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위전 (4) >
난장판이 된 실내. 현장을 제압한 진소란이 검을 땅바닥에 툭툭 쳤다. 몸이 밧줄로 꽁꽁 묶여 구속된 2학년생들은 얌전히 앉아 연행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입했을 때 진소란이 낸 속도를 보고 도주는 불가능하다고 체념한 것이다.
“이건 폭거다! 우린 돈을 벌려던 게 아니야! 순위전에 약간의 재미를 더해주려 했을 뿐이지. 다 학생들을 위해서라고!”
“그래, 우리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거냐!”
순위전 토토로 한 탕 벌어먹으려 화장실에 명함을 뿌리던 인간들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묶여있는 선배들의 사진을 찍었다. 선도부에 전송했으니 얼마 안 있어 후속 선도부원들이 도착할 것이다. 한 건 끝냈다고 쭉 기지개를 펴자, 진소란이 걱정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런데 넌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나야 고맙다만. 다음 경기가 있으니 단련에 매진할 시간도 부족할 텐데.”
“실전이 최고의 훈련이지 뭐.”
나는 시치미를 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내가 진소란을 도와서 선도부 일들을 해결해주고 있는 이유는 오히려 순위전 때문이었다. 당장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선 소소한 퀘스트들을 계속 완료해 크레딧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퀘스트 완료 : 도박 운영자를 잡아들였습니다.>
<보상 : 4,000 Credit>
<추가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전원 처치 : 2,000 Credit을 획득합니다.>
상태창을 확인한 내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이 모든 게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사람이 바뀐 수준으로 전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지 않는 이상, 이길 수 있는 놈은 이기고 못 이기는 건 죽어도 못 이긴다.
‘사실 욕심 부릴 필요는 없는데.’
순위전 퀘스트의 최소 조건은 이미 달성했다. 며칠 뒤에 있을 내 다음 경기는 준결승전이었다. 상대는 자세빈, 담민우와 언제나 함께 다니는 늑대 혼혈인 현미나. 2회전을 상처 없이 통과할 수 있었던 건 상대가 착각해준 행운 덕분이었다.
내 2회전 상대는 지금은 자퇴한 녀석이 유매에게 화분을 떨어뜨리는 걸 옆에서 구경했던 공범 중 하나였다. 놈은 시합이 시작되기 전부터 날 보고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더니, 순간이동으로 뒤를 잡고 염동력으로 때리자마자 항복했다.
내가 발한 염동력이 전의를 잃을 만큼 강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은 움직임에 비해, 너무도 맥빠지는 공격. 긴장하고 있던 그 놈은 나를 일부러 갖고 놀려는 것이다, 포기하라고 협박하는 것이다 등등 오만가지 상상을 혼자 다 했겠지. 그 결과가 기권이었다.
“한 번만 더 이기면 결승이군. 응원한다.”
“그래. 기적처럼 금예린이 올라와주면 좋을 텐데.”
“음? 준결승 상대는 이길 자신이 있는 건가?”
진소란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늑대 혼혈인 현미나는 분명 준결승까지 올라오기 충분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혼혈로서의 강점인 압도적인 신체능력과 근육의 탄력성을 최대한 살린 검술. 무엇보다 상처입으면 상처입을수록 더 흥분해서 물고 늘어지는 기질.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천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성이 너무 나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긴다. 전술이고 뭐고 없이, 아직 1학년의 현미나가 상대라면 백 퍼센트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때 가서 보면 알 거야.”
나는 피식 웃고 다음 장소를 향해 진소란을 안내했다.
* * *
준결승부터는 대형 시합장에서 외부 참관이 허용된다.
그에 맞게 바로 전까지의 경기보다 관중 수는 두 배 가까이 늘어나있었다. 각 기사단에서 인재를 체크하기 위해 온 사람들과, 리포터 같은 기사업계 관련자들. 그저 흥미 본위로 학생들의 싸움을 구경하러 온 일반인들도 섞여있었다.
이미 시합장 밖에서는 포장마차가 진을 치고 장사를 벌이고 있었다. 순위전은 세한기전의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이기도 하기에, 달아오른 기사육성과 학생들은 물론 다른 과 학생들도 이번 학년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 구경을 와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시합장 양쪽에 입장했다.
검귀 혼혈인 차대엽과 여우 혼혈인 금예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검사와 주술사의 싸움이냐며 그저 기대된다는 얼굴로 앉아있었지만, 저번 유매와 차대엽의 경기를 본 인간들은 모두 금예린에게 최대한 힘내라는 시선들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응원한다기보단 애도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저번 경기에서 유매가 보여주었던 화력은 굉장하다는 한 마디로 끝낼 것이 아니었다. 올해만 아니었다면 어떤 세대의 1학년들과 맞붙어도 거의 확실하게 학년 1등을 차지했을 것이다.
차대엽은 그런 유매를 적어도 한 단계 이상 격의 차이를 보여주며 압도적으로 눌러버렸다. 뒤에서 주문을 쏘아내는 마법사가 검사와 일 대 일을 하는 게 불리하단 것을 감안해도, 차대엽의 역량은 확실하게 유매를 한 발짝 앞서있었다.
그것은 세한기전의 1학년에 차대엽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이 더 이상 없다는 걸 의미했다. 1학년은 물론 세한에서 작년동안 죽도록 구른 2학년들조차 제패할 수 있을지 몰랐다.
‘2학년 수석이랑 유설 선배는 좀 힘들겠지만.’
나는 지금의 2학년과 차대엽을 상상 속에서 붙여보았다. 분명히 유설 선배는 유매에게 패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매를 이긴 차대엽이 유설도 쉽게 꺾을 수 있단 것은 아니었다 유매는 모든 마법사의 천적이었다. 그때의 싸움에선 마력독재의 특성 때문에 유설의 필살기가 봉인되어버렸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사이 두 사람은 이미 악수를 나누고 제자리에 돌아갔다. 시작 신호가 울리기 직전, 금예린은 자신의 등 뒤에 붉은 결계를 발현시켰다. 두 번째 결계인 홍련이었다. 차대엽 또한 여기까지 와서 방심은 않겠다는 듯 신검을 꺼냈다. 차대엽의 눈동자에 귀안의 푸른 안광이 맺혔다.
“···설마 정말로 그 마녀를 꺾고 올라오실 줄이야.”
“기대한 대로 흘러가서 기쁜 건가?”
“아뇨, 오산이예요.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괴물일 줄은 몰랐거든요. 하지만 승리는 받아가겠어요.”
부채를 휙 펼쳐서 입가를 가린 금예린이 앉아있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차대엽을 똑바로 마주본다.
“사소한 원한이 있어서 말이죠. 제가 제일 먼저 해보고 싶거든요. 저 사람의 진면목을 끌어내 까발리는 건.”
“그건 나도 좀 궁금한데.”
시작 신호와 함께, 금예린 등 뒤의 결계가 격렬하게 회전했다. 차대엽에게 선공권을 넘겨줬다간 큰일이 나버린다. 그렇게 판단한 금예린은 처음부터 모든 부적을 쏟아부었다.
장전되어있던 부적들이 차대엽을 향해 날아갔다. 한 발 한 발에 깃든 화력은 유매의 주문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직격만 하면 차대엽의 방어를 그대로 박살내버릴 수 있는 폭열의 창과 달리, 금예린의 부적은 몇 대쯤 맞아줘도 별 상관이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날아오고 있는 숫자가 너무나 많다.
마력의 효율과 연사력만큼은 유매 이상이었다. 폭주하는 기관총처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부적들의 세례. 원래부터 부적이란 미리 술식을 짜넣은 뒤 마력을 넣어 점화만 하면 될 뿐인 편리한 물건이었지만, 금예린의 결계는 그 점화 과정과 재장전조차 고속으로 회전하며 자동으로 끝내버리고 있다.
차대엽이 신검으로 막아내는 걸 포기하고 옆으로 도망쳤다. 저런 속도로 쏘아져나오는 공격이라면 신검으로 흡수해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대엽이 회피를 택함에도 금예린은 연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반동을 견디지 못한 결계가 과부하될 때까지 모든 부적을 전부 다 쏴버리려는 속셈이다.
“너였으면 어떻게 막았냐? 저거.”
“결계를 고장내겠지.”
옆에서 보고 있던 유매가 고민할 거리도 안 된다는 듯 대답했다. 하긴 멀리서 결계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매에게 금예린의 연사 따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대엽은 어떻게 할까. 다시 시합장을 바라보자, 벌써 백 발은 넘게 쏘아낸 것 같은 부적의 연사는 아직도 전혀 수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옆으로 달려나가며 피하던 차대엽이 갑자기 땅에 검을 내리치고 멈추어섰다.
“백접.”
그리고 모두가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차대엽의 몸은 부적의 궤도에 있었는데, 부적은 그대로 차대엽 통과해 뒤로 날아갔다. 멀리서 보면 맞은 부분의 몸 자체가 허상처럼 흩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차대엽은 훨씬 앞에 있었다.
정말로 차대엽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진 것이 아니다. 단순히 몸을 최소한으로 움직여 일직선의 궤도에서 벗어난 결과일 뿐이었다. 그리고 잠깐 멈추었다가 순간적인 고속기동에 쓴 차대엽의 마력이 도깨비불처럼 푸른 잔상을 남겼다.
금예린은 차대엽을 향해 다시 결계를 돌렸고, 차대엽은 또다시 잠깐 멈추어 그 눈으로 부적의 궤도를 똑바로 확인했다. 다시 부적에 맞아야 했을 차대엽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진다. 푸른 색의 도깨비불이 그 자리에 남고, 차대엽은 전진한다.
귀신에 홀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움직임이지만, 저것이 본래 차대엽을 비롯한 검귀들의 전투법이었다.
일부러 아슬아슬할 때까지 공격을 바라보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회피한다. 적의 회피가 늦으면 늦을수록 이미 내지른 공격의 선택지를 바꿀 수는 없고, 검귀들의 전투센스는 그 작은 지연을 철저하게 이득으로 바꾸며 전장을 지배한다.
페이크고 뭐고 전부 무시하고 공격의 의도만을 읽어낼 수 있는 귀안이 있기에 가능한 전법이었다. 차대엽에게 날아간 부적은 허상을 꿰뚫듯이 통과해버리고, 푸른 불꽃의 잔상만이 그 자리에 남아 차대엽이 몇 번에 걸쳐 거리를 좁힌다.
‘저게 원래 차대엽이지.’
관중석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피할 생각조차 없는 것처럼 서있다 공격을 흘려보내더니, 다음 순간 불꽃과 함께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정말 귀신에 홀린 것 같겠지. 아마 반절 정도는 저게 그냥 마력 방출과 몸놀림만으로 하고 있는 짓이라는 말을 들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유매와 싸울 때는 마력독재의 견제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을 뿐이다. 모든 마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차대엽에게 있어서, 저건 숨 쉬는 것과 같은 당연한 보법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 도약에 차대엽은 완전히 금예린의 배후를 잡았다. 완벽한 외통수였다. 금예린이 이제 와서 등을 돌려봤자 차대엽의 검보다 빠를 수는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금예린이 조용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랑으로 여기세요. 이걸 보는 건 당신이 처음이니.”
금예린의 발밑에 갑자기 커다란 문양이 나타났다. 언뜻 보기엔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남색을 하고 있는 제3의 결계. 결계 자체를 보조하고 간섭하는 제1결계인 장화나, 부적을 투사하는 순수한 화력 지향형인 홍련과는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금예린의 전문 분야인 ‘저주’를 담당하는 결계였다.
“검귀의 유일한 약점은 속도와 힘, 튼튼함과 기술 모든 걸 갖췄지만 유일하게 저주에 대한 저항력이 전무하다는 것.”
늪과 심해를 연상시키는 결계 안에서 작은 손들이 뻗어나와 차대엽의 발을 묶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된 차대엽을 보고 부채를 편 금예린이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조절은 해드릴 테니, 한동안 기절해있으시길.”
그리고 차대엽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툭 쓰러진다. 그게 금예린이 상상한 미래였을 것이다. 하지만 차대엽은 그냥 멀쩡하게 서있었다. 금예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차대엽이 손가락에 끼고 있던 투명한 유리해골 반지가 검은 색으로 물들었다. 멍하니 반지를 바라보고 있던 차대엽이 말했다.
“왠지 미안한데.”
담담히 검을 치켜든 차대엽이 쿵, 금예린을 내리쳤다.
* * *
엄청난 속도로 끊임없이 부적을 연사하던 금예린의 저력과, 차대엽이 보여주었던 기묘한 움직임에 사람들은 감탄하며 이게 세한의 수준인가, 하고 떠들었다. 순위전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그렇게 또 관중석이 만석이 되어 대단한 싸움을 보고 싶다는 기대감으로 빽빽이 차있는 준결승 시합장.
나는 온갖 사람들로부터 우우우- 야유를 받고 있었다. 뭔가를 던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전부 천년서생이 시합장에 펼쳐둔 결계에 막혀 튕겨나갔다. 쭈욱 기지개를 편 나는 양손을 뒷머리에 모은 채 다리를 꼬고 물어보았다.
“몇 분 남았어요?”
“···5분 14초 남았다만.”
나를 쳐다보는 한시혁이 말했다.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은데 할 말이 없어서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나에게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돌멩이로 몇 대 얻어맞은 현미나가 울상을 지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내려다보지 않았다.
“야, 차석! 정정당당히 승부해!”
“5분이라···.”
남은 염력은 충분했다. 나는 커다란 시합장 위쪽에 둥둥 떠서, 아무 것도 못하고 칼만 흔들고 있는 현미나를 내려다봤다.
< 순위전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