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세나 (1) >
시합장에 떨어진 거대한 체구의 마물이 차대엽을 튕겨냈다. 이내 관중석 쪽에서 쏜살같이 뛰쳐나온 차우진이 차대엽을 받았다. 반대편에선 뛰어내린 한시혁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차우진은 온통 새까만 색의 마물을 바라보았다.
‘최소한 망량급··· 아니. 난신급인가?’
백귀급, 망량급, 난신급으로 구분되는 상위 마물의 등급. 그 중에서도 난신급이라면, 기사단 하나의 정예가 전부 달라붙어야 토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차우진은 한시혁과 둘이서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주변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몇 시간 동안 치고 박아 캠퍼스 전체를 초토화시켜야 비로소 토벌할 수 있겠지. 눈앞의 마물에게 느껴지는 기척은 그 정도 수준이었다. 손바닥 위의 소녀는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한시혁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공격인가 방어인가. 이대로 대치한 채 혹시 있을지 모를 관중석을 향한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 집중해야 할지, 아니면 당장 달려들어서 전력으로 토벌을 시도해야 할지 신중하게 가늠하고 있다.
고개를 돌린 한시혁이 주변의 결계를 살폈다.
‘보호막은 곧바로 복구됐나.’
천년서생은 학장실에서 세한기전의 모든 시설과 결계물들을 조율하고 있다. 관중석에 여파를 미치지 않게 하는 보호막도, 시합하는 학생들이 치명상을 입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도, 세한에서 다른 곳으로 전이할 수 있는 게이트도. 설계부터 시작해 마력의 공급도 조율도 전부 학장이 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스템에 돌리고 있는 마력을 회수한다면, 당장에라도 학장이 직접 날아와 침입자를 박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백 퍼센트 피해가 나온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넘쳐흐르는 저 괴물의 마력. 살짝 포효를 내지르는 것만으로 일반인은 실신할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대피가 끝날 때까지 보호막은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들이 해야할 것은, 최대한 시합장 안의 인원들을 보호하며 보호막을 풀어도 될 상황이 될 때까지 버티는 것. 천년서생이 도착하기만 하면 상황은 종료된다. 다른 교수들은 이미 관중들을 인솔하며 대피시키고 있었다.
“너, 여기가 어딘지 알고 쳐들어 온 거냐?”
차우진이 두 자루의 신검을 발현시켰다. 질문은 거대한 마물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손바닥 위에 서있는 소녀에게 물은 것이었다. 사실 위화감이라고 하면 캠퍼스 한복판에 나타난 상위 마물보다 그녀의 존재 쪽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마물이 인간을 따르고 있다. 비슷한 능력을 지닌 기사를 못 본 것도 아니지만, 그건 작은 마물을 능력으로 제압해 일시적으로 조종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소녀는 기사단 하나가 통째로 달려들어야 할 것 같은 괴물을 애완동물 만지듯 쓰다듬고 있었다. 마치 조련이라도 한 모양새가 아닌가.
소녀는 관심이 없는 듯 차우진 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마물이 손바닥으로 쥐고 있는 송한솔을 관찰하며, 겁먹지 않아 재미없다는 듯 살짝 입꼬리를 내렸을 뿐이다.
대피는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대피는커녕 1학년 몇몇은 자신들도 같이 싸우겠다고 내려오려 하는 걸 교수들이 억지로 저지하고 있다. 의리가 있는 것은 좋다만 제발 상황을 생각해주면 좋겠다. 지금 차우진과 한시혁 주변의 전장은, 웬만한 현역 기사들조차 짐덩이에 불과한 레벨이었다.
그리고 이내 한시혁은 결심을 끝냈다.
“학장이 오기까지는 너무 늦어. 교전한다.”
“뭐? 한시혁, 제정신이냐?”
차우진이 눈썹을 찌푸렸다. 여기서는 사상자가 나오지 않게 억제하며 결계가 풀리고 학장이 전이해오길 기다리는 게 최선의 방책이었다. 무엇보다 저쪽의 손바닥엔 학생 하나가 잡혀있다. 싸움을 거는 순간 인질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송한솔이 저쪽의 손아귀에 잡혀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교전하겠다 판단한 것이다. 얼마간 사상자가 나오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송한솔이라는 학생을 여기서 잃을 수는 없었다.
한시혁이 차우진에게 은밀하게 신호를 보냈다. 자신의 사안을 반동을 무시하고 폭주시키면, 저만한 마물이라도 분명 한 순간 정도는 움직임을 완전히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차우진의 속도라면 그 틈을 타서 송한솔을 탈환할 수 있다.
그리고 한시혁이 사안을 발동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갑자기 자신이 능력을 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마물을 중심으로 새까만 그림자가 주변에 늪처럼 퍼져있었다. 이내 온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앞을 보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익숙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사안이라고···?”
한시혁이 힘겹게 저항하며 말했다. 눈앞의 소녀는 독사 혼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시혁이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몸에 걸린 압박은 분명한 사안의 제압이다. 옆에 선 차우진이 상황을 이해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만 가자. 시간을 끌었다간 귀찮아지겠어.”
소녀의 한마디에 순순히 복종하듯, 시합장의 마물이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바로 도망치려는 속셈이다. 차우진은 당장에라도 달려들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었다.
저 마물 하나 뿐이라면 이길 수 있다. 한시혁이 무력화됐다고 해도 혼자서 어떻게든 감당해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마물의 손바닥 위에 서있는 소녀가 마력을 일으킨 순간, 지금 이 자리의 승산이 급격하게 낮아지는 싸늘함을 느꼈다.
“뭐. 잠깐 갔다 올게요.”
마물의 손바닥에 잡혀있는 송한솔은 괜찮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마물이 날개를 펴고 공중에 떠오르자, 차우진 옆에서 마물을 바라보고 있던 차대엽이 뭐라뭐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미 바닥에서 멀어진 소녀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다시 방어막을 깨뜨리고 하늘로 올라간 마물이 어딘가를 향해 비행했다. 커다란 손바닥 위에 앉아있는 소녀가, 주먹 쥔 마물의 손에 잡혀있는 송한솔을 보며 말했다.
“부탁할 일이 있는데, 좀 들어줄래?”
“아이고 그러믄요. 무슨 일이든 해드려야지.”
잡혀있는 송한솔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상상했던 차대엽의 이미지와 많이 다른 듯, 소녀가 눈썹을 찌푸렸다.
* * *
마물은 사실 인류의 적이라고 할 것이 못 되었다.
물론 급발생한 마물들이 뛰쳐나오거나 해서 인명 피해가 나는 일은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인류가 공포에 떨어야 할 위협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었다. 난신급의 마물이 딸려있는 둥지라 해도, 1급 기사 십수 명이 달라붙으면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고 확실하게 공략할 수 있다.
최상위의 기사들은 마물보다도 더 괴물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했던 마물이 내일 당장 다시 나타나도 기사단들은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기사단이라기보단 일부 돌출된 전력 몇몇이 해결한다는 게 맞겠지만.
혈통시대의 게임에서도 마물의 취급은 마찬가지였다.
온라인 RPG로 비유하자면, 만렙을 찍기 위해 사냥터에서 잡는 몬스터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전략도 필요하고, 레벨 차이가 많이 나는 몬스터들은 상대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플레이어가 장벽을 느끼지는 않는다.
정말로 답이 없는 건 그 위에 있는 존재들이었다.
마물의 정의가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적대하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마력 생물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것들은 엄밀히 말해 마물조차 아니었다. 전원이 최소 난신급 이상.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하고, 인간의 말을 할 수도 있는 이질적인 존재들.
마물의 영장, 요괴(妖怪).
각자 무리를 이루어 세상의 뒷면을 거닐고 있는 존재들. 그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마물은 아무렇게나 지배할 수 있는 덜떨어진 짐승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요괴들의 정점에 선 대요괴와 휘하에 있는 백귀야행이야말로, 혈통시대 중반부에 싸우게 되는 주요한 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혈통시대에 등장하는 대요괴는 총 네 명이었다.
인간을 편리하게 이용하고 싶어하는 요호.
인간을 적대하며 세상을 뒤집으려는 두억시니.
순수한 요괴로서 마음대로 살아가는 불가살이.
그리고 모든 면에서 예외인 흑룡 이무기.
백귀야행의 우두머리들은 서로 가치관이 다르기에, 다같이 합심해 인간들을 죽이자 군단을 조직하지 않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대요괴와 싸우려면 평범한 기사단 정도로는 택도 없고 천년서생 정도는 되어야 겨우 맞상대가 가능했다.
솔직히 지금은 눈만 마주쳐도 죽을 만큼 힘의 격차가 있지만, 결국 언젠가는 넷 모두 죽여야 했다. 세한기전을 졸업한 뒤의 차대엽이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차대엽인 줄 알고 납치해온 이 소녀야말로, 한 백귀야행을 이끄는 위치에 서있던 대요괴의 말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른 대요괴들과 나란히 서있던 존재였다.
“뭘 그렇게 힐끔거리고 있어? 오빠.”
“······.”
“배고파? 배고프면 냉장고에서 적당히 꺼내 먹던가. 임시 거처로 쓰고 있는 곳이라 맛없는 거밖에 없지만.”
나를 납치해온 마른 체구의 소녀는, 소파 팔걸이에 다리를 뻗은 채 게임기를 갖고 놀고 있었다. 검은 색 빵모자를 쓴 채, 짙은 보라색의 생머리를 허리까지 내려오도록 길렀다.
이쪽은 밧줄 같은 걸로 묶이지도 않고 자유롭게 풀려있었다. 딱히 배려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도망치지 못하니 포기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사실 도망쳐달라 절을 하며 부탁해도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온갖 쓰레기가 널브러져있는 방 안의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냉장고에는 들은 대로 캔 음료나 참치 통조림 따위의 보존식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담담히 차가운 콜라 하나를 꺼내 적당한 의자에 앉아 캔을 열었다.
음료에 뭔가가 들어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난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였다. 적어도 일이 다 끝나기 전까진 오히려 나서서 보호해줄 것이다.
“긴장하지 마. 잡아먹거나 하진 않으니까··· 하고 달래줘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왜 그렇게 느긋한 거야? 재미 없게.”
“차대엽이 필요해서 데려온 거잖아. 검성의 성소에 들어가려면 직계의 피를 이은 인간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지켜주면 지켜줬지 해치려 들지는 않겠지.”
내 대답에 소녀가 보고 있던 화면에서 휙 눈을 돌렸다. 펑, 게임 오버! 하는 효과음이 그녀의 손에 들린 게임기에서 들려왔다. 눈썹을 찌푸린 소녀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눈치챈 듯 나를 노려보았다. 난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트림했다.
“···뭐야. 오빠, 차대엽이 아니야?”
“검귀 뿔 안 달린 거 보면 몰라?”
난 내 이마 부근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웃었다.
그리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휙 던져주었다. 지갑을 받아든 소녀는 안을 열어 내 민증을 확인했다. 그 위엔 송한솔이란 세 글자가 당당하게 적혀있었다. 시합장에 난입한다는 초강수를 던져놓고 사람을 착각해 잘못 데려왔다.
“너 좀 멍청하단 말 많이 듣지?”
바닥에 늘어져있던 그녀의 그림자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나를 지금 당장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산하는 중일 것이다. 나는 양손을 들어올려 항복 자세를 취했다.
“진정해, 진정.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 나랑 짜도 문제 없어. 성소에 침입할 방법은 알고 있으니.”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절대 협조하지 않겠다고, 납치당한 차대엽이 소녀한테 땡깡을 부리다 단번에 그림자로 제압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쓰러진 차대엽의 귓가에 속삭여진 한 마디에, 차대엽은 충격을 받아서 순순히 그녀를 따라가겠지.
당신 아버지의 위치를 알고 있어, 하고.
“굳이 걔가 자기 아빠 미친 꼴을 볼 필요는 없지. 청소년기에 그런 충격적인 경험을 하는 건 정신에 안 좋아.”
“···뭐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었다. 대뜸 시합장에 난입해 날 납치해온 이 소녀의 과거와 정체까지도.
흑룡 이무기에게 박살이 나, 대요괴의 자리를 빼앗긴 채 죽어가던 전대 대요괴 어둑시니. 그 유해를 자신의 그림자에 받아들여 2대째 비슷한 존재가 된 것이 바로 눈앞의 소녀였다. 그림자 속에는 지금도 수많은 마물이 저장되어있다.
나는 걸어가 테이블에 펼쳐져있는 종이를 들어보았다.
<아이템 퀘스트 : 지하 성소의 지도>
<정세나와 함께 미쳐버린 검성을 제압하시오.>
<보상 : 요괴 시나리오 시작, 10,000 Credit>
혈통시대의 주인공은 차대엽 하나 뿐만이 아니다. 각 무대를 이끌어나가는 주요 인물이 한 명씩 존재했고, 그녀는 인간인 동시에 온갖 마물들을 품고 있는 대요괴의 후계자.
혈통시대 요괴 사이드의 주인공이었다.
< 정세나 (1) > 끝