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위전 (2) >
캠퍼스 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수선했다. 그야 마왕의 아들이 1회전에서 탈락했다는 건 가십거리가 되기 딱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자세빈은 별 충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자세빈이 내쪽에 눈길을 주었다.
“어제. 내가 경기를 이겼다고 확신했을 때.”
걸어가던 자세빈이 내 뒤에서 우뚝 멈추고선 말했다. 어제 있었던 시합의 마지막, 자세빈은 나에게 비장의 수를 발동했다. 검은소리. 상대방에게 악몽을 꾸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악몽에 잡아먹힌 상대는 실재하지도 않는 공격을 받았다 착각하게 된다.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이긴 거나 다름 없는 필살기였다. 하지만 상대와 접촉한 채 눈을 마주치고, 검은 막이 완성될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그것을 실전에서 어떻게든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반쯤은 자세빈의 판정승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나를 보는 자세빈이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히 뭔가를 당했다.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그건 기업 비밀이라서.”
내가 시치미를 떼며 어깨를 으쓱이자, 휙 돌아본 자세빈은 한 대 쥐어박고 싶단 표정을 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흥, 내 패배다. 이번에는.”
자세빈은 분명 자신을 엄청나게 대단한 놈이라 생각하는 자존심 덩어리지만, 역으로 그런 대단한 자신이 인정한 상대들에겐 상당히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녀석이라면 몰라도, 차대엽과 나에게는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인정하고 말고는 어디까지나 심정적인 문제고, 자세빈은 마왕의 아들로서 자신이 누구에게도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특훈을 시작할 것이다.
“이걸로 왕자도 나랑 똑같이 패배 라인이네.”
“너랑은 달라. 난 이 녀석의 본심을 끌어냈다.”
“나도 끌어냈어.”
“헛소리하지 마라.”
옆에 서있던 담민우가 자세빈과 투닥댔다. 담민우 또한 1회전 탈락자였다. 본선에 올라오자마자 같은 패거리인 늑대 혼혈 현미나와 만난 담민우는, 올라가고 싶냐? 하고 한 번 물어보더니 그녀가 끄덕이자마자 스스로 항복해 기권했다.
한시혁이 째려보는 것 따위 아랑곳않는 눈치였다. 담민우는 애초에 성적에 연연하는 성격도 아닌 데다, 졸업 뒤의 진로는 자세빈이 보장해주고 있으니. 굳이 서로 싸워 소모할 일 없이 1등 하고 싶어하는 현미나를 올려보내준 것이다.
다음에야말로 우승하기 위한 특훈에 들어갈 자세빈과 어울려주고 싶은 것도 있겠지. 아무튼 사려 깊은 녀석이었다.
2층으로 내려가 구석 문을 열자, 자료실이라 불러야 할 만큼 좁디 좁은 도서실에서 유매가 느긋이 책을 읽고 있었다. 표지를 보니 학술적인 서적조차 아니라 그냥 소설이었다.
어제부터 이론수업은 순위전을 배려해 거의 다 자습으로 돌려, 본선 진출자들에겐 캠퍼스 내 단련실이나 연습장 이용을 허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매는 딱히 단련 따위를 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이미 유설을 이겨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언니를 이기기 위해 피나도록 훈련한 요 1년간에 비하면, 순위전 따윈 정말 아무래도 좋은 문제일 것이다. 원래 1학년 전부를 박살내고 정점에 서려던 것도 유설과의 대결 때문이었으니, 그게 해결된 지금의 유매에겐 독기가 빠져있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아 유매에게 말을 건넸다.
“어제 아주 박살을 냈다던데.”
유매의 1회전 상대는 진소란이었다. 유매에게 한 번 완전히 압도당했던 진소란은 복수전을 위해 칼을 갈았고, 선도부장과 경비원에게 여러 조언을 받아 실제로 이전보다 훨씬 싸움에 강해져있었다. 그리고 유매에게 또다시 박살이 났다.
“적당히 상대해줄 여유가 없었을 뿐이야.”
유매가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진소란이 약해서 만신창이로 당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순간적인 폭발력은 너무 위협적이기에, 조금의 틈조차 주지 않고 철저하게 때려눕힐 수밖에 없었단 것이다. 유매가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면 네 짝꿍이랑 만나겠네.”
유매가 슬쩍 눈을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차대엽이 그 전에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생각은 유매 뿐만이 아니라 전교생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차군 그놈은 단련실에서 치뤄진 모든 대련을 아무 기술도 쓰지 않고 달려나가 올려치기 일격만으로 끝냈다. 자세빈처럼 강력한 능력에 의지하지 않아도, 차대엽은 모든 기본기 자체가 귀신같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 싫다.
“너는 어느 쪽을 응원하는데?”
“나? 난 네가 올라오는 게 낫지 당연히.”
어떻게 보면 얕보고 있다고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는 말이지만, 나는 솔직하게 유매를 응원하고 있다는 걸 밝혔다.
금예린 앞에서도 말한 거지만 유매가 상대라면 럭키 펀치를 맞췄을 때 만에 하나 이길 가능성이라도 있지, 차대엽은 영 답이 없었다. 금예린은 반대로 유매가 상대일 경우 전혀 승산이 없기에 차대엽이 이겨서 올라오길 바라겠지만.
“그래? 의외네, 꽤 친한 줄 알았는데.”
“친한 거랑 이런 건 별개지.”
사실 유매가 올라오면 좋겠다고 말은 하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유매가 차대엽을 정면에서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차대엽이 방심하는 성격이라면 참 좋을 텐데, 그놈은 검을 잡는 순간 강제로 냉정해지는 체질이니까.
“오늘 끝나고 같이 걔 시합 보러 갈래?”
차대엽의 1회전 시합은 오늘이었다. 나는 전혀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지만, 유매가 직접 보면 무언가 감을 잡을지도 모른다. 내가 꼬드기자 유매는 별 말 않고 콧숨을 쉬었다. 이제는 그게 나름대로의 승낙의 표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방과후, 나와 유매는 관중석 맨 앞자리에 앉았다.
미리 나와서 몸을 풀고 있는 건 주하리와 차대엽이었다. 주하리의 손목에 걸린 팔찌에는 짧게 잘려나가 있는 사슬이 잘그락댔다. 경기가 시작될 시간이 되어 시합장에 두 사람이 서서 마주보았다. 악수한 주하리가 차대엽에게 말했다.
“수석이랑 싸우다니 긴장되네···. 대련할 땐 전혀 기술을 안 쓰던데. 자체적으로 금제라도 건 거야?”
“그런 잘난 척은 아니고··· 단순한 동경이야. 올려치기만으로 순위전 우승. 형이 여기 다닐 때 낸 기록이거든.”
“잘난 척 맞네 뭐.”
주하리가 웃고, 두 사람이 자리로 돌아갔다. 시작 신호와 함께, 호흡을 가다듬던 차대엽이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언제나 상대를 일격으로 끝내버렸던 폭풍같은 기세의 올려치기.
“예고까지 해놓고 맞길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이지.”
하지만 주하리는 아무렇지 않게 칼날 밑에 자기 검을 걸어, 오히려 힘을 더해 올려쳐버렸다. 커다란 동작에 순간적으로 빈틈이 생겼다. 주하리의 왼쪽 팔꿈치가 차대엽의 명치를 강렬하게 찍어버렸다. 차대엽이 강한 충격에 뒤로 물러났다.
“그걸 또 몸을 빼서 흘리는구나···.”
주하리가 순수하게 감탄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차대엽의 눈에 화륵, 푸른 불꽃이 맺히기 시작했다. 귀안. 모든 힘의 흐름을 포착하는 검귀의 눈. 방금 나눈 한 합만으로 차대엽은 적의 역량이 자신 못지 않다는 걸 확신한 모양이었다.
“1회전부터 이 정도인 건가. 역시 형은 대단해.”
차대엽이 아래를 향하게 둔 칼끝을 중단으로 조정했다. 올려치기만으로 이긴다는 억지를 부릴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쏘아져나가 검극을 나누었다. 초고속이라고 할 만한 차대엽의 참격을, 주하리는 가까스로 전부 흘려내고 있다.
“저게 뭐야···.”
관중석에서는 질렸다는 듯 경악이 흘러나왔다. 차대엽은 지금 의도적으로 몸의 마력을 폭발시키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검으로써 주하리를 꺾고 싶다는 고집이었다. 순수한 마력의 결투와는 전혀 다른, 기술과 기술의 맞물림이 있었다.
주하리는 모든 무기를 다루는 데에 있어 달인의 영역에 올라있지만, 검으로 한정한다면 차대엽 또한 마찬가지. 달인과 달인의 싸움이다. 서로가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 몇 수 앞까지 고려해서 움직이고 있다. 보통 사람은 방금의 발 움직임에서 어떤 심리전이 오고 갔는지 파악하지조차 못할 것이다.
“수싸움으로만 승부라니. 나한테 맞춰주는 거야?”
“뭔가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실례였으면 사과하고.”
“아니···. 오히려 고마운데!”
막상막하의 검격과 검격이 수도 없이 오고 갔다. 그리고 주하리가 축을 틀어, 한 순간 차대엽의 코앞에서 사라졌다. 검술보다는 암살의 수법에 가까운 움직임. 옆쪽에서 내리찍힌 주하리의 발이 차대엽의 검을 밟아 바닥에 고정시켰다.
“한 번밖에 안 통하는 깜짝 기술이야.”
반쯤 반칙이라는 듯 멋쩍게 웃은 주하리가 검을 휘둘렀다.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
서로 검을 다루는 역량이 비슷하다 해도, 차대엽의 검술은 어디까지나 마력에 의한 몸의 추진을 전제로 쌓아올린 기술. 주하리에게 맞춰주겠다고 마력을 스스로 봉인해 순수한 검술로만 싸운 순간부터 차대엽이 불리해지는 게 당연했다.
“내 패배군.”
지금은 이것이 자신의 한계라는 듯, 차대엽이 순순히 결과를 인정했다. 그리고 깡! 차대엽의 어깨를 내리친 주하리의 검이 그대로 멈췄다. 칼자루를 쥔 주하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맞은 어깨엔 요만큼도 상처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부러 억눌러놓았던 마력이 엔진에 시동을 넣듯 차대엽의 몸 안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이제부터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차대엽이 단련해온 진짜 그의 검술이었다.
“양류백로(楊柳百路).”
푸른 마력이 차대엽의 몸을 감싼다. 그리고 일격. 주하리는 자신과 비교해 훨씬 완력이 강한 차대엽의 검격을 몇 번이고 능숙하게 흘려보냈지만, 지금의 검에는 흘려낼 수 있는 방법 따위 없었다. 틈이 없다. 마력이 담겨 강해진 위력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 기술 자체의 완성도가 차원이 다르다.
차대엽이 마력을 쓰자마자, 주하리는 단 한 번의 공격에 나가떨어졌다. 시합 종료 신호가 경기장에 울려퍼졌다.
나는 낭패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신검을 발현하는 모습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차대엽은 본선에서 유매와 맞붙게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진심을 내보이지 않았다. 약점 자체가 없는데 모든 요소가 특별하기까지 한 괴물같은 놈.
“이길 수 있겠냐?”
“대단하긴 한데···. 다가올 엄두도 못 내게 폭격하면 돼.”
확실히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유매는 마력량도 주문을 뽑아내는 속도도 정상이 아니니, 멀리서 대단한 화력의 주문들을 펑펑 쏴대면 된다. 마력독재를 사용한다면 제대로 못 피하게 방해를 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것만으로 이길 수 있다. 이번 경기까지 보여준 차대엽의 실력 정도라면.
“힘내라.”
진심으로 응원하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 * *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다가왔다.
“누가 이길까?”
“당연히 유매지. 2학년들도 갖고 노는 수준인데.”
“수석이 왜 수석이겠냐? 차대엽이 이겨.”
아직 2회전인 탓에 비교적 좁은 시합장에 관중석이 가득 찼다. 자세빈과 내 싸움의 경우엔 자세빈 혼자 멋대로 이것이 결승전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거지만, 이번 시합은 세한기전의 거의 전원이 결승전이나 마찬가지라고 판단했다.
그 증거로 1학년 학생들뿐만 아니라 유설을 꺾어낸 유매에게 흥미를 가진 선배들, 그 외 교수진들까지 꼭 경기를 참관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있었다. 시합장에 차대엽과 유매가 입장해서 뚜벅뚜벅 걸어왔다. 마주선 두 사람이 악수했다.
시작 신호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유매는 수많은 주문들을 장전하기 시작했고. 차대엽은 그저 조용히 손을 올렸다.
“신검 발현.”
처음부터? 나는 두 눈을 휘동그레 뜨며 놀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미 차대엽은 몇 번 유매와 대치해본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유매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그 몸으로 체감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상대해야 하는 상대. 차대엽은 그렇게 판단하고 신검을 꺼낸 것이다.
차대엽의 손바닥 위에 푸른빛을 머금은 검 한 자루가 나타났다. 신검(身劍). 검귀들이 체내의 연금기관을 통해 마력으로 발현시키는, 자신의 팔다리나 마찬가지인 분신 같은 검.
신검은 하나하나가 마검이다. 그것에 깃들어있는 특별한 능력은, 사용자가 검에 대해 지니고 있는 심상에 기반했다.
예를 들어 검을 자신이 세상과 접촉하는 수단이라 생각한 자의 신검엔 주변을 감지하는 통찰이 발현됐다. 검을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친구라 생각하는 자의 신검엔 인격이 발현된 경우도 있었다. 그 대가로 자기 인격이 불안정해졌지만.
‘차대운 그 양반은 방해물을 양단할 수 있는 도구쯤이라 생각했을 테고.’
그렇게 모든 걸 벨 수 있는 검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차대엽이 생각하는 검의 정의는, 힘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수단. 그 능력은 검에 가해진 충격과 마력을 한계까지 저장해뒀다가, 필요할 때 마음대로 방출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나 둘 셋에서 시작해 여섯 발. 순식간에 발현된 폭열의 창들이 가만히 선 차대엽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내 큰 바람에 연기가 걷혔다.
“뭐···.”
상처 하나 없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차대엽의 검에, 유매가 방금 쏘아낸 창과 같은 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 순위전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