 다 꺼지기 전에 확실한 실적을 내 자리를 굳히겠단 것이다.
이쪽도 그런 점에 대해선 전부 오케이하고 제대로 도움을 달라 한 거니 딱히 불만은 없었다. 내가 선배에게 물었다.
“부탁한 물건은요?”
“가져오긴 했는데. 이런 게 왜 필요하다는 거야?”
주변을 잠깐 둘러본 배은호가 굵은 링으로 되어있는 팔찌 한 쌍을 꺼냈다. 두 개의 고리 사이엔 단단해보이는 쇠사슬이 걸려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수갑이었다. 차고 있는 사람의 마력을 흐트러뜨려 함부로 부술 수 없게 하는 물건이었다.
이런 종류의 마도구는 보통 정부기관의 구속이나 심문용으로 쓰이기에 일반인에게의 유통이 금지되어있었다. 제대로 된 물건을 뒤가 구리지 않은 방법으로 구하긴 힘들었다. 나는 신기해하며 도넛 모양으로 생긴 마법 수갑을 바라보았다.
“당장 구할 수 있는 물건 중엔 제일 품질이 좋은 거야. 웬만한 양아치는 얌전해지지. 우리 학교쯤 되면 방해를 받으면서도 마력을 정제해 짜낼 수 있는 애들이 있긴 하지만.”
배은호가 예외사항에 대해 경고했다. 이 수갑은 마력을 제대로 모으지 못하게 흐트러뜨리는 물건이지만, 실력만 있다면 방해가 들어와도 집중해 마력을 정제할 수 있었다. 유매 정도가 되면 아예 수갑을 차든 말든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냥 완력으로 끊어버리는 무식한 놈들도 있었다. 옆으로 다가온 배은호는 수갑의 취급방법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선도부 일을 도와주기 위해 수갑을 구해달라 부탁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설명은 괜찮고요.”
“뭐? 처음 쓰면 어떻게 채우는지도 모를···.”
<마인드맵 개척 : 동조 Lv.1>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배은호의 손목을 잡아 수근골에 수갑을 채웠다. 단순한 사용법 정도는 도구를 손에 잡기만 해도 읽어낼 수 있었다. 한 순간에 양손의 자유를 빼앗긴 선배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는 웃으며 수갑을 툭툭 쳤다.
“선배는 이거 끊어낼 수 있어요? 궁금하네.”
“도발하는 건가? 망가질 텐데.”
“쇠사슬은 끊어버려도 돼요.”
짜증난단 얼굴을 한 배은호는 몇 초 숨을 들이쉬더니, 아무렇지 않게 손목을 묶고 있던 수갑의 사슬을 뚝 하고 끊어냈다. 산군 혼혈 특유의 괴력에 섬세한 마력 제어까지. 과연 세한에서 다른 학생들을 부리고 다닐 만한 실력이었다.
‘이 정도는 바로 부수네.’
나는 새삼스레 혼혈들의 괴물 같은 강함을 실감했다. 염력으로 뭘 어떻게 하고 말고 이전에, 지금 배은호가 마음만 먹으면 내 모가지 따위 간단히 비틀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아깝게···. 다시 용접하려면 번거로울 텐데.”
“이게 딱이예요.”
원래 구속 용도로 쓰려던 것이 아니다. 나는 배은호의 손목에서 푼 수갑을 손가락에 걸어 빙빙 돌렸다. 이젠 정말 수갑이라기보단 사슬이 좀 잘그락대는 팔찌였다. 내가 수갑을 주머니에 집어넣자, 배은호가 나에게 카드 한 장을 건넸다.
“그리고 이거.”
나는 받은 카드를 살펴보았다. 플라스틱 재질의 카드는 언뜻 보기에 바탕색이 새까만 트럼프 카드 같은 모양새였다. 다만 카드의 앞면에는 일반적인 트럼프처럼 하트나 다이아몬드 같은 모양 대신 별 모양의 마크가 네 개 그려져있었다.
사실 배은호와 만난 것은 오히려 이쪽이 본론이었다. 완전 회원제로 운영되는 블랙마켓의 초대장. 이 카드가 있으면 호랑이굴 조직의 관계자로서 비공개 경매에 참가할 수 있었다. 휘파람을 불며 카드를 보자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아이템 퀘스트 : 적풍회 멤버십 (★4)>
<적풍회의 관리자와 접촉하시오.>
<보상 : 8,000 크레딧, 적풍회 멤버십 (★3)>
‘슬슬 학교 밖 접점도 나오네.’
나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적풍회. 이곳도 몇 년 안 있어 완전히 박살이 나는 곳이었다. 잠잠하던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개판이 나기 시작하는 건 2학년부터기에, 개입할 수 있는 곳엔 시간이 있는 1학년 때 전부 개입해두고 싶었다.
신기한 것은 보상 칸에 적혀있는 물건이었다. 초능력이나 크레딧이 아닌 실물이 보상으로 걸려있는 건 처음이었다. 카드를 보는 내게 핸드폰을 만지는 배은호가 말했다.
“일정은 따로 보내줄 테니 되는 날 말해.”
한 번 멤버십이 승인되면 이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첫 입장에는 배은호가 직접 따라와 내 신분을 보증해줄 필요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받은 수갑의 효과를 확인해볼 때였다.
* * *
어두운 밤의 뒷골목. 나는 주하리와 만나기로 한 벤치에 30분 정도 일찍 나와있었다. 원래는 약속시간에 딱 맞춰 나오는 편이지만, 오늘은 미리 능력을 연습해두고 싶었다.
<마인드맵 확장 : 인비저빌리티>
이전에 얻었던 능력을 사용하자, 내 몸의 모습이 주변 풍경에 녹아들었다. 말 그대로 남의 눈에 보이지 않게 숨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분명히 대단한 능력이지만 문제점이 몇 가지 있었다. 내가 몸을 숨긴 채 벤치 옆을 살짝 걸었다.
바스락, 하고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즉 능력을 발동해도 오로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뿐. 내 몸에서 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게 만들 수 없었다. 혼혈들의 괴물같은 감각이라면 호흡은커녕 심장 고동소리로도 위치를 알아낼 것이다.
두 번째 단점은 투명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엄청난 집중력이 든다는 것이었다. 다른 염력을 쓸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천천히 걷는 것 정도가 한계였다. 능력을 발동할 때도 몇 초의 시간이 걸리기에 전투 상황에서 쓰는 건 무리였다.
‘다음 능력.’
나는 은신을 풀고 다시 염력을 끌어올렸다.
<마인드맵 확장 : 블링크>
몇 걸음 떨어진 곳을 바라보며 위치를 확인하고, 내 안의 감각에 스위치를 넣은 순간. 휙 하고 주변의 시야가 바뀌며 나는 그 자리에 가있었다. 깜빡이는 것과 같은 순간이동. 중간에 장애물이 있어도 무시할 수 있는 공간 도약이었다.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쪽은 완벽한 당첨이었다. 도약할 수 있는 최대 거리는 그리 길지 않고 그마저도 발동에 몇 초 가량의 집중이 필요하지만, 당장 전투에서도 상대를 깜짝 놀래키는 기습에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이었다.
‘염력 소모가 좀 부담스럽긴 한데.’
투시랑 병용하면 어떤 곳에 격리당하든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만큼 든든한 능력이 없었다.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빠르게 발동이 가능해질 테니 다른 것 제쳐두고 죽어라 연습 시간을 투자할 만한 능력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다시 벤치에 앉은 나는 크레딧으로 구매한 새 능력을 발동했다. 눈을 감자 나의 정신이 느껴졌다.
<마인드맵 개척 : 의식 제어 Lv.1>
상위 초능력은 기본적으로 원래 지니고 있던 초능력을 강화시킨 것이었다. 동조는 사이코메트리의 응용이었고, 염동 세공은 아마 염동력을 일정 부분 특화시키는 기술일 것이다. 그와 똑같이 의식 제어 또한 텔레파시의 강화 형태였다.
명상하며 내면에 집중하자 정신 속에서 내 의식체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조금씩 움직여 다른 의식에 접촉한다.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내가 손을 들어올리자, 하늘을 날던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내려와 내 손가락 위에 앉았다.
‘좋아. 계속 그대로···.’
새의 의식과 접촉하고 있는 상태를 겨우겨우 유지한다. 턱걸이를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감각이었다. 일순간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당장에라도 연결이 풀릴 것 같았다. 수십 초 정도 그러고 있었을까,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물을 잘 다루는구나?”
목소리와 함께 퍼뜩 눈이 떠졌다. 놀란 새가 푸드득 날개를 펴고 다시 하늘로 날아갔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뒷골목에 서있는 건 주하리였다. 아직 약속한 시간까지 십 분 넘게 남아있었을 텐데. 주하리가 미안하단 얼굴로 말했다.
“나 때문인가···?”
“아니야. 근데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내 문제로 시간 내주는 건데 기다리게 하면 미안하잖아.”
주하리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주머니에서 고리 두 개를 꺼내 주하리에게 건넸다. 팔찌 겉면은 수갑처럼 보이지 않게 적당히 천으로 덧댄 상태였다. 차보라고 턱짓하자 주하리가 조심스레 받아들어 양 손목에 철컥 찼다.
“어?”
팔찌를 찬 주하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도구의 기능이 망가지지 않은 건 확인했다. 수갑은 착용자의 마력이 제대로 모이지 못하게 계속 흐트러뜨릴 것이다. 발작이 일어났을 때처럼 마력이 밖으로 형태를 이뤄서 나타날 일은 없겠지.
수갑의 능력에 대해 딱히 설명은 필요 없었다. 주하리는 온갖 마도구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의 스페셜리스트다. 마도구의 취급에는 나보다 반장 쪽이 몇 배는 능숙할 것이다.
“뭔가 바뀐 게 느껴져?”
“응···. 마력이 모이는 걸 계속 방해하는 거구나. 이게 있으면 나도 모르게 사고가 나지는 않을 것 같아.”
감탄하는 얼굴의 주하리가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졌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남한테 폐 끼치는 거 싫어하는 반장의 성격으론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발작이 갑자기 터져버리면 어쩌지 같은 걱정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어 물었다.
“아픈 건 좀 낫고?”
그 말에 주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몸 안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엔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괜찮다 헤헤 웃고 말겠지만, 어제 그렇게 답답하게 굴지 말란 말을 듣고 또 거짓말을 하진 못하겠단 거겠지.
수갑으로 막을 수 있는 건 마력이 직접 형태가 되어 몸 밖에 발현되는 발작 뿐. 고통은 몸 안의 마력 자체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주인에게 반발하기 때문이니 어쩔 수 없었다.
“잠깐 내 능력 좀 써볼 테니 저항하지 말아봐.”
“응? 응, 알았어.”
내 말에 주하리는 쉽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 좀 하라고 한 소리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나한테도 나쁜 마음은 없으니 지금은 넘어갔다. 나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마인드맵 개척 : 의식 제어 Lv.1>
어제 익힌 능력인데 이렇다 할 훈련도 없이 곧바로 실전이다. 나는 내 의식체를 확인한 뒤,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주하리의 정신에 접촉을 시도했다. 역시 근처 비둘기한테 이리 와달라 슬쩍 유도를 해보는 것과는 전혀 난이도가 틀렸다.
인간의 정신은 대단히 복잡했고 남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도록 닫혀있었다. 철통요새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문을 두드릴 수 있는지도 헷갈릴 수준이었다.
주하리가 나처럼 텔레파시를 사용할 수 있어 자신의 의식을 자각할 수 있었다면 그냥 문 열고 마중 좀 와달라 하는 걸로 끝날 문제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주하리의 정신에 접촉하기 위해 몇 분 동안이나 시도를 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어떻게든 의식의 표면에 닿을 수 있었다. 원래 자신의 정신에 남이 흔적을 남기는 것엔 누구나 커다란 저항을 느꼈고, 의식이 본능적으로 떨쳐내려 한다. 그런데도 주하리의 정신과 접촉했을 때엔 거의 거부반응이 없었다.
‘뼛속까지 남을 거절하질 못하는 성격이야.’
그런 성격으론 세상 살기 참 힘들 텐데. 그런 잡생각을 하며 의식의 표면을 살펴본다.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이, 주하리의 의식에는 기생하고 있는 것처럼 표면을 둘둘 감싸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진정시켜야 할 것은 바로 그쪽이었다.
그것에 잠깐 접촉을 시도하자, 내 의식체는 곧장 튕겨져 날아갈 뻔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못 박힌 나무판자 몇 개로 막힌 채, 가까스로 닫혀있는 문이었다. 그 안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당장 열라고 덜컹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살짝 가까이 다가가자, 그 안의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허억! 하고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등골이 싸늘해지는 감각이었다. 조금만 더 연결되어있었으면 무엇이 일어났을지.
<너.>
접촉이 끊기기 직전. 눈동자만이 드러나있는 그것이, 나의 의식에 말을 걸었다.
< 주하리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